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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3~4년 안에 상고 출신 임원 씨가 마를 것"...저무는 商高시대 (조선일보 2013.08.01 08:55)

3~4년 안에 상고 출신 임원 씨가 마를 것"...저무는 商高시대

 

KB금융지주의 A 부사장은 지난 19일 금융감독원 국장 2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8일 발표된 KB금융 임원 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선임된데 대한 축하인사였다. 금감원 국장급 인사가 금융지주 부사장에게 전화하는 일은 드물다. 감독기관 고위 인사가 피감기관 임원과 통화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행 포함 계열사의 임원 인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A 부사장은 “앞으로 있을 임원급 인사에서 자기 고교 후배를 배려해달라는 전화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두 국장은 금감원 내 대표적인 상고 출신이다. 23일 저녁 국민은행 임원 인사가 발표됐다. 은행 임원급 인사에서 부행장 7명 중 2명이 상고 출신이었지만, 두 국장의 고교 후배는 부행장에 오르지 못했다.

왼쪽부터 이택하 한맥투자증권 회장, 김광진 전 현대스위스저축은행 회장, 권점주 신한생명 상임이사 부회장
상고 출신 임원들이 잇따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다.
왼쪽부터 이택하 한맥투자증권 회장, 김광진 전 현대스위스저축은행 회장, 권점주 신한생명 상임이사 부회장 상고 출신 임원들이 잇따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다.

◆ “앞으로 3~4년 금융권에서 상고 출신 임원은 씨가 마를 것”

금융권 내 상고 인맥은 아직 살아있다. 임원 인사때마다 ‘밀어주고 끌어주며’ 학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금융권 내 ‘상고 파워’는 하루가 다르게 쇠퇴하고 있다. 지난 19일 국민은행장 인선 경쟁에서 인문계 고교(고려고) 출신 이건호 행장은 ‘광주상고가 낳은 수재’ 윤종규 전 KB금융 부사장을 제쳤다. 지난해에는 4대 금융지주의 상고 출신 최고경영자(CEO)가 대거 물갈이 됐다. 광주상고 출신 한 금융기관 임원은 “3~4년 지나면 금융권에서 상고 출신 임원은 씨가 마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리·국민·신한·하나·외환·기업 등 6개 시중은행의 은행장과 감사를 제외한 상근임원은 총 76명이다. 이 중 상고 출신은 13명. 신한은행이 6명으로 가장 많다. 기업은행과 국민은행이 각각 2명이다. 외환, 하나, 우리은행은 각 1명이다. 광주상고 출신이 3명으로 가장 많고 군산상고, 덕수상고, 선린상고 출신이 각각 2명이다. 대전상고, 동대문상고, 강경상고, 부산상고 출신이 각 1명이다.

금융지주, 자산운용, 캐피탈, 저축은행을 통털어도 상고 출신 임원은 6명에 불과하다. 이영준 하나캐피탈 사장과 김인환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이 덕수상고를 나왔다. 이희권 KB자산운용 사장과 이정호 KB저축은행 사장은 광주상고를 졸업했다. 박인병 KB부동산신탁 사장은 부산상고, 이성락 신한생명 사장은 청구상고 출신이다.

상고 인맥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으나 과거에 비해 기세가 현저하게 약해졌다. 2006년 당시 신한금융그룹의 임원 절반 이상이 상고출신이었다. 지금은 ‘신한’의 1등 신화를 이끌던 상고 출신 임원 대다수는 퇴직하거나 한직으로 물러났다. 나머지 시중은행에서 상고 출신 임원은 1~2명에 불과하다. 상고 인맥이 근근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도 상고 출신 인재들이 잇따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다. 이택하 한맥투자증권 전 사장(동대문상고)이 올해 초 대표이사에서 퇴임했다. 김광진 현대스위스저축은행 회장(덕수상고)은 작년 말 불법대출에 연루돼 금융당국의 해임 권고를 받고 올 초 퇴임했다. 손효성 금융연수원 부행장(덕수상고)은 지난 3월 임기 만료됐다. 윤종규 KB금융 부사장(광주상고)은 최근 은행장 인선에서 낙마했다. 권점주 신한생명 사장(광주상고)은 지난 6월 신한생명 상임이사 부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3~4년 안에 상고 출신 임원 씨가 마를 것"...저무는 商高시대

◆ 상고의 쇠퇴 예견된 일…지방은행서만 명맥 유지

상고의 쇠퇴는 일찌감치 예견됐다. 1980년대 초부터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는 인재가 크게 줄었다. 교육당국은 1990년대 중반 대입정원 자율화 조치를 단행했다. 인재가 대학 진학에 유리한 인문계 고교로 몰렸다.

한국은행은 1988년 초급(고졸) 채용을 중단했다. 시중은행 상당수도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고졸 학력자를 채용하지 않았다. 상고 출신 은행 임원은 “은행 내에서 10년 이상 후배를 찾기 어렵다. 그나마 남아 있는 후배를 규합해도 수가 많지 않아 세력을 만들기 힘들다”고 말했다.

금감원 인사도 마찬가지다. 금감원이 작년 5월 실시한 국·실장급 승진인사에서 상고 출신은 김영기 상호여전감독국장 한 명 뿐이었다. 금감원 부원장보 이상 임원 11명 중 상고 출신은 박세춘 은행·중소서민검사 부원장보(중앙상고)가 유일하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감원 국장 승진 인사에서 초급 출신이 단 한 명에 불과한 것만 봐도 상고 출신의 명맥이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다른 상고 출신 은행 임원은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상고 출신이라도 지점장까지는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꿈도 못꾼다”며 “명문대 출신 간에 경쟁이 치열해 고졸 학력자들의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행이 1980년대 초급 직원(고졸)을 선발할 때 전국에서 몰려든 인재 수백명 중 70여명만 뽑혔으니 수재 중 수재였다”고 회상했다.

그나마 지방은행에는 아직 상고 파워가 살아있지만 최근 분위기가 바뀌는 추세다. 지방은행은 지역 유지, 언론, 정치인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어 온 지역 상고출신이 인사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송기진 광주은행장(벌교상고), 이장호 전 BS금융지주 회장(부산상고), 하춘수 DGB금융지주 회장(김천 성의상고)이 지역 상고 출신으로 초고위직까지 오른 대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