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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국제분야

[세계는 지금] 美 빈대의 습격 <세계일보 2010.10.31 (일) 18:06>

[세계는 지금] 美 빈대의 습격
  • 입력 2010.10.31 (일) 18:05, 수정 2010.10.31 (일) 18:06

우글우글~ 근질근질~ 뉴욕의 잠 못 이루는 밤

올 1만2천건 신고…호텔·상점 등 장소 가리지 않고 들끓어 시민들 패닉상태
야행성 빈대에 물리면 가렵고 불면증… 번식력 뛰어나 한국도 안심못해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파크 애비뉴), ‘나이키타운’ 플래그십 스토어(맨해튼 이스트 57번가), 블루밍데일 백화점(59번가), 빅토리아 시크릿(렉싱턴 애비뉴), 캐주얼 의류브랜드 아버크롬비 앤드 피치(소호), 캐주얼 브랜드 홀리스터(사우스시포트), 유엔본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AMC(타임스스퀘어), 연방검사사무실(브루클린), 월스트리트 저널(6번가)….

미국 뉴욕 중심가에 있는 유명 건물이거나 상점들이다. 이곳은 마치 순서라도 정해놓은 듯 돌아가며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근질근질한 그 ‘빈대’ 때문이다.

110여년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 최고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빈대 출몰로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다. 최근 이 호텔에 묵었던 6세 여아가 빈대에 물려 얼굴과 온몸에 상처가 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며 그 가족들이 1만3000달러(1460만원)를 요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플로리다의 한 여성은 이 호텔에서 투숙하던 중 빈대에 물렸다고 항의했다가 하루 330달러짜리 방에서 770달러짜리 방으로 옮기는 호사를 누렸다. 뉴욕포스트는 “왕족, 세계 정상, 유명 인사들이 쉬어가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빈대가 머무는 곳으로 전락했다”고 개탄했다.

속옷을 파는 빅토리아 시크릿은 매장에서 빈대가 발견돼 얼마 전 문을 닫았다. 점포에 있던 의류까지 모두 폐기해야 했다. 아베크롬비 앤드 피치의 소호 매장은 점원이 빈대에 물리는 바람에 문을 닫았고, 홀리스터의 매장도 빈대 출몰로 폐점했다. ‘나이키 타운’ 플래그십 스토어 역시 빈대 출현으로 영업을 중단했다. 세계 스파이들의 온상인 유엔본부에 빈대들이 잠입해 회의장 의자들을 모조리 갈아 치웠다.

빈대 박멸업체 성업중 방역 요원이 집안 곳곳에 빈대를 퇴치하기 위해 살충제를 뿌리고 있다.
BBC 제공

◆빈대가 뉴욕 일상도 바꿔 놔

세계 최첨단 도시 뉴욕이 날개도 없고 날지도 못하는 조그만 벌레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주택은 물론이고 호텔, 관공서, 빌딩, 극장, 상점, 공항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끓고 있다. 뉴욕 시민들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 빈대 신고가 지난해에만 1만1987건을 기록했고, 올 들어서도 10월 현재 1만2000건을 넘어섰다. 지난해 한 조사에서는 뉴욕시민 15명 중 1명꼴로 집에 빈대가 있었다고 답했다.

빈대에게 물어뜯기는 뉴요커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영국 일간 가디언지는 뉴욕 교통개발정책 연구소에 근무하는 애니 와인스턱이 겪은 고통을 소개했다. 와인스턱은 올 5월 1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뉴욕 브루클린의 전세 아파트를 구했다. 새집에서의 첫날 밤, 새벽 두 시에 귀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잠을 깼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불을 켜 침대를 살피다 뭔가를 발견했다. 빈대 한 마리였다. 후려치자 빨간 핏자국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침대에 두세 마리가 더 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거의 놓을 뻔한 그녀는 침실을 뛰쳐나가
거실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아침 빈대 7∼8마리가 침대 위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빈대퇴치 업체에 연락했다. 그녀는 처음엔 빈대에 물린 줄도 몰랐다. 나흘이 지나자 가렵기 시작했다. 목과 어깨, 팔, 얼굴엔 반점이 생기더니 3주일간 가려움증에 시달렸다. 그 일을 치르고 난 뒤 와인스턱은 한동안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다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침대에 뭐가 없는지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빈대 때문에 새 풍속도가 생겼다. 빈대 박멸업체들이 성업 중이다.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은 인터넷 사이트 ‘베드버그레지스트리’(bedbugregistry.com) 등을 통해 자신이 묵을 숙소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 필수가 됐다. 뉴욕타임스 등 뉴욕 언론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빈대 관련 기사가 오르고 있다. 어디 어디에서 빈대가 발견됐다는 속보가 실리고, 빈대에 물려 고생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가십 기사가 화제가 되고 있다. 뉴욕의 연인(戀人)들이 빈대로 인한 최대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CNN은 전하고 있다. 멀쩡히 잘 사귀던 커플이 파트너가 빈대에 물렸다는 이유로 헤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집에 빈대가 있는지부터 묻는다. 뉴요커들은 이런 푸념을 한다.

“유난을 떤다고 할지 모르지만 뉴욕 빈대에게 물려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말 마시라.”

◆뉴욕시, 빈대와의 전쟁 돌입

빈대
공포가 뉴욕 전역을 휩쓸자 뉴욕시는 ‘빈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은 빈대 박멸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시의회는 집주인이 예비 세입자에게 과거에 빈대가 발견됐는지를 사전에 알리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뉴욕시 로젠탈 의원은 빈대가 있는 가정에 최고 750달러의 세금공제를 해주자는 안을 내놓기도 했다. 빈대는 뉴욕뿐 아니라 필라델피아, 디트로이트, 신시내티, 캐나다 토론토, 밴쿠버 등 북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빈대 전문가 400여명이 시카고에서 대책회의를 가졌다.

◆인간의 무지가 빈대 키워

사라진 것으로 보였던 빈대가 왜 갑자기 기승을 부리게 됐는지 원인이 뚜렷이 밝혀진 것은 없다. 강력 살충제 디디티(DDT)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 해외여행을 통해 유입됐다는 주장이 있다. 빈대퇴치 전문가 리처드 쿠퍼는 ‘인간의 무지’를 주요인으로 꼽는다. 빈대 발견 초기에 잡지 못하고 가볍게 여기다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빈대는 가난한 동네에 많다는 오해도 문제다. ‘빈대의 귀환’은 해외를 다녀온 부자 동네에서 시작됐고, 퇴치 비용을 낼 여유가 없는 가난한 가정으로 전파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는 것이다.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빈대 발견 사실을 쉬쉬하다 문제를 키우기도 한다.

미국인들은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난 괴물에게 뉴욕이 습격당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다. 태고의 섬에서 잡혀 온 킹콩이 뉴욕 도심을 휩쓸며 마침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 포효하는 영화 ‘킹콩’을 만들어냈다. 영화들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영화 이상의 생생한 공포와 충격을 주는 ‘빈대의 뉴욕 점령’은 해피엔딩이 될 것 같지 않다.

김기홍 선임기자 kimki@segye.com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빈대를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번식력과 이동성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언제 어떻게 확산될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선 진작 사라졌다가 2006년에 처음 발견됐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2006년 1건, 2007년 1건, 2008년 2건 등 4건이 발견됐는데 모두 외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4건 모두 외국에 살다 온 사람들이 빈대 피해를 호소했다. 그러나 해충방제프로그램 제공 업체인 세스코에 따르면 2009년 한 해에만 국내 호텔에서 30건이 신고됐고, 올해에는 10건가량의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장소는 주로 외국인들이 머무는 호텔들이다.

영어로 침대벌레(bedbug)인 빈대는 말 그대로 주로 침대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매트리스 등 침대뿐 아니라 카페트, 마룻장, 벽장, 옷, 전기제품 등 집안 구석구석에 기어들어가 서식한다. 생명력도
강하다. 1년 동안 먹지 않고도 죽지 않는다. 그래서 박멸이 더 어렵다.
빈대로 인한 피해도 고약하다. 빈대는 긴 주둥이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야행성 곤충이다. 건강상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물리면 참기 힘들 정도로 가렵다. 2차 감염에 의한 피부 질환을 일으켜 심하면 신경과민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불면증까지 걸릴 수 있다. 빈대의 주된 감염 경로는 국내외 여행이 꼽힌다.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거치는 관광지 숙소의 침대에서 잔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빈대를 퍼뜨리게 된다. 그러니 우리나라라고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