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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서럽도록 아름다워" 시인은 江을 노래했고 江은 그를 키웠다 (전남일보 2013. 02.12. 00:00)

"서럽도록 아름다워" 시인은 江을 노래했고 江은 그를 키웠다

5) '시인의 고향' 진메마을
섬진강 시인 김용택
60년을 진메마을에 살고 40년 초등아이들 가르쳐
서재 관란헌에서 듣는 아침과 밤, 강 물소리 거기서 얻은 시적 영감
마을사람 하나둘 뜨고 그렇게 말리던 도로 포장 이제 두손 들고 말아

 

김용택 시인이 자신의 시에서 \'서럽도록 아름답다\'고 노래한 섬진강 앞에 서 있다. 그는 섬진강의 흘러가는 모습, 그 주변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었더니 시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섬진강댐에서 아래쪽으로 8㎞쯤 내려가면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이 나온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65)이 나고 자란 마을이다. 지난 2008년 퇴임을 하기 전까지 그가 아이들을 가르쳤던 덕치초등학교에서도 2㎞를 더 내려가야 한다.

진메마을 앞에는 맑은 섬진강이 찰랑대며 흐른다. 시인이 '서럽도록 아름답다'고 노래한 강이다. 시인은 어린 시절에 그 강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고 각시붕어를 잡으며 놀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그 길을 따라 40년 가깝게 직장인 학교로 출퇴근을 했다.

진메마을 입구엔 두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느티나무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입에 시인이 태어나 살던 집이 나온다. 아담한 기와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60여 년을 살다가 퇴임을 한 뒤 전주로 거처를 옮겼다.

'김용택'이란 낡은 문패가 달린 그의 집은 대문이 없다. 겨울이어서 마당에 깔린 잔디는 누렇게 색이 변했다. 김용택 시인이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반갑게 맞아준다. 전화를 했더니 바쁜 일도 밀치고 전주에서 달려온 시인이 고맙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방문이지만 20년도 더 된 일이라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 마을은 한때 35호에 달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도회로 떠나고 지금은 11호만 남았다. 그것도 대부분이 70이 넘은 노인들이다. 이곳에 거주하던 시인의 어머니(86세)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한다. 한동안 비워 두었더니 보일러가 얼어 터지고 마당에 물이 고이는 등 집이 엉망이 됐다고 안타까워한다. 사람들이 떠나도 섬진강은 변함없이 흐른다.



섬진강 물결 바라보는 '관란헌'

시인과 함께 서재인 '觀瀾軒(관란헌)' 툇마루에 앉았다. 서재에는 '사상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 빛바랜 잡지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300m 남짓 떨어졌을까. 눈앞에는 섬진강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온 뒤끝이라 불어난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60평생을 이 방에서 살았는데 섬진강 물소리가 밤에는 고요하게 잦아들었다가 아침이면 깨어나요. 그 물소리가 나에게 날마다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고나 할까…."

'관란헌'은 '섬진강 물결을 바라보는 집'이란 뜻이다. 퇴계 이황의 당호에서 빌려온 말이다.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면 '관란헌'이란 마루가 있다. 평소에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잠시 쉴 때 거기 앉아서 낙동강 물을 바라보라고 지었다고 한다. 퇴계는 평소에 이 말을 좋아해 '관란헌'이란 시도 지었다. '관란'이란 말을 원래 논어에 나온다. 흘러가는 물을 보고 공자는 '흘러간다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구나.'라고 말한다. 낙동강 가에 공부방을 짓고 살던 퇴계는 '물이 중간에 끊어지지 않듯 공부 또한 이러해야 한다.'고 공자의 말에 공감한다. 여기서 '관수(觀水)'가 아니라 '관란(觀瀾)'이라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 단순히 물을 바라만 보지 않고 굽이치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물결(瀾)을 보며 그 이치까지 살핀다는 뜻이다.

퇴계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으로 생육신의 한 명인 원호(元昊)의 호도 '관란'이다. 그는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를 탈취하자 고향 원주로 숨어들었다. 단종이 영월로 유폐된 뒤에는 '관란'이라는 이름의 초가를 짓고 들어가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물결을 바라보면서 여생을 마쳤다. 이렇듯 공자-원호-퇴계 등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물결을 시와 정신에 오롯이 반영하기 위해 시인은 편액을 볼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고 한다.

"편액은 섬진강 물결을 보면서 좋은 시를 쓰라고 친구들이 선물한 것이지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전주의 한옥마을에 사는 서각 장인이 새긴 것이고. 저 글의 뜻에 맞는 정신을 갖고 시를 쓰고 있는지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인기와 문학적 성취 함께 이뤄

시인은 마을 곳곳을 안내하며 살아온 얘기도 들려준다. 마을 앞 느티나무 두 그루 중 키가 작은 것은 40여 년 전 시인이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군청에서 최근에 세운 듯한 '진메마을 김용택 시인 생가 이야기'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시인도 처음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순창농고를 다녔다. 자취를 하면서 토요일 오후에 집에 올 때는 섬진강을 따라 40리 길을 걸어온 적도 있다고 한다. 농고를 졸업하고 놀던 그에게 교사 시험을 보러 가자고 친구가 부추겼다.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 사범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양성소를 거쳐 초등학교 교사에 임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시험에 붙어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정작 부추긴 친구는 시험에 떨어졌다.

그의 첫 부임지는 청운초등학교 옥석분교(지금은 폐교)라는 곳이었다. 그는 책을 사 달라고 조르던 월부 책 장사의 성화에 못 이겨 많은 책을 샀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헤르만 헤세 전집, 이어령 전집, 박목월 전집, 괴테 전집, 니체 전집 등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그것이 오늘날 시인 김용택이 탄생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1982년 창비사의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연작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한다. 계간 문예지 '창작과 비평'을 내던 창비사에서는 1980년 신군부가 잡지를 폐간시키자 무크지(부정기 간행물) 형태로 매년 신작 시집을 냈다. 그때 자신의 시가 실린 시집과 원고료 2만 원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시인은 1985년 첫 시집 '섬진강'(창작과 비평사)을 발간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13권의 시집을 냈다. 산문집까지 합하면 저서가 30여 권에 이른다. 김수영문학상ㆍ소월시문학상ㆍ백석문학상 등 내로라하는 문학상도 휩쓸었다. 유명인사가 된 후에는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해 모두 소화하지 못할 정도다. 미국과 홍콩 등지에서도 교민들이 강연을 요청해 다녀왔다. 몇 년 전에는 영화배우로도 데뷔(?)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연 배우 윤정희가 수강하는 시 창작반의 강사로 나온다.

김용택 시인과 섬진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섬진강 문학을 논할 때는 그를 맨 앞에 세워야 한다. 그는 80년대 이후 등단한 시인 중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시인 중 한 명이다. 평단에서도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해 김소월과 백석을 잇는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중적 인기와 문학적 성취를 함께 이룬 우리나라에서도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섬진강이 오늘날 전국에 널리 알려지고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것도 그의 힘의 크다. 그래서일까. 진메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이 그를 닮았고 시인의 모습 또한 섬진강을 닮았다.



"섬진강과 어머니가 내 시의 원천"

섬진강변을 함께 거닐며 시인의 얘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를 시인으로 키운 것은 섬진강과 어머니라고 했다. 그의 시에는 현란한 기교도 심오한 사상도 없다. 그냥 섬진강의 흘러가는 모습, 그 주변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었더니 시가 탄생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그대로 시였다. 어머니가 평소에 들려준 이야기를 옮겼더니 시가 됐다고 한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좋은 시란 기교가 뛰어난 시가 아니라 우리 생활 속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낸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어린 시절 저 바위에서는 우리가 여름에 다이빙을 하고 놀았어요. 그 옆 바위에는 자라가 까맣게 올라와 우리가 자라바위라고 이름을 붙였고요. 겨울에 눈이 쌓이면 노루가 강변에 내려오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 시인이 건너던 징검다리는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자운영꽃을 비롯한 들꽃이 즐비하던 강변에는 잡초만 자라고 있다. 강변도로를 포장하고 벤치를 놓는 것을 반대했던 그는 이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마을은 폐촌 직전에 몰렸다. 그의 시의 원천이었던 어머니도 병환이 심하다. 그는 변해가는 섬진강과 고향의 모습이 안타깝고 아쉬운 듯 거푸 한숨을 쉰다.

시인은 반가운 소식도 들려준다. 생가 뒤편 공터에는 올해 안에 '김용택의 작은 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농식품부 지원 사업이다. 작은 학교가 들어서면 그는 주로 현지에 거주하면서 방문객들과 함께 시를 읽고 토론도 하면서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자신의 거처는 조그맣게 주변에 따로 짓고 현재의 집은 방문객들의 거처로 사용할 계획이다. 그 때는 보다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올 봄에 오랜만에 신작 시집(제목 미정)도 발간할 예정이다. 그 속에는 섬진강 연작시도 몇 편 들어 있다. 최근 10여 년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그 곱던 강이 빠르게 변해가는 모습이 감당이 되지 않아 시를 쓰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되도록 많은 시간 진메마을에 머물면서 시작에도 더욱 매진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시인의 등 뒤로 보이는 얼음이 풀린 섬진강 '물결'이 곱다. 하동포구에서는 지금쯤 봄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