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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로 필/칼 럼

은 뜯기, 달러 뜯기(한겨레 2020-05-08 06:01)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1610년 명(明)은 조선에 염등(冉登)을 사신으로 보냈다. 세자 책봉을 허가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조선 왕이 자신의 후계자로 누구를 세우건 중국이 가타부타 할 문제가 아니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터이다.


세자 책봉 조서(詔書)를 가지고 온 염등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사실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광해군과 조정의 관료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염등이 뜯어갈 은(銀)을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염등이 임진강 앞에 이르렀을 때 작년에 놓았던 부교(浮橋)가 빗물에 떠내려가고 없었다.

염등은 화를 내며 은 1천 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황해도에서 어찌어찌 마련해서 300냥을 주기로 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닷새 뒤인 7월8일 염등은 예물로 건넨 은 2천 냥이 적다고 분노하며 자신을 이렇게 대접하면 한 달 뒤에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결국 은 1천 냥과 품질 좋은 인삼 100근을 더 얹어 주었다.조선의 은을 털어내는 수법은 실로 다양했다. 염등은 조선의 왕비에게 예물을 보냈다. 당연히 답례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당연히 은으로 결재(?)해야만 하였다. 결재된 은은 9천 냥 이상이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왕에게, 대비에게 시시한 예물을 보내고 답례로 은을 챙겼다. 조선의 특산물을 미끼로 은을 챙기는 방법도 있었다. 담비 가죽을 달라고 하여 최고급을 마련해도 퇴짜를 놓고 결국에는 은으로 대신 받았다. 구하기도 힘든 흰 호랑이, 검은 호랑이 가죽을 달라고 요구하고 역시 구하지 못하면 은으로 대신 챙겼다.염등이 세자 책봉 조서를 가지고 왔으니, 조선의 세자는 염등을 만나 감사를 표해야만 하였다. 조선 조정의 계획은 이러했다. 곧 세자가 염등을 처음 만날 때 감사의 예로 500냥, 만난 직후 1500냥, 뒤에 따로 보답하는 예를 표하기 위해 4천 냥, 기타 잡다한 예물을 은으로 환산하여 732냥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모두 6732냥이다. 그런데 염등 측은 9천 냥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염등은 떠날 때까지 온갖 술수로 은을 강요했고 조선 조정은 질질 끌려다니면서 나라 안에 있는 은을 쥐어짜서 바쳤다. 염등은 도합 5만~6만 냥에 이르는 은을 강탈해 갔다고 한다.염등이 최초였을까? 그럴 리 없다.

선조 사후 장자(임해군) 아닌 차자(광해군)가 왕위에 오른 것을 변명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사신 유용(劉用)에게 은 5만 냥을 건넸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명이 망할 때까지 명의 사신은 올 때마다 많게는 10만 냥에 이르는 은을 털어갔다. 그 은은 모두 조선의 백성을 쥐어짠 것이었다. 이 시기 국내 최대의 은광이었던 단천은광(端川銀鑛)의 1년 생산량이 500냥 정도였으니, 염등과 명의 사신이 뜯어간 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에서 명의 사신에게 은을 뜯긴 기사를 읽노라면 분노와 수치감이 교차한다.

목하 미국의 트럼프는 주한미군 방위비를 턱도 없이 올려달라고 한다. 동맹이니 안보니 하는 미사여구를 걷어내면, 협박과 공갈로 조선의 은을 뜯어가던 명의 사신과 다름이 없다. 갈취 대상이 은이 아니라 달러로 바뀐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