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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독일 간20대 간호조무사, 일과 학교 수업 시간 겹치자 밤에 근무할 때… (조선일보 2013.02.12 08:08)

독일 간20대 간호조무사, 일과 학교 수업 시간 겹치자 밤에 근무할 때…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11] 15년 獨간호조무사로 근무, 가난했던 6남매 장녀 강정희 마취과 박사

막노동 부친, 방물장수 모친
"가족 가난서 구하겠다" 자원, 심야·주말 일하며 모두 송금
의대 가서도 조무사 일 계속… 동생들 "언니 덕에 이만큼"

 

"독일에서 일하며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부치는 생활이 전혀 고되지 않았어요. 가난한 부모님을 돕고 똑똑한 동생들을 공부시킬 수 있다는 게 마냥 기뻤지요."

파독 간호보조원(지금의 간호조무사)으로 독일에 갔다가 의사가 돼 활동했던 강정희(66·마취과) 박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슈바이처 박사처럼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을 가난을 핑계로 포기하지 않았고 하늘이 그런 의지를 도왔다"고 했다. 지난 3일 서울 서초동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피곤해 보였다.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독일에서 급히 귀국해 전날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6남매의 장녀인 강씨는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다섯 동생이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렸으니 동생들에겐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파독 간호조무사 출신 마취과 의사 강정희 박사는 “간호조무사 겸 의대생으로 지낸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가족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뻤다”고 말했다. 뒤에 보이는 모니터는 독일에서 마취과 의사로 근무하던 모습. /이덕훈 기자
6·25 전쟁 이후 모두가 살기 어려운 시절, 강씨 가족에게도 가난은 숙명이었다. 충남 지역 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전쟁 이후 막노동에 나섰다. 살림만 하던 어머니는 바늘·실·비누를 파는 방물장수가 됐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맏딸 강씨에게 고등학교 진학은 사치였다. 보건소 직원으로 홍산면 사무소에서 결핵환자 관리원으로 일했다. 그때 파독 간호보조원 모집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강씨는 '가족을 가난에서 구해내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강씨는 23세 때인 1970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갔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시립 산부인과·소아과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 다른 병원에서 야근과 주말 근무를 자청했고 휴가도 없이 일했다. 힘겹게 번 돈은 가족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보냈다. 강씨는 이렇게 번 돈으로 동생 넷에게 대학 공부를 시켰다. 그 동생들은 각각 대기업 간부, 중학교 교사, 의사로 일하고 있다.

강씨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어린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 의대 진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 진학을 위해 필요한 '아비투어(독일 대학 입학 자격)'를 위해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4년제 야간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야간학교 수업시간과 병원의 밤 근무시간이 하루 2시간쯤 겹쳤다. 그가 학교 수업에 제때 가지 못해 애를 태운다는 걸 알게 된 동료 간호사들은 품앗이를 해 강씨를 도왔다. 그는 "야간 수업을 마친 후엔 차비를 아끼려고 병원까지 30분을 뛰었다. 땀에 젖은 채 가운을 갈아입고 밤 10시부터 근무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뒤스부르크 시립병원과 당초 계약한 3년 근무를 마친 후 계약 기간을 4년 더 연장했다. 독일서 간호조무사 생활을 시작한 지 7년 만인 1977년, 그는 드디어 의대 입학에 필요한 야간학교를 마쳤다. 강씨는 "한국인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 계약 기간을 마칠 때쯤이면 병원 측에선 '어떻게 연장 계약을 맺을까' 고심하는 눈치였다"고 했다. 한국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좋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계약 연장에 동의하면 병원 식구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1978년 헤센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독일 입학생보다 열 살이 많은 만학도였다. 그래도 간호조무사 생활은 그만두지 않았다. 의대에 다니던 7년 동안에도 방학과 주말에는 간호조무사 생활을 병행해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꼬박꼬박 고향집에 부쳤다. 부모님은 딸이 부친 돈으로 고향에 땅을 사 농사를 지었다.

강씨는 의대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독일 여러 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다 지난해 라인란트팔츠주 병원에서 은퇴했다. 의대에서 지금의 독일인 연하 남편을 만나 슬하에 아들 한 명을 뒀다.

강씨는 "어머니 장례식 때 동생이 '언니가 없었으면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없었다'고 말하더라"면서, "어머니를 떠나보내 마음이 허전하지만 동생의 그 말에 위로를 받았고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獨간호사 임금, 이젠 한국과 비슷… 獨서 파견요청 와도 신청자 없어

 (조선일보 2013.02.12 03:02)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한국간호사 아직도 높은평가
獨紙, 中 간병간호사와 비교 "유능·친절하고 인류애 보여"

 

"저희 파독 간호사들은 이곳에서 '나이팅게일'이라 불렸잖아요. 독일인들이 중국 간호사들에 대해 갖는 편견을 없애주고 싶었어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 최대 일간지 베스트도이치알게마이너차이퉁(이하 WAZ)에 '중국 노인 간병 간호사들이 유능한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지난달 15일 실렸다. 중국인 노인 간병 간호사 150명이 일대 병원에서 근무하기로 한 것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윤행자 한독간호협회장이 지난달 독일 보훔에서 베스트도이치알게마이너차이퉁에 실린 한국인 파독 간호사 관련 기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모듬 특파원

WAZ는 이 기사에서 "1960년대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은 당시 의료진뿐 아니라 환자들로부터 '친절하고 유능하다' '병원에 인류애를 가져왔다'며 찬사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복합 질환을 앓는 노인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한국인 간호 인력에 비해 교육 수준이 낮고 독일어에 서툰 중국인 간호사는 부적합하다고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윤행자(70) 한독간호협회장은 "기사를 읽고 WAZ에 전화를 걸어 '한국인 간호사로서 경험에 비춰 생각했을 때 중국인 간호사도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전화를 건 직후 기자가 찾아와 그를 인터뷰했다.

며칠 후 WAZ 지면에는 '한국인 간호사들, 중국인 노인 간병 간호사를 응원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WAZ는 한국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의 입을 빌려 "유교 문화 속에서 자란 한국인들이 노인 환자를 부모님처럼 돌봤고 일주일에 한 번 독어를 배웠을 뿐인데도 금세 환자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며 "중국인 간호사들도 한국인 간호사들처럼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한독간호협회 측은 "아직도 독일 내에선 한국 간호사에 대한 평가가 좋아 '한국에서 간호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밝했다. 지난해 9월에도 독일연방고용청은 한국산업인력공단 측에 '한국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를 더 보내달라'고 청했다. 또 간병인력업체에서도 꾸준히 간호협회 등에 한국인 간호사 파견 여부를 문의하고 있다고 한다. 윤 회장은 "현재 한국 간호사 임금이 독일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와 파견이 성사되지 않았다"며 "독일에 간호사로 나왔던 40여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조국이 크게 발전했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