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 경(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KG, OM, CH, 1874년 11월 30일~1965년 1월 24일)은 영국의 총리(1940~45, 1951~55)를 지낸 정치가이다.
생애
가계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 중 한 명이다. 그의 가문은 유명한 정치가들을 배출하여, 그의 할아버지는 처칠이 어렸을 때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하였다. 처칠에게는 7대 선조인 선덜랜드 백작 3세 찰스 스펜서 전 영국 총리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8대 선조이기도 하다. 즉,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처칠은 같은 뿌리를 가진 친척이다.[1]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은 재무상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여성이었다. 그러나 비타협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적들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뒤 회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일찍 사망한다. 당시 처칠은 사관학교에서 장교후보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처칠은 아버지의 정치적인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적들에게 타협과 유머와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편집] 사관학교 시절과 보어 전쟁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는 해로우 스쿨에서의 학과공부에 흥미가 없었으나,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문학과 역사에 소질이 있었다. 결국 친척동생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뛰어놀다가 다쳐서 1년간 치료받은 일을 계기로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고등학교로 옮긴 그는 학과공부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3수 끝에 샌드허스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돌아다니다가 영국사람의 도움으로 숨어지낼 수 있었다. 처칠은 수단과 인디아 말란칸트에서 주민들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항하여 일으킨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편집] 제1차 세계대전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고 있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기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시키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현재 터키 공화국)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작전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영관급 장교로 참전하였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을 목욕하게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으며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라고 설득하여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켰다.[2]
[편집] 제2차 세계대전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가, 다시 보수당에 입당하였다. 때문에 당시 보수당계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후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다.
처칠은 한때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것을 염려해 과거 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정계에서 무시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진짜 영국을 공격하여 처칠의 견해가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영국정부는 그를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이 후 네빌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조지 6세의 승인으로 처칠이 총리에 임명됐다. 이 후 처칠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처칠 시대에 지은 벙커는 현재도 영국 지하에 남아있다.
[편집] 종전 과정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칠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혐오스러운 체제를 이끄는 "악마"같은 폭군이라고 보았다.[3]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영국은 폴란드가 독립 국가로서 복원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4] 영국은 이 문제가 연합국간에 마찰의 소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문제를 꺼내길 우려하였다.[4]
[편집] 은퇴 후
1946년 3월 5일, 미국 남부 미주리 주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처칠은 유럽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영어 사용 국민들 간의 형제애적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고 총리에 재임명되었다.
1953년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1955년에 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정식으로 은퇴하였다. 1964년 미국 의회는 처칠에게 미국 명예시민권을 수여하였다.
[편집] 서훈
- 1922년 명예의 기사단 훈장(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 수훈
- 1946년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 OM) 수훈
- 1953년 가터 훈장(The Order of the Garter, KG) 수훈
[편집] 주석
- ↑ Tree: Charles SPENCER,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 ↑ 계몽사 위인전기《처칠》/계몽사
- ↑ Miscamble, Wilson D.. 《From Roosevelt to Truman: Potsdam, Hiroshima, and the Co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86244-2
- ↑ 가 나 Wettig, Gerhard (2008). 《Stalin and the Cold War in Europe》. Rowman & Littlefield. ISBN 0-7425-5542-9,
처칠은 어떤 인물인가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게, 런던."
윈스턴 처칠이 생일에 받은 카드의 주소란에 적힌 말이다.
이 문구만 적혀 있어도 그에게 우편물이 배달되었을 정도로 영국인들의 그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2002년, BBC 방송국이 백만 명의 영국인을 조사한 결과 '위대한 영국인' 1위에 28.1%의 지지를 얻으며 처칠이 선정되었다. 그의 서거 약 35년이 지난 시점에서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 속에 그는 향수어린 존재로 남아있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국가의 수장이였고, 정치적으로 뛰어난 웅변가이며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 한명의 영국인이었다.
■ 윈스턴 처칠의 재치와 인간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총리이며 영국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학창시절 남보다 습득 속도가 느렸던 그는 대학이 아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군인에서 정치가로 변신했다.
그에게는 추진력과 리더십 이외에도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유대감을 형성시키는 유머 감각과 여유가 있었다.
처칠이 미국과 소련을 설득해 대서양 헌장을 채택했을 때의 이야기다.
영국을 방문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만 옷을 갈아입고 있던 처칠의 알몸을 보게 됐다.
당황하는 루즈벨트에게 처칠은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대통령 각하. 저는 각하께 숨기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는 반전되고, 자신의 위신을 세우지 않고 재치를 발휘한 그의 외교는 성공한다. 이후 대서양 헌장이 채택되고 처칠은 폐허가 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경직되고 체면 차리기에 급급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국민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대선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그가 남긴 말들은 의미가 있다.
* 모국을 사랑하는 자는 인류를 미워할 수 없다.
* 우리는 '정부가 국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이 정부를 소유하는 나라'라면 어느 나라도 환영한다.
* 좋은 정치가란 미래를 예언할 줄 알며 또한 나중에 일이 예언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잘 설명해낼 줄 아는 사람이다.
■ 윈스턴 처칠이 사랑한 영국의 국민 브랜드 <버버리>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보면 그가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를 입고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버버리와 윈스턴 처칠의 공통점은 시대를 막론하고 영국인들이 사랑한 두 가지라는 것이다.
"영국이 낳은 것은 의회 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 코트"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버버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다.
실제로 버버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장교들에게 50만벌의 개버딘 코트를 만들어 입혔다. 당시 전쟁사령부의 요청에 의해 개발된 이 코트가 요즘도 전세계 사람들이 즐겨입는 트렌치 코트(Trench Coat), 일명 '버버리 코트'의 효시가 된 것.
지난 2월, 영국 웨일스에 있는 버버리의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각계 각층에서 벌어졌다. 영국 노동당 소속 의원들은 "버버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쓴 대형 발렌타인 카드를 버버리 본사에 보내는가 하면, 찰스 왕세자까지 공장 해외 이전에 유감을 표했다. 버버리를 향한 영국인들의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2001년 구찌와 도나 카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영입한 버버리는 '프로섬(Prorsum·라틴어로 ‘전진’이란 뜻)'이라는 라인을 신설하며 정통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올 시즌 버버리는 핸드백, 신발, 아이웨어 같은 액세서리 라인을 강화했다. 특히 버버리 체크가 절제된 모던하며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인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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