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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나의길 나의꿈 - ② 나의 가계 (대전일보 2006-09-12 11:33)

나의길 나의꿈 - ② 나의 가계

 

나는 광산 김씨 38세손으로 1928년 7월 9일 아버님 죽헌(竹軒) 영철공(永喆公)과 어머님 전의 이씨의 3남 4녀 중 막내로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광산 김씨는 조선시대 다섯 분의 정승과 여덟 분의 대제학, 그리고 조선 예학의 종주인 사계 김장생, 서포 김만중 등 명신(名臣)과 석학을 많이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조상에 대한 숭앙심과 자부심이 늘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 집안이 양촌에 정착한 것은 10대조 때였으며 약 350년을 대물림하며 살아왔다. 동·서·북 3면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은 들녘을 향해 트였으며 그곳을 가로질러 황산벌의 젖줄 인내(仁川)가 흐르고 있다. 세월이 변해도 산천은 유구하여 고향에 발을 디디면 언제나 포근하다. 더구나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가는 지금도 학자들이 조선시대 주거 양식을 연구한다며 자주 찾는다. 안채는 동쪽에 위치하여 내실과 대청·중간 방·대청 안방·윗방 순서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에는 3칸짜리 방 세 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대청에는 사당까지 모신 규모가 제법 큰 집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가옥이다. 당시 가세는 넉넉한 편으로, 우리집 가을걷이는 6~7일간 탈곡기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질 정도로 면내에서 손꼽히는 부농이었다. 이같이 나는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부모님의 사랑 속에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일제 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대적 고통 속에 성장했지만, 나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혜택을 입은 셈이다. 그래서 내가 누린 혜택들을 세상에 되돌려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마음으로 학교와 병원을 이끌어왔다.

아버님은 부농인 데도 사시사철 늘 근면하셨다. 농사일뿐만 아니라 농한기에는 왕골 공예품이나 가마니도 짰으며, 당시 농촌에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축산에 손을 댔고 고무신 장사도 하셨다. 태평양 전쟁시 고무신 구하기도 어려운 때에 내가 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선친 덕분이었다. 사업을 하셨으면 크게 기업을 일구셨을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님은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뜻한 일은 끝내 관철시키는 분이셨다. 동네 사람들의 게으름과 탈선도 그냥 지나치지 않아, 투전판이 벌어지거나 하면 호통 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아버님의 외모는 물론 추진력, 결단력, 판단력과 근검절약하는 성품까지 그대로 이어받았다.

어머님도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큰살림을 꾸려내셨다. 꼭두새벽부터 가족과 10여 명 일꾼들의 식사 준비며 잡다한 집안일들, 나와 함께 자라던 두 누님 뒷바라지까지 밤늦도록 앉아 계실 틈이 없었다. 그리고 당신의 밥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곤 하셨는데, 의아해 하는 나에게 “나야 한 끼만 굶는 거지만 저 사람은 몇 끼를 굶었단다.” 하시던 자비롭고 후덕한 분이셨다.

그렇지만 남에게는 관대해도 당신에게는 철저하시어 아무리 피곤해도 내일 일까지 오늘 챙겨놓으셨고, 우리 3형제의 교육을 위해서는 남다른 열정과 노력을 기울이셨다. 이러한 어머님의 투철한 교육관은 내가 육영사업의 길로 들어서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병원 운영이나 대학 관리에 철저를 기하는 것도 당신의 부지런함을 본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내 위로는 형님 세 분과 누님 네 분이 계셨다. 맏형인 승수 형님은 나와 18년의 나이 차이로 부모님과 다름없었다. 형님은 일제시대 때 공주 이인면 공의(公醫)로 부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를 공주로 전학시켰으며, 대학 졸업 때까지 수업료와 잡비를 모두 도와주셨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뒤 이인에서 논산으로 옮겨 ‘동인의원’을 개업했는데 6.25전쟁으로 파손돼 많은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익산군 금마면에 ‘금마의원’을 열었다가 9.18 수복 후 서울 개봉동에 ‘만수의원’을 개원, 은퇴하실 때까지 진료했다. 건양학원 이사로 재직 중, 83세로 타계하시어 건양학원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했다. 형님은 독학으로 의학공부를 한 입지전적 인물로서 우리 가문을 일으켰고 내가 의대에 진학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신 분이다.

둘째 명수 형님은 예산농업학교 졸업 후 농협 전신인 금융조합에 취직하여 논산 근교 노성에서 근무했다. 일제하 각 시도에는 중학교가 몇 개밖에 없었으며 졸업하고 취직시험에 합격하면 집안의 경사였다. 당시 큰형님도 국가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우리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다. 둘째형님은 8·15광복 후 서울 미군정 후생부에서 근무하셨는데, 의대에 다니는 동안 용산 형님댁에서 통학했다. 형님은 1남 3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나 6·25 전쟁 때 장녀 용순만 남겨 놓고 전 가족이 폭격을 맞는 참사를 당했다. 용순은 부모님과 나의 보살핌으로 대전여고와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LA에 살고 있다. 둘째 형님댁의 비극은 우리 집안의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네 분의 누님도 모두 타계하시어, 이제 4남 4녀 중 나만 생존해 있어 무상한 세월을 반추하게 된다.

부모님이 사셨던 집은 원래 양촌면 도정리에 있던 집을 이전한 것이다. 아버님은 후손 중 고향에 와서 살 사람을 위해 영승재(永承齋)라는 현판을 거셨는데, 지금은 종중 재실로 쓰이며 4대 봉사(奉祀)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1년이면 10여 차례 부모님이 사시던 양촌에 들러 재실 사랑채에서 잔다. 유년기를 보낸 고향이어서 옛 추억도 있으려니와 집 뒤에 부모님과 형님 산소가 있어 아침 일찍 참배를 드리며 명복을 빌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