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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대흥선사와 왕소군 일화

대흥선사와 왕소군 일화

대흥선사는 섬서성 서안의 불교사원으로 이름이 높다. 수나라 수문제 때 건립되고 당나라 때까지 장안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한다. 당나라 시절에는 신라에서 많은 승려들이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러 장안으로 몰려들었고 천축국인 인도까지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스님이 혜초 스님이다.


◇혜초 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와 돌아가시기까지 50여년을 장안에 머물면서 많은 불경 번역 작업을 했던 대흥사 역경원.

돈황 막고굴의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는데 혜초 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와 돌아가시기까지 50여년을 장안에 머물면서 이 대흥선사에서 많은 불경 번역작업을 했다. 혜초 스님은 황제의 칙령을 받아 기우제를 지내는데 주관을 할 정도로 이름 있는 고승이다.


혜초 스님은 719년 16세의 나이에 당으로 와 723년 남천축국 출신 스승 금강지의 권유로 당나라 광주를 출발해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 4년여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지방을 다녔는데 727년 쿠차를 거쳐 장안에 돌아왔다

그 여행의 기록이 바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인데 혜초 스님은 이곳에서 역경 사업에 종사했던 것이다. 스승인 금강지가 타계하자 773년 3월부터 여기 대흥선사에서 금강지의 제자인 불공 스님에게 <대교왕경> 강의를 받았으며 774년 불공 스님마저 입적하자 유언에 따라 6대 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대흥사 내부풍경.

어려서 신라를 떠나 인도와 서역으로의 구법순유를 마친 후 당나라에서 50여 년 간 밀교 연구와 전승에 전념한 나머지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지는 밀교의 전통을 수립했던 것이다. 대단한 법통이 아닐 수 없다.


주지현 금분댐 기슭에 혜초 스님 기념비가 있다. 혜초 스님은 인도에서 돌아와 만년 오대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50여 년 동안 장안에 머물렀는데 혜초 스님만큼 오랫동안 장안에서 활동하면서 발자취를 남긴 한국인은 드물다 한다. 혜초 스님은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 꼽히는 <왕오천축국전>을 펴냈을 뿐 아니라, 천복사와 대흥선사에 주석하면서 밀교 연구와 전파에 한 생을 바쳤던 것이다.


천복사에서 스승 금강지와 8년간 밀교경전을 연구하고 대흥선사에서는 또 다른 스승인 불공삼장의 강의를 수강하며 그의 6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관정도량 등의 밀교의식을 주도했으며 스승이 입적했을 때 그가 제자들을 대표해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짓기도 했다 한다. 궁중 원찰인 내도량에서 `지송승’이란 중책을 맡고 황제가 사는 대명궁에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왕소군 초상.

법당인 역경원은 혜초 스님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당 내부는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진 지옥의 세계가 특이한데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장강삼협에 위치한 구성의 지옥세계를 재현해 놓은 것과 유사하다.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에 있는 도시 후허하오터는 옛 이름은 구이쑤이(歸綏)로 인산산맥(陰山山脈)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몽골인이 `푸른 도시’라는 뜻으로 후허하오터로 불렀다 한다.


후허하오터의 간판 스타는 단연 왕소군이었다. 호텔 이름도 상가나 거리 명칭도 공연의 제목도 온통 왕소군 이름으로 가득하다.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의 궁녀로 화친정책에 의해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와 혼인한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왕소군의 조공이 80여 년 간 전쟁 억제와 아울러 '야만족'에게 중화문명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만큼의 터를 차지하며 그녀의 흔적이 남을 수 있었겠지만 해마다 엄청나게 찾아오는 관광객과 끊임없이 창작된 무수한 문학예술의 공연 소재가 되었던 사실은 놀랄 만하다.


원제가 궁녀 중 하나를 흉노왕에게 보내려 할 때 초상화로 감정해 가장 인물이 떨어지는 여인을 보내고자 했는데 화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못나게 그려진 탓에 그녀가 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하직인사를 하러 나타난 왕소군을 보니 절세가인이었다. 그래서 속이 상한 원제가 화공을 처형하고 눈물로서 왕소군을 보냈다는 설도 전해오고 있다.


왕소군이 궁궐을 떠날 제 비파를 타며 이별가를 부르는데 날아가던 기러기 떼가 그 소리를 듣고 물에 비친 왕소군의 미모를 보다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낙안(落雁)'이란 별호가 생겼다.


소군의 북방행은 아마도 그녀의 선택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 황제를 알현하지 못한 채 궁녀 중 하나로 살아가기보단 타향의 소실 자리일 망정 왕후의 삶을 소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미인을 보내는 마음은 그렇지 않아 거친 이국 생활을 애틋하게 묘사한 것들이 많다. 특히 이태백은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으니 봄이 온들 봄 같지 않구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라고 읊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어 묻힌 무덤엔 가을에도 봄빛을 닮은 풀이 무성히 자라나 청총(靑塚)이라 부르고 있으니 고향땅에 대한 아쉬움이 한으로 남았던 것이다.


높이 30m가 넘는 그녀의 무덤 앞에는 말을 타고 선우(흉노왕의 통칭)와 함께 거니는 모습의 동상이 인상적이다. 처음에 시집 간 호한야 선우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고 3년 만에 죽고 호한야선우 정실부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자식을 낳고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 하나, <후한서>에는 재가하게 되었을 때 독을 마시고 죽었다고도 나오니 말이다.

◇왕소군 묘 청총.

중국의 미녀 왕소군(王昭君)

왕소군에 대한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 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 때 지은 글은 다음과 같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왕소군은 흉노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총(靑 )"이라 하였다고 한다.



출처
[기타] "http://jinpkl.hihome.com/"에서 발췌

왕소군은 중국 역대 4대 미녀라고 꼽히는 사람중 하나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월나라 미녀(통칭 월녀) 서시(西施)
한나라때의 미녀 왕소군(王昭君)
역시 한나라때(삼국시대)의 미녀 사람들이 잘 알고잇는 여포의 부인 초선(貂蟬)
당나라때의 현종의 소실 양귀비(楊貴妃) 입니다.

왕소군은 한나라, 정확히 말해서 전한(前漢) 원제(元帝)때의 사람인데요
집안이 빈천해서 궁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때 원제는 궁녀중에 후궁을 뽑기 위해서
당시 초상화로는 제 일인자라고 날리고 있던 궁중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궁녀들의 초상을 그려서 바치라 하게됩니다.
궁녀의 수가 수천명이 넘기 때문에 일일이 볼수가 없어서였죠.

후궁이 되면 인생이 트이기 때문에
궁녀들은 제각각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며 이쁘게 그려달라고 하는데
왕소군은 집이 워낙 가난해서 갖다 바칠것이 없었습니다.
모연수는 아무것도 오는게 없자 님 말대로 앙심을 품고
초상을 그릴때 일부러 추하게 그리고 점까지 찍었다고 합니다.
아참 왕소군의 초상은 또한 종이에 그린것이 아니고 화병(花甁)에 그린것으로 전해지고 있지요.

원제는 그런 초상을 보고 후궁으로 선택할리도 물론 없었고
그렇게 몇달이 흘렀습니다.
당시 한나라의 가장 큰 적이자 위협이던 흉노의 왕이 (흉노의 왕은 선우라 불렀지요)
공주중에 아무나 자신의 왕비로 삼게 해달라고 청해옵니다.

거절하기엔 흉노의 세력이 너무 위협적이었고
받아들이자니 황실의 피를 받은 공주가 아까운 셈이어서
궁녀중에서 뽑아 흉노의 왕에게 시집보내기로 정합니다.
그리고는 궁녀들의 초상을 보다가
보내봤자 하나도 안아까울것 같은 궁녀의 초상을 선택하고
이 여자를 흉노의 왕에게 보내라 명합니다.

바로 그게 왕소군이었습니다. -_-
그렇게 선택을 하고 직접 왕소군을 불러다 놓고 보니
웬걸, 평생 태어나서 처음보는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어찌나 미인이던지 넋을 놓고 있다가
순간 모연수의 초상화를 보고 비교 대조를 해보니
전연 딴사람인지라, 모연수를 불러서 진상을 캤다고 합니다.

일부러 추하게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야말로 노발대발하여 당장 참수형에 처하지만
이미 흉노쪽에 연락을 하여 흉노의 왕이 직접 온 뒤인지라
일은 돌이킬수 없게 되었고,
흉노의 왕은 왕소군을 보고는 그야말로 대만족을 하여
원제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고는 왕소군을 극진히 모시며 흉노땅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원제는 마냥 속앓이만 하면서 모연수를 씹었겠죠 ㅡㅡ

흉노의 땅에 가보니, 꽃과 산록이 우거진 한의 장안성과는 천양지차인지라
그때 끌려간 왕소군이 남쪽을 바라보며
'봄이 왔건만 오랑캐의 땅에는 풀한포기 없으니 봄이 봄같지 않구나'
그 유명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라는 명언을 남기지요^^

아 그리고 왕소군이 스스로 결심했다는것은 사실무근인듯 합니다.
왕소군은 흉노에 보내지기 전에는
자기가 결심해서 뭔가를 바꿀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으므로...

왕소군의 이야기 좋은 시

2008/02/11 07:20

복사 http://blog.naver.com/dear_jinsol/10027331782

王昭君

<이태백>

昭君拂玉鞍上馬涕紅頰

소군불옥안 상마체홍협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금일한궁인 명조호지첩

소군이 구슬 안장을 출렁이며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흐르네

오늘은 한나라 궁녀이지만

내일 아침 오랑캐의 첩이 된다네

왕소군의 시를 읽고

<진솔방>

곱디고운얼굴은 화공의 뇌물에 가리우고

한치 모자람은 간교한붓끝에 치장되는구나

본래 미색이란 걷모습에 있는 것이 아닐진대

이를 가려보지 못하는주인이 있는 한

속고 속여먹는 간신배들의 손 장난이

세상 어지럽히는 짓을 막을 수 없다네

한 번 피었다 지면흙이 될 세상에

외모의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런가

애절한 恨이 사막에 푸른 무덤을 남기고

유구한 세월에도 세인들의 마음을 적시니

왕소군의 옛 이야기 다시 들으며

작금의 세상사를 다시 생각하네.

홍안을 바라 보면 성이 무너지고

품에 안으면 나라가 기우네

비파를 켜면 기러기가 떨어지고

달빛도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나니

고운 눈매에무쇠도 녹아내리는데

장부로 태어나 어찌내일을 기다리리

중국 4대 미인에는 서시, 왕소군, 양귀비, 초선이 있다.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한나라의 궁녀 왕소군은 황제가 언젠가는 자기를 알아 주리라고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수 많은 궁녀들을 돌아 볼 수가 없어서 화공에게 궁녀들의 얼굴을 그려 올리라고 했다. 그러자 모든 궁녀들은 화공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어 자기를 예쁘게 그려 달라고 청탁을 했다.

그러나 미모에 자신이 있는 왕소군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괘씸히 생각한화공 모연수는 왕소군의 얼굴은 예쁘게 그렸지만 눈동자에 검은 점을 찍어 올렸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훗날 북방 흉노족장 선우와의 화평을 위해 치례로 보내지는 궁녀를 한명 고르는데 선우가 왕소군을 낙점 한 것이다. 황제가 왕소군을 보니 절세의 미모였다. 뒤늦게 연유를 안 황제는 화공 모연수의 목을 쳤지만 때는 늦었다. 왕소군은 비파를 잘 탔는데 그 미모를본 기러기가날개짓 하는 것을 잃고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落雁(낙안)이라는 별호를 받게 되었다.

왕소군은 평생 북방 오랑캐의 첩이 되어 살다 죽었는데 왕소군의 묘에는 사막에서도 푸른 풀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 그 애처로움을 지장보살이 보살핀 까닭일까.

소시적에 할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다시 접하니 감회가 다르네.

그때 할아버지 연세가 지금 내 나이 쯤이었는데... 살다보니 잠깐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되고말았네

08.2.10. (진솔방)

김삿갓이 읊은 시에

북방에 한 미인이 있어

세상과 떨어져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 보니 성이 기울고

다시 돌아보니 나라가 기우네

성이 기울고 나라가 기우는 줄 어찌 모르리

미인은 다시 얻기 어렵기 때문이지

라는 옛 시가 있다.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동한(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두헌(竇憲)의 추격을 피하여 모두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계속하여 총령(蔥嶺)을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 고딕인(Gothic)을 점령하고 그것을 토대로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유럽대륙에 강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후세의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이 되었다.

흉노로 시집간 화친의 미녀사절 - 왕소군

    물고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沈魚), 기러기는 땅밑으로 떨어지며(落雁)

    달은 구름뒤로 얼굴을 가리고(閉月) , 꽃은 스스로 부끄러워 하노라(羞花)

    왕소군(王昭君)은 서시(西施),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서한(西漢)시대 남군(南郡) 자귀(秭歸, 지금의 호북성 자귀) 출신으로 이름은 장(嬙)이고 자가 소군(昭君)이다. 자귀는 장강삼협에 속하는 곳으로 전국시기의 유명한 시인 굴원(屈原)의 고향이기도 하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소설로는 동한(東漢) 채옹(蔡邕)의 ≪금조(琴操)≫, 진인(晋人) 갈홍(葛洪)의≪서경잡기(西京雜記)≫, 대만 작가 고양(高陽)의 ≪왕소군≫, 희곡으로는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곽말약(郭沫若)의 역사극 ≪왕소군≫, 조우(曹)의 역사극 ≪왕소군≫ 등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왕소군의 형상은 더욱

    풍부함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 즉 문학속의 왕소군은 역사속의

    왕소군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소군은 궁중의 잡다한 일을 맡으면서도, 많이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와 서예, 가무(歌舞), 그림 등을

    익히면서 항상 내실을 다지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홀로 고독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꽃다운 나이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나면, 언제나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 언제나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낙엽이 지고 풀벌레 슬피우는 가을이 찾아와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면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한없는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비파를 타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유명한

    <오경애원곡(五更哀怨曲)>에는 바로 그녀의 이러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왕소군이 이렇게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마침내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찾아왔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 BC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흉노에는 내란이 발생하여 호한야의 형 질지골도(郅支骨都)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 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밤 사흘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왕소군은 결국 긴 여로에 시달려

    병이 나고 말았다.

    며칠을 쉬면서 요양을 한 후 안문관(雁門關)을 나서자 흉노의 여러

    장수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 보이는 건 평평한 사막과

    부옇게 날리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뛰노는 소와

    양떼들 뿐이었다.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천막마다 등롱을 달고 아름답게 장식을 하여 왕소군과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는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왕소군을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슬픈

    피리소리와, 달리는 준마, 비릿한 음식, 이역의 풍경 등은 왕소군에게

    고국의 그리움만 더해 줄 뿐이었다. 왕소군이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지 3개월 후, 한 원제는 왕소군에 대한 그리움을 못잊어

    신음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년후, 즉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 하였다. 이도지아사는

    후에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다시 1년이 지난 후 노쇠해진 호한야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이미 3년간

    흉노땅에서 생활한 왕소군은 점점 흉노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대알씨(大閼氏)의 장자 복주루(復株累)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운(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당(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원년,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왕소군의

    형제는 후작(侯爵)에 봉해졌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칙명을 받들어

    흉노의 사신으로 가서 왕소군을 만났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를 모신 적이 있다. 이 태황태후는

    바로 원제의 황후였다. 태황태후에게는 왕망(王莽)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후에 왕망은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웠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유씨(劉氏)의 후손이 아닌 왕망을 중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중국의 변방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전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화친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왕소군은 한없는 원망과 절망 속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가(靑家)"라 하였다고 한다.

    <왕소군의 옛집>

    역사에서는 왕소군을 "명비(明妃)"

    라고도칭하는데, 그 이유는

    서진(西晋) 시기에

    사마소(司馬昭)의 휘를 피하여

    "소군(昭君)" "명군(明君)"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점점 "명비"라고

    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동한(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두헌(竇憲)의

    추격을 피하여 모두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계속하여

    총령(蔥嶺)을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 고딕인(Gothic)을

    점령하고그것을 토대로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유럽대륙에 강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후세의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이 되었다.

    11 08:15 http://cafe.daum.net/yt2025com/A2ha/222



    중국어에서는 용모가 출중한 여인을 침어낙안, 폐화수월(沈魚落雁 閉花羞月)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미모가 너무 뛰어나 물 위에서 놀던 물고기가 부끄러워서

    물속 깊이 숨고 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가 아름다움에 반해 날개짓을 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며 이쁘게 핀 꽃이 무색하다 생각되어 다시 꽃잎을

    닫고 휘영청 밝은 달이 구름뒤에 숨는 다는 뜻이다.

    5천년 중국역사에 보면 많은 미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여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의 4대 대표미인으로 꼽히는 미인들이 있으니

    춘추(春秋)말엽 월나라의 왕(越王) 구천(勾踐)이 미인계를 쓰고저 오나라의

    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친 서시(西施)와 한(漢)나라의 원제(元帝)가

    흉노와의 평화를 위해 흉노족에게 시집보냈던 궁녀 왕소군(王昭君),

    삼국(三國)시기 동한(東漢)의 왕위를 넘보는 간신 동탁(董卓)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양아들 여포(呂布)와의 관계 이간에 파견되었던 초선(貂禪), 미모에

    반해 당(唐)나라의 현종황제가 후궁으로 삼은 며느리 양옥환(楊玉環, 훗날

    귀비에 책봉되었기에 楊貴妃로 불림)이다.

    호지에 피어난 부용화 왕소군

    왕소군(王昭君)은 전한(前漢) 원제(元帝)때 궁녀로서, 歸州 사람 왕양(王攘)의

    딸이었는데 17세때 원제(元帝)의 궁녀로 뽑혀 궁중에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많은 궁녀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황제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갖는

    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구중궁궐 심처에서 황제의 얼굴

    한번 바라보지 못하고 평생 늙는 궁녀들이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궁녀를

    채택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절차적인 모순으로 인하여 때로는

    천하절색(天下絶色)의 미녀가 간택에서 제외 되는 경우도 있었다.

    폐쇄된 공간인 궁궐 안에서 수많은 궁녀들은 거울 속에서 덧없이 늙어만 가는

    자신의 용모를 바라보며 앙앙불락(怏怏不樂)하며 수심과 원한으로 얼룩진

    기다림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동진(東晋)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당시 미녀를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원제(元帝)에게는 수 많은 궁녀가 있었는데 천자(天子)라

    일컬어지는 황제의 체모에 직접 그 많은 궁녀들을 일일이 접견하여 품평할 수

    없었으므로 궁중의 화가로 하여금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올리게 하고

    그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미인을 선택하여 곁에 두었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부작용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궁녀들이 화가에게 막대한 재물을 바쳐 자신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려 달라

    부탁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폐단이 얼마나 심했던지 많을

    때는 십만냥이요 적어도 오만냥이었다.

    그러나 왕소군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자신의 용모와 뛰어난 비파 연주 실력을

    믿었는지라 누가 뭐라고 해도 뇌물을 내어 놓지 않았다. 그녀는 모연수(毛延壽)

    라는 화가의 붓 끝이 바쳐지는 제물에 따라 얼마나 달리 간사하고 요악하게

    변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왕소군의 초상화는 뇌물을 바치지 않는데 앙심을

    품은 모연수에 의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아리따운 용모가 추하게 그려져

    황제에게 바쳐졌다. 이로 말미암아 왕소군은 영원히 황제의 은총을 받을

    대상에서 제외 되었고, 끝없는 기다림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라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던 흉노의 왕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BC31)가 한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기를 희망하여

    왔다. 황실에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변방무마책의 일환으로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원제(元帝)는 하는 수 없이 궁중의

    화가들이 그려 놓은 궁녀들의 초상화를 가져오게 하여 제일 못 생긴 궁녀를

    골라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 하였다.

    원제(元帝)는 선우의 사신을 접견하여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초상화를 보고

    미리 정해 두었던 그 못생긴 초상화의 장본인을 불러 직접 선우에게 시집을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초상화의

    장본인은 초상화 속의 그 못난 용모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최고의

    절세가인이었던 것이다. 그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채(美彩)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원제(元帝)는 그녀의 미색에 반해 시집보내기로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이미

    사신이 보는 자리에서 시집을 가라고 명하였으므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元帝)는 급히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보았는데

    왕소군의 초상화는 본래의 모습과 천양지차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사마귀

    같은 점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때야 화공 모연수에게 속은 것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다르게 그려진 초상화 때문에 왕소군을 놓친 것과

    황제를 기만한데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 원제는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했고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를 비롯하여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들은 모두

    참수되어 저자에 버려졌고 가산을 몰수당했다.

    황제가 약속한 일이고 보니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왕소군은 선우의

    사신을 따라 멀고 먼 북쪽 흉노의 나라로 시집을 갈 수밖에 없었다.

    흉노의 땅으로 떠나가는 말 위에서 왕소군은 비파를 타며

    "명아주 푸르러 무성하기도 한데(芳葉元黃)

    꽃다운 잎은 원래 누른색이었다네.(有鳥此處)

    새들은 그 곳에 깃들었다가(集于苞桑)

    뽕나무 숲으로 모여든다지."

    하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고국산천을 떠나 흉노로 시집갈제 슬프고

    원망하는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 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 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가 아름다움에 반해 날개짓을 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땅으로 떨어짐)"

    이라고 하게 되었고 '낙안(落雁)'은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선우(單于)는 원제(元帝)가 왕소군을 하사함에 매우 기뻐하며 흉노의

    관리들인 좌우현왕(左右賢王), 좌우곡려(左右谷), 좌우대장(左右大將),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 좌우대당호(左右大當戶),

    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등과 같이 삼십리 밖까지 영접을 나와 왕소군을

    맞아 국도로 돌아가 연회를 베풀고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은혜에

    감사했다.

    이 가냘픈 한 여인의 희생 때문이었는지 왕소군의 소위

    '출새화친(出塞和親)'으로 '몇 년 동안 봉화의 불이 보이지 않고,

    인민은 번성하고, 소와 말도 들판에 가득했다

    (數世不見煙火之警 人民熾盛 牛馬在野)'는 사서의 기록처럼 한나라와

    흉노 간에 80년 동안 서로 침입이 없어 평화로왔다고 한다.

    왕소군이 출가하던 해에 한나라 조정에서는 연호를 경령(境寧, 竟寧)

    원년이라 바꾸었고 흉노 측에서도 왕소군을 '호를 편안하게 한

    선우의 비(妃)'라는 의미의 영호연지(寧胡閼氏)로 봉하였다.

    (일설에는 원제(元帝)가 영호연지(寧胡閼氏)의 이름을 하사했다고도 함)

    이러한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서(漢書)에는 왕소군이

    선우(單于)에게 출가한 후의 기록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왕소군은 영호연지(寧胡閼氏-閼氏는 흉노의 왕후를 뜻함)라 불리고

    '伊屠智牙師'를 낳았는데 이 아들은 나중에 우일축(右日逐)왕이 되었다.

    호한야(呼韓邪)는 즉위한지 28년 후인 건시(建始) 2년(BC 31)에 죽었다"

    왕소군은 호한야(呼韓邪)에게 출가하여 2년 만에 남편을 잃었는데 흉노의

    관습인 수계혼(收繼婚:父死妻其後母)에 따라 호한야(呼韓邪)와 흉노의

    귀족 호연씨(呼衍氏)의 여식 사이에 태어난 조도막고(雕陶莫皐)가

    선우(復株累若熉單于)가 되자 다시 아들 뻘인 새 선우의 부인이 되어

    그와의 사이에 두 딸을 낳았다. 새 남편과의 생활 11년 만에 또 다시

    선우가 죽자 그녀는 과부가 되었는데, 나이 불과 33∼34세였다. 그 후

    그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 언급이 없다.

    왕소군의 인생을 한마디로 잘라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중국인들의 가슴으로,

    붓 끝으로 세세토록 꽃(芙蓉-연꽃)과 옥(玉)에 비유 되어 머나 먼 변경의 밖,

    흉노 땅에 홀로 피어난 슬픈 정절의 표상으로 찬양되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가혹한 것이 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출처:중국국제방송

    왕소군, 기러기가 날개짓을 잊다
    미녀의 대명사, 낙안(落雁)의 주인공
    2010.05.13 19:06 입력 | 2010.05.20 20:36 수정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왕소군(王昭君)은

    자(字)가 장(嬙)이며 서한 시대 남군(南郡) 출신이다. 이곳은 전국시기의 유명한

    시인 굴원의 고향이기도 하다.

    ▲ 왕소군이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간 후 두 나라는 오랫동안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누렸다./그림=유쯔(柚子)


    왕소군은 본래 독서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한나라

    원제(元帝 기원전 75~33년) 시기 왕소군은 양가집 출신으로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뛰어난 기품에 식견이 높았던 왕소군은 인품이 고상해서 교묘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궁에 들어간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황제의 총애를 얻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사실 왕소군이 원제의 눈에 들지 못한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중국 전역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황제로서도 수많은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원제는 황실 화공인 모연수(毛延壽)라는 자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간택했다. 그러자 집안에 돈이

    많거나 후원자가 있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뇌물을

    주며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허나 왕소군은 집안이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굳이 뇌물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용모를 실제보다 예쁘게 보일 생각이 없었다. 이런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모연수는 일부러 그녀의 얼굴을 아주 평범하게 그린 후 얼굴에 큰 점까지

    찍어 놓았다. 이렇게 왜곡된 초상화를 본 황제는 당연히 왕소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수년이 흐르자 왕소군도 독수공방 외로움에 슬픔과 원망이 쌓여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로 이때 흉노의 통치자인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중국에

    화친을 청해왔다. 그는 관례에 따라 황제에게 한나라 공주나 후궁에게 장가를

    들고 싶다고 했고 원제도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인들은 선발을 두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라에서 곱게

    자란 여인이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유목민의 땅에 들어가 평생을 산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소군은 누군가 흉노 땅으로 시집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원제는 길일을 택해 장안성에서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그러다 왕소군이 감사의 인사를 올릴 때에야 그녀의 빼어난

    용모와 우아한 기질을 알아본 황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황궁에 들어서자 황궁 전체가 밝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모에

    욕심이 생긴 원제가 왕소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약속을 파기할 경우

    호한야 선우의 신뢰를 잃을까 두려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당시 흉노로 떠나는 그녀에게 원제가 하사한 이름이 바로 ‘소군(昭君)’이었다.

    ‘소군’이란 말의 의미는 ‘한나라 황실과 황제를 빛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소군이 국경을 나갈 때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외롭게 살아갈

    생각에 슬픔이 물밀 듯 밀려오자 가슴에 품은 비파로 ‘출새곡(出塞曲 변방을

    나서는 노래)’를 연주해 울적한 마음을 풀었다. 이때 뜻밖에도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이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는 잠시 날개 짓을 잊어 땅에 떨어

    졌다고 한다. 후대에 미녀를 지칭하는 단어로 알려진 ‘낙안(落雁)’이란 말은

    바로 이렇게 유래한 것이다.


    왕소군이 흉노 땅으로 시집간 후 호한야 선우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던 호한야 선우는 얼마 후 기원전 31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소군의 나이는 불과 24세에 불과했다.


    그러자 흉노의 풍습에 의해 호한야 선우의 후계자인 큰아들 복주루(復株累)가

    선우가 되어 왕소군을 첩으로 삼으려 했다. 왕소군은 한 성제(成帝)에게 상서를

    올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성제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흉노의 풍습에 따라 후임 선우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결국 왕소군은 복주루 선우에게 시집가 2명의 딸을 낳았다. 다행히 복주루

    선우는 부친보다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했으며 부부 금슬이 아주 좋았다.

    이들은 복주루 선우가 사망할 때까지 11년을 해로했다. 이 기간에 한나라에

    남아 있던 소군의 형제들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고 그녀의 두 딸도 장안에

    들어가 태황태후(원제의 황후)를 모시는 등 양국 사이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왕소군은 결국 흉노 땅에서 사망했고 지금의 내몽골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남쪽 9km 지점에 무덤이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의 무덤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푸른 무덤이란 뜻의 ‘청총’(靑冢)이라 불린다고

    한다.


    왕소군이 흉노 땅으로 시집간 후 두 나라 국경에는 60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이런 장기간의 평화공존은 한나라 역사상 드문 예에 속한다.

    때문에 어떤 학자는 왕소군의 공로가 흉노 토벌에 혁혁한 전과를 세운

    무제(武帝) 시기의 대장군 곽거병(霍去病)에 못지않다고 여긴다.


    드라마틱한 생애 때문인지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대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문예작품들이 끊임없이 창작됐다. 이중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동한(東漢)시대 채옹(蔡邕)이 쓴 ‘금조(琴操)’, 원나라 때

    저명한 극작가인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등이다. 반면 그녀에

    대한 정사(正史)의 기록은 ‘한서’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에 짤막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이백의 시 ‘왕소군(王昭君)’을 감상해보자.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진나라 땅(흉노의 땅을 지칭)에서 보는 한나라의 달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흐르는 그림자 명비(왕소군)를 비추누나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일단 옥문관을 오르면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멀리 떠나 돌아올 수 없다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한나라 달은 돌아와 동해에서 뜨건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래일)서쪽으로 시집간 명비는 돌아올 수 없구나
    燕支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연지(흉노의 왕비)의 긴 추위에 눈꽃이 생겨나니
    蛾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땅에 쓰러졌네
    生乏黃金枉圖畫(생핍황금왕도화)살아선 돈이 없어 화공이 추하게 그리더니
    死留青塚使人嗟(사류청총사인차)죽어선 청총을 남겨 탄식케 하누나

    이 시에서 왕소군을 명비(明妃)라 부른 이유는 서진(西晉)의 개국황제인 사마염의

    부친이 사마소(司馬昭)였기 때문에 소군(昭君)을 명군(明君)으로 개칭했고, 나중에는

    아예 명비(明妃)라 불렸기 때문이다.



    글/ 핑핑(平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