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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국제분야

빈 라덴 은신처서 테러 계획서 발견 (조선일보 2011.05.07 04:24)

'계곡 건너는 美기차 추락시켜라'…

빈 라덴 은신처서 테러 계획서 발견

거사일, 9·11 10주년 기념일… 2010년 2월에 작성된 것
컴퓨터 5대도 확보해 분석 "빈 라덴, 실질적 리더였다"

'미국 내 어디든 계곡을 가로지르는 기차가 대상. 선로를 훼손하거나 장애물을 설치해 객차

가 탈선, 통째로 추락하면 극적인 대량 살상이 가능하다. 단 최신식 열차는 제동장치가 좋고 완전히 탈선시키기 어려우니 참고. 2011년 9·11 테러 10주년 기념일이나 7월 4일 독립기념일, 크리스마스, 대통령 연두교서 발표일 등 미국인에게 상징적인 날을 택할 것. 이 방법은 두 번 다시 써먹을 수 없으므로 한 번에 성공해야 함.'

미국 특수부대가
파키스탄에 숨어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후 은신처에서 확보한 알카에다 관련 자료에서 2010년 2월 작성된 열차테러 모의 계획서가 나왔다고 5일 AP통신과 CNN 등이 보도했다. 공책에 손으로 쓴 것으로 누가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미국은 빈 라덴이 직접 사용하던 컴퓨터 5대와 하드 드라이브 10개, 저장장치 100여개와 수천 장의 서류 등을 빼내와 아프가니스탄 미군기지에서 분석 중이다. 이 열차테러 계획은 그중 가장 먼저 번역·분석된 것이다.

미 국토안보부의 매트 챈들러 대변인은 "이 계획서는 추상적인 아이디어 메모 수준으로, 장소나 시기가 특정되지 않았으며 모의가 더 구체적으로 진행됐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 정부는 교통안전청과 열차협회는 물론 주요 공항 등에 공문을 보내 안전 점검과 보안 강화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6년간 축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자료들에 의하면 알카에다는 9·11 테러에 필적할 대형 테러를 저지르기 위해 희망목록을 만들었다. 테러 대상 장소로는
워싱턴·뉴욕·로스앤젤레스·시카고 등 대도시가, 날짜로는 독립기념일과 크리스마스 등 인구 이동이 많은 축일·연휴가 주로 거론됐다고 한다. 실제 2009년 9월 알카에다는 뉴욕 지하철 테러를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이 자료에서 알카에다 주요 지도자의 이름과 소재도 속속 드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정보 당국의 보고를 받은 마이크 로저스 하원 정보위원장은 "알카에다의 이인자(아이만 알자와히리)에 대해 많은 정보를 확보했으며, 우리는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고 말했다. 압수물 중에선 빈 라덴의 육성·영상 메시지를 녹음·녹화하기 위한 장비와 휴대전화 5대 등도 추가 확인됐다.

알카에다의 핵심업무와 직결된 방대한 자료와 도구가 빈 라덴의 주변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그의 입지와 역할을 재조명하는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최근 수년간 빈 라덴은 오지에서 피신생활을 하느라 조직 운영에서 손을 떼고 알카에다의 '얼굴' 역할만 하는 것으로 추측돼왔으나, 접근성이 좋은 도시에서 생활하며 직접 테러계획을 짜고 지시해왔다는 것은 그가 알카에다의 실질적인 리더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빈 라덴 이후] CIA, 빈 라덴 은신처 인근 집 빌려 8개월간 감시

(조선일보 2011.05.07 04:24)

위성레이더로 탈출로 찾고 고성능 도청기로 전화 염탐, 초정밀 망원카메라로 '산책하는 키 큰 남자' 포착

"미 중앙정보국(CIA) 특수감시팀은 오사마 빈 라덴 은신처 옆에 집을 임차해 수개월간 상주하며 정밀감시 작업을 벌였다. 감시위성·적외선기구·고성능 도청장치 등 모든 첨단 장비를 동원해 24시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미 언론들은 6일 정보당국자들을 인용해 'CIA 역사상 가장 섬세한 인적정보 수집작업'이 어떻게 수행됐는지를 전했다.

빈 라덴 은신처 잘 보이는 집 임차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에 따르면 CIA는 지난 8월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수상한 가옥'을 처음 발견한 뒤 소규모 정예 감시팀을 현장에 파견했다. 이들은 빈 라덴 은신처로 의심되는 이 가옥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집을 임차했다. 군사도시인 아보타바드에선 주민들의 전·출입이 잦고 이에 따라 외지인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이 없기 때문에 CIA팀은 자연스럽게 이 동네에 스며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은신처 관련자들뿐 아니라 파키스탄 정보부나 경찰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이들은 이 안전가옥 창문을 반사유리로 교체해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한 뒤 은신처 감시에 들어갔다. 거주자 숫자·인상착의, 가옥 구조, 외부인의 출입 여부, 전기 소등시간…. 그 집과 관련한 모든 것이 정보수집 대상이었다.

마당에서 산책하던 키 큰 남자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망원 카메라로 모두 사진을 찍었고, 은신처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나 전화를 도청하기 위해 최고 성능 도청장비를 투입했다. 위성 레이더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비상 탈출 터널을 수색했다. 이 같이 물량을 아끼지 않은 작업 때문에 소요 비용은 수천만달러 이상으로 불어났다.

CIA 관계자는 "예상보다 비용이 늘어나 기존 예산을 재분배할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지난해 말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의회에 이를 승인받느라 고생을 좀 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CIA팀은 어느 날 은신처 마당에서 키 큰 남자가 산책을 하는 것을 감지했다. "빈 라덴일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하에 감시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이 남자는 이후에도 가끔 마당에 나왔고, CIA는 그를 '걷는 사람(The pacer)'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얼굴 사진을 찍거나 목소리를 녹음하는 데는 끝내 실패했다. 리언 파네타 CIA 국장이 "빈 라덴이 실제로 있을지 60~80%의 확신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감시팀, 사살작전 성공 후 철수

작전에 깊숙이 관여한 정보 관계자에 따르면 빈 라덴은 나름대로 몸을 숨기는 데 상당한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추적을 피하는 그의 기술은 인정해줘야 한다. 10년 전 빈 라덴을 추적할 때 그는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몇 대의 SUV 차량을 끌고 다녔는데, 신원노출 위험이 있다는 걸 알고 이를 모두 버렸다"고 했다.

비록 결정적인 물증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CIA 감시팀이 수개월간 축적한 정보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이번 빈 라덴 사살 작전이 이처럼 매끄럽게 진행될 수 없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감시팀은 지난 1일 네이비실 특수부대가 은신처에 투입된 뒤에도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작전이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수개월간 머물던 안가를 폐쇄하고 장비를 모두 챙긴 뒤 빠져나왔다.

[빈 라덴 이후] 빈 라덴을 얼어붙게 한 80번째 특수부대(79명의 인간과 1마리의 개로 이뤄진 팀) 요원

(조선일보 2011.05.07 03:01)

작전 참가한 軍犬 화제, 2330만원짜리 방탄조끼에 적외선 카메라 달고 활약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작전에 대테러 특수부대와 함께 투입된 '네 다리의 용사'가 화제다. 뉴욕타임스(NYT)는 5일 "미 정부가 아보타바드에 파견한 특수부대는 79명의 인간과 1마리의 개로 구성됐다. 다른 요원들과 함께 일생일대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 용맹스러운 개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미군 관계자에 따르면 이 개는 독일 셰퍼드나 벨기에 말리노이즈 종(種)일 가능성이 크다. 냄새를 잘 맡고 민첩하며 용맹하기로 이름난 견종들이다.

미 국방부 군견(軍犬) 센터 윌리엄 로버츠 소령은 "후각으로 폭발물을 탐지하는 군견은 급습 작전을 수행할 때 특히 유용하다. 개들은 문틈으로 새 나오는 냄새를 통해 방에 위장 폭탄이 설치돼 있는지도 감지해낸다"고 말했다.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몰래 도망가는 표적을 포착하는 것도 군견의 역할 중 하나다. 미 군견 훈련센터 관계자는 워싱턴포스트에 "개의 후각만큼 민감한 기계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개의 폭발물 감지 성공률은 95% 수준이지만 최첨단 기계의 능력은 50%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빈 라덴의 은신처에 투입된 개는 폭발물 감지뿐 아니라 작전 상황을 건물 밖으로 전달하는 역할까지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NYT는 이번 작전을 수행한 미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실이 지난해 카메라가 장착된 4개의 군견용 방탄조끼를 구입했다고 전했다. 1개 가격이 2만1500달러(약 2330만원)인 특수 방수·방탄조끼엔 적외선 감지 카메라가 달려 있어 1㎞ 거리까지도 영상 전송이 가능하다. 조끼의 색상은 중동 지역에서 위장에 용이한 모래색이며, 소형 스피커가 장착돼 멀리서도 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애완견을 많이 기르는 서방 국가와 달리 이슬람권에서 개를 불결한 동물로 여긴다는 점도 군견의 강점으로 꼽힌다. NYT는 "개와 친숙하지 않은 무슬림들은 개를 보는 순간 움찔하는 경우가 많다. 개가 심리적 압박 도구로도 유용하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에 투입된 군견은 현재 약 600마리 정도다.

지난해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미군 아프간 사령관은 "전투 현장에서 개는 인간이나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폭발물 탐지 등을 위한 더 많은 특수견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빈 라덴 女조카는 속옷 모델
(조선일보 2011.05.07 03:02)

친족 대부분 테러와 무관… 몇몇 아들은 함께 총 들어

지난 2일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된 오사마 빈 라덴의 조카 와파 두푸르는 몇 년 전 남성잡지 'GQ'에 속옷 모델로 등장해 이름을 날렸다. 빈 라덴 형 바크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잘나가는 건설업자로 승승장구 중이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6일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름 '빈 라덴'을 성(姓)으로 가진 빈 라덴의 친족 중 대부분은 오사마 빈 라덴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예멘 출신 건설업자로 사우디에서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빈 라덴의 아버지 모하메드 빈 라덴은 22번 결혼했고 슬하에 약 50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오사마는 이 중 17번째로 태어났다. 오사마의 친족 중 가장 많은 화제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배다른 형제인 예슬람의 딸 와파 두푸르다. 예슬람은 수십 년 전
스위스로 이주해 스위스 시민권을 갖고 있고 이란계 스위스 여성과 결혼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서구 문명을 접한 와파는 삼촌인 오사마가 9·11 테러를 저질렀을 때 뉴욕 컬럼비아대 로스쿨 학생이었다. 그는 몇년 전 남성잡지 GQ에 속옷 모델로 등장했고, 지금은 가수 겸 작사·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2006년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의 성 '두푸르'만 사용하고 있다.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사마 빈 라덴이 형제·자매들과 1971년 스웨덴 팔렌으로 휴가 갔을 때의 모습으로, 동그라미 안이 14세의 빈 라덴이다. 빈 라덴의 아들 함자가 14살 때인 2005년 파키스탄의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서 무장한 상태로 성전(聖戰)을 다짐하는 모습. 빈 라덴의 조카로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출신인 와파 두푸르는 속옷 모델이자 가수로 활동 중이다. /데일리 메일

건설 회사 '사우디 빈 라덴 그룹(SBG)'을 운영하던 빈 라덴의 아버지 모하메드는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현재 미국 마이애미에서 자란 빈 라덴의 형 바크르가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다.

빈 라덴의 아들 중 몇몇은 그의 이상(理想)을 이어가고 있다. 빈 라덴의 아들 칼리드는 빈 라덴이 숨어 있던 은신처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2005년엔 당시 14살이던 아들 함자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서 전투복 차림으로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러다 빈 라덴 박사되겠다. 무슨 여조카 신변까지 기사로 보도를 하냐? 그냥 빈 라덴 이 놈이 언제부터 테러와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어떻게 미국과 갈등이 붙었는지, 경과가 어땠는지, 빈라덴 죽었는데 앞으로 전망이 어떨는지, 그밖에 아랍계통 테러조직에는 뭐 있는지...이 정도면 됐지 웬 족보 만드는 것처럼 줄줄이 보도를 하냐?

"빈 라덴·자와히리, 6년 전부터 갈라서"

  • 연합뉴스 2011.05.06 23:55

최근 미군에 의해 사살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과 조직의 2인자 아이만 알 자와히리의 사이는 6년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파키스탄 정보국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6일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자와히리가 1988년 빈 라덴이 알카에다를 설립할 때부터 도움을 주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활동할 때도 함께 했지만 6년전부터는 빈 라덴을 소외시켰다고 말했다.

빈 라덴이 변방으로 밀려난 것은 더 이상 알케에다 활동을 지원할만한 자금이 없었던데다 조직 내의 인기도 예전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둘은 약 6년 전부터 제 갈 길을 갔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빈 라덴이 조직에서 소외됐다고 가정하면 그가 최근 알카에다의 테러활동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파키스탄 당국의 평가도 설명이 된다.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이 파키스탄 영내에서 빈 라덴의 은신처를 찾아내 사살한 뒤 관련정보 부재에 대해 질책하자 당혹스럽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은 다르다. 빈 라덴과 자와히리가 갈라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테러조직 관계자는 “두사람이 갈라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정보 보고서에서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정보 분야의 또다른 미국 정부 관계자는 빈 라덴이 자금문제로 곤경을 겪었다는 강력한 증거는 있었다고 말했다.

빈 라덴이 알카에다의 위대한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일상적인 작전에는 크게 역할을 하지 않는 반면 자와히리는 알카에다의 이념가이자 작전 사령관으로 오랜기간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빈 라덴의 개인적인 자산과 아랍국가 내 부자들과의 친분관계는 80년대 초기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이 활동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알카에다 지부가 납치 등으로 수백만달러씩 수입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불화가 사실이라면 빈 라덴이 파키스탄 아보타바드로 이주한 것도 설명이 된다.

빈 라덴이 은신했던 건물은 6년전 지어진 것으로 빈 라덴과 그 가족들은 약 5년전 이 건물로 이주했다고 파키스탄 관리들은 전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재소자 심문 기록에 따르면 자와히리도 지난 2005년 5월 거주지를 옮겼다.

두 사람 간의 긴장은 2005년 미군의 이라크 공격 이후 이라크 내에 알카에다 새 지부가 창설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알카에다가 이라크내 시아파 교도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면서 이전까지 알카에다가 얻은 지역민심이 허물어져 버렸고 이를 둘러싸고 빈 라덴과 자와히리 간에 전략상 갈등이 노정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