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 육/취업전쟁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같은 때 태어나 같은 대학 학과 졸업… 18년 후 드러난 ‘남녀의 차이’ (경향신문2013-04-26 15:36:53)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같은 때 태어나 같은 대학 학과 졸업… 18년 후 드러난 ‘남녀의 차이’

 

ㆍ91학번 그녀들의 ‘그 후’



대학 졸업 뒤 여성들의 삶의 경로는 어떻게 변할까. 좋은 남자와 만나 가정을 꾸렸을까, 아니면 직장을 얻어 일하고 있을까. 직장을 그만뒀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경향신문은 한국 여성 일자리 문제의 최대 화두인 직장여성들의 경력단절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 서울 소재 중상위권 ㄱ대학 교육학과 91학번 졸업자들의 인생경로를 추적해봤다. 비슷한 시기(1972~1973년)에 태어나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나온 동기들이 사회에 나온 뒤 겪은 남녀 차이를 단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 일자리 전문 연구자들이 통계분석이나 불특정 여성들을 심층 면접조사한 적은 있지만 조건이 같은 특정집단(코호트)을 추적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당시 91학번에는 여학생 18명, 남학생 12명 등 총 30명이 입학했다.

서울의 ㄱ대학교 교육학과 91학번 동기생인 박선민·원재정·김은희씨(왼쪽부터)가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여의서로 벚꽃길에서 졸업 이후 겪어온 인생경로를 얘기하고 있다

 

25일 현재 소재가 파악된 여자 동기는 16명이다. 이들은 1995년 졸업한 뒤 일반 사업체 정규직 노동자(중견기업, 연구소, 학원 등) 12명, 공무원(공공기관, 공립학교 교사) 3명, 자영업자(농업) 1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8년 후, 일반 사업체에서 정규직 노동자로 남아 있는 여성은 3명뿐이다. 일반 사업체 정규직 노동자 12명 중 자영업(의류업)으로 전향한 1명을 빼고 8명은 주부가 됐다. 주부 5명은 과외, 비정규직 학원강사 등 파트타임 노동을 겸하고 있다. 또한 농업에 종사했던 자영업 여성 1명이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이동하면서 공무원은 4명으로 늘었다. 일반 기업에 입사한 여성들과는 달리 공무원 입사자들은 경력단절을 경험하지 않았다.

소재가 파악된 91학번 남성 10명 중 8명은 1997~2000년, 대기업 및 중소기업의 정규직 직원으로 입사했다. 이 중 2명은 중도에 퇴직해 입시학원·PC방을 차리고 자영업자가 됐다. 나머지 6명은 기업에서 과장, 차장, 상무 직함을 갖고 있다. 남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여성 동기들에 비해 높은 셈이다. 졸업 후 18년, 91학번 여성 동기생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임신 때문에 한 달 휴가를 내자
남자 선배들은 그 자리 누가 메우냐며 눈치를 줬고,
여자 선배들은 혼자 유난 떨지 말라며 면박을 줬다”
여자 5호 (주부·전 교육출판회사 사원)


(1) 첫번째 좌절, 남성 중심 조직

졸업 직후인 1995년 여자 1호는 50대 그룹 소속 ㄴ건설회사에 입사원서를 넣었다. 대학 시절에는 부전공으로 조경학을 공부했다. 조경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컴퓨터 이용 설계(CAD)’에도 능했다. ㄴ사 최종면접에서 면접진은 “기술직은 관두고 비서로 일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여자 1호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몇 년간 조경공부를 해왔는데 능력은 보려 하지 않았다. 설계뿐 아니라 현장업무, 노무자 관리도 자신 있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낙방의 쓴잔을 몇 차례 마신 뒤 여자 1호는 중견 조경업체 ㄷ사에 사무직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사내의 ‘유리벽’이었다. 여자 1호는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영수증 처리하고 사무비품 사오고 커피 타는 것뿐이었다”며 “입찰 설명회 참석 등 주요 업무는 주로 남자 동기들 몫이었다”고 말했다. 여자 선배는 다른 부서의 대리 한 명이 전부였다. “회사를 계속 다녀도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결혼 후 남편의 지방발령과 함께 회사를 그만뒀다.

여자들은 잦은 야근과 술이 오가는 남성 중심 조직문화에도 힘겨워했다. 교육·출판업 회사의 사무직 직원으로 입사한 여자 2호는 “선배들이 대부분 남자이다보니 술을 강권하는 문화에 여자들이 버텨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졸업 후 경기도의 한 YMCA에 입사했던 여자 3호는 “항상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면 새벽 2시.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회상했다.

입사 후, 외환위기를 맞아 구조조정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서울의 한 경제연구소에 정규직 연구원으로 입사한 여자 4호는 사내에서 유일한 여자 연구원이었다. 당시 약혼자였던 남편보다도 월 50만원을 더 벌었다. 입사 2년째인 1997년 11월,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고 회사는 휘청거렸다. 1998년 초 회사가 타사에 합병되면서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그해 5월 결혼을 눈앞에 뒀던 그는 해고 1순위에 올랐다. 여자 4호는 “월말까지 퇴사하라는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몇 달 전에 미리 얘기해줬더라면 다른 곳도 알아보고 퇴사 준비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부당 해고로 노동부에 회사를 고발했고 결국 퇴직금과 한 달치 급여를 받기로 합의하고 퇴사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 두번째 좌절, 결혼·임신·육아의 덫

여자들은 ‘육아의 덫’에 걸렸다. 입사 1~5년차였던 1996~2000년 사이에 8명이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을 이유로 직장을 그만뒀다. 2006~2008년 사이에 퇴사한 3명도 육아 때문에 사표를 냈다.

2000년 퇴직한 여자 5호는 임신 후 입덧이 심했다. 화장실에서 토하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상사는 사내 메신저로 ‘업무처리가 늦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교육·출판업을 하는 회사는 직장 내 절반 이상인 여직원들을 위해 임신부에게는 1개월, 출산 이후에는 3개월 휴가를 방침으로 내세웠다.

여자 5호가 임신을 이유로 한 달짜리 휴가를 내자 팀원들은 “그 자리를 누가 메우냐, 참고 일하면 안되나”라는 불만을 내비쳤다. 직속인 여자 선배는 “나도 애를 둘이나 낳아봤다. 혼자 유난 떨지 말라”며 면박을 줬다. 여자 5호는 “임신한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분위기를 못 견뎌 결국 사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여자 6호는 “2004년 아이를 낳은 뒤에도 버티고 버텼다”고 말했다. 아이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퇴근 이후에 데려왔다. 그는 “본사에서 지점으로 발령이 났는데 지점에서는 빨리 끝나도 저녁 8시30분이 넘었다. 퇴근 자체가 늦어지다보니 아이 키우는 것이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07년 직장을 나왔다.

여성 직장인들은 아이 키우기에 부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인 여자 7호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희생 없이는 현재가 없었다고 말한다. 인천 연수동에 살던 친정어머니는 첫아이를 돌보기 위해 그의 집 근처인 부평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는 사이 둘째를 임신했다. 그는 “친정엄마가 몸이 안 좋아 더 이상 맡길 수가 없었다. 둘째를 낳고는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 의정부에 사는 시어머니가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며 이사를 왔다. 국회의원 보좌관인 여자 8호의 친정어머니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딸의 집으로 와 집안일을 챙기고 아이들을 돌본다. 여자 8호는 “친정엄마 없는 월요일은 가장 정신이 없는 날”이라고 말했다.


(3) 새로운 도전, 재취업 현실은 시간제

‘주부’란 이름은 취업 시 결격사유였다. 여자 4호는 출산 후 일반 중소기업 사무직을 찾으려 했다. 이력서 경력사항에는 ‘연구원’ 경력을 뺐다. “하지만 나이제한, 키제한에서 걸렸다. 주부면 안되고 반드시 미혼이어야 했다”고 말했다. 일반 사업체에서 퇴사한 뒤 주부가 된 11명 중 재취업에 성공한 이는 3명에 불과했다.

기자 경력이 있던 여자 9호는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막내가 세 살이던 2008년 두 아이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ㄹ컨설팅회사 마케팅 팀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공식 루트를 통한 재취업이라기보다는 지인의 소개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6개월 후 그는 전문지 기자로 복귀했다.

여자 6호는 1년 만에 중소기업인 ㅁ사의 과장으로 재취업했다. 형부가 설립한 작은 회사였다. 일종의 가족경영체인 셈. 덕분에 육아와 직장생활의 병행이 가능했다.

여자 3호도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린이집 교사(정규직)로 재취업했다. 전업주부 기간 틈틈이 공부해 취득한 보육교사 자격증 덕분이었다. 어린이집이 문을 닫는 오후 6시 이후에는 자신의 자녀들도 돌볼 수 있었다.

반면 다른 졸업생들은 가사 및 육아노동과 병행할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를 찾았다. 91학번 주부 8명 중 4명이 시간제 노동을 겸하고 있다. 여자 1호는 첫 직장 퇴직 후, 큰아이가 세 살이 되자 초등학생 대상의 영어 놀이방을 시작했다. 수업시간은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쉬는 시간에는 집앞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왔다. “놀이위주 교육이다보니 배우러 온 초등학생들 옆에서 같이 놀게 했다. 육아 부담이 적은 일자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학원강사(파트타임)를 거쳐 현재 자택에서 동네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여자 졸업생은 “아이가 어릴 때는 자동차 부품에 테이핑하는 재택 부업을, 아이가 걸어다닐 때쯤에는 학습지 영업 아르바이트, 식구들이 잠자리에 있는 새벽에는 우유배달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새벽에 잠깐 일어나서 우유를 배달하면 가사에 방해도 안되고, 돈도 벌고, 아이 우유도 싸게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한다고 되뇌었다”고 말했다.


가사 노동은 아직도 아내 몫 인식
가사·육아노동의 ‘보조자’ 혹은 ‘방관자’. 남편들은 그 사이에서 애매하게 자리해 있었다. 여자 3호, 4호, 7호, 9호는 “남편이 집안일을 잘 도와준다”고 답했다. 남성들이 하는 가사·육아노동이란 ‘설거지’, ‘빨래개기’, ‘청소’, ‘아이들과 놀아주기’, ‘아이들 공부봐주기’ 같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 휴일이나 평일에 간간이 분담하는, 여성들의 말 그대로 ‘돕는’ 노동의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 5호는 “휴일에 남편이 너무 피곤해한다. ‘우리 애들하고 어디어디 갈 예정인데 같이 갈까’ 슬쩍 물어보고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나와 애들만 나간다”고 말했다.

남편들은 이중적인 모습도 보인다. 여자 4호의 남편은 결혼 직전 “당신이 애들 뒷바라지, 내 뒷바라지하다가 나이 40, 50이 돼서 ‘내 인생 어디 갔느냐’며 후회하는 것은 싫다. 당신에게 맞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4호는 “가사가 엉망이면 애 아빠가 싫어한다”고 덧붙였다. 여자 9호도 “맞벌이 부부이기 때문에 집안일 분담하기, 양육 나눠하기는 필수지만 남편은 이를 전적으로 내 몫으로 여기고, 자기는 돕는다는 데 의미를 둔다”며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하는 ‘슈퍼맘’을 기대하다가도 집안일이 잘 안된다 싶으면 못마땅해 하는 게 남편들의 일반적인 심리”라고 말했다.

“양육은 아내 전담”이라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91학번 남자 동기들도 마찬가지이다. 일하는 아내가 있는 91학번 남성은 “가사는 분담하는 편이지만 아이 교육이나 학부모회, 공개수업 같은 학교 행사는 전적으로 아내가 챙긴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다니는 두 자녀를 둔 91학번 남성은 “아이가 아직도 어린데 클 때까지는 엄마가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며 “아이 교육을 위해서 아내가 취업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말했다. 여자 4호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 시대도 바뀌었는데 여전히 남편과 아내를 바깥일을 하는 사람과 집안일을 하는 사람으로 나누려는 사회통념도 문제”라고 말했다. 남자가 녹색어머니회 교통지도를 하겠다고 회사 출근을 늦추면 당장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4호는 “학교 행사에 아빠가 못 가니 항상 엄마가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갈 수밖에 없다”며 “직장 내에 이런 통념이 바뀌지 않으면 ‘녹색어머니회’는 영원히 ‘어머니’라는 이름표를 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 나온 대기업 차장, 그녀는 왜 사표 던졌나

 (경향신문 2013-04-25 23:50:42)

ㆍ2013 여성 일자리 보고서 - 전업주부 선택한 조수인씨

 

당당했다. 자녀 때문에 정면 사진은 꺼렸지만 움츠리지도, 숨지도 않았다.

조수인씨(가명), 38세. 초등 2년생 아들을 둔 엄마다. 2009년만 해도 대기업에서 잘나가는 직원이었다. 그러던 그가 전업주부를 선택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출산휴직 후 인사평가 F, 승진도 남자 동기에 밀려
출세보다 아이 위해 사표… 육아 때문 재취업도 무리

 

1997년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해외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다. 이곳저곳 입사원서를 냈고, 국내 굴지의 재벌계 해운사에 입사했다. 여성 공채 2기. 당시 입사자는 총 60명. 이 중 여성은 9명이었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전체 1등을 하고 고위 임원 비서실로 발령받았다. 2년 뒤 마케팅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해운사의 영업직은 화물주인 글로벌 기업과 서비스 운송계약을 체결하고 그들을 관리하는 일이다. 업무는 적성에 맞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해운기업,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자부심도 컸다. 입사 4년 만에 대리. 남자 직원들과의 경쟁 끝에 2002년부터 2년간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는 즐거움도 누렸다. 영업실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현지에서 과장 승진. ‘여풍’이 보통명사화되면서 회사 고위층에서 여성 임원을 만들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첫 여성 임원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2004년 싱가포르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뒤 결혼하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출산·육아휴직 6개월을 신청했다. 당시 법이 규정한 기한은 1년.

출산휴가 3개월이 끝나갈 무렵 회사에서 복직 시점을 묻는 연락이 왔다. 나머지 3개월을 쉬고 복직하겠다고 답변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평가가 있었다. 등급 F에 연봉 250만원 삭감. 팀원 12명이 아무리 일을 못했어도 쉬다 온 너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출산의 대가는 가혹했다. 팀에서 누군가는 F를 받아야 한다면 희생할 수밖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듬해는 차장 승진 시기였다. 남자 동기들은 예외 없이 승진했지만 누락됐다. 사규상 출산·육아휴직 6개월을 쓰면 고과에서 3점이 감점된다.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 후배들과 함께 문제를 제기해 해당 사규를 없앴다. 그리고 동기들보다 한 해 늦은 2007년 차장을 달았다.

회사가 달리 보였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직원에게는 중요한 업무가 덜 가고, 육아 때문에 퇴근을 일찍 하거나 회식에 빠지는 여직원들은 주변부로 밀려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들 스스로도 위축됐다. 말로만 듣던 유리천장이었다. 글로벌 기업이란 말은 허울처럼 여겨졌다. 금융위기로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자 회사는 2009년 명예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고민에 빠졌다. 자녀 양육은 시부모에게 맡기고 오전 6시30분이면 출근해 오후 8시가 돼야 퇴근하는 시절. 아이 때문에 고생하는 시부모, 바쁜 엄마 때문에 고생하는 아이. 공무원인 남편은 아이를 챙길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내가 그만두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일하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만큼 내 아이는 꼭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다. 직장에서 버티면서 부장이 되고 임원이 되려면 아이가 아플 때 모른 척해가며 밥먹듯 야근을 하고 술자리에 가야 한다. 그렇게까지 희생하면서 올라가야 할까. 나의 출세와 아이의 어린 시절을 바꿀 수 있을까. 결론을 내렸다. 사직서를 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함께 입사했던 여자 동기들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모두 가정주부로 바뀌었다.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일에 대한 열망에 비정부기구(NGO) 같은 곳에서 보람 있는 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1년 쉬고 비정부기구 입사시험을 봤다. 면접관은 대기업을 그만둔 이유를 물었다. 육아 때문이라고 답했다. 면접에서 탈락했다.

시의회에서 계약직 보좌관 일을 1년 했다. 집 근처였고,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에는 퇴근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 지난해에는 다국적기업 사회공헌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며칠 출근했지만 종일 근무와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포기했다. 현재는 전업주부로 지내며 이따금씩 지역 시민단체에서 활동한다.

퇴직을 후회하지 않고 지금의 삶도 충분히 행복하다.

다만 가끔은 당시 조금만 더 버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쯤 부장이 됐을 것이다. 그룹 오너가 여성인 회사지만 사내에 아직 여성 임원은 없다. 아이도 어떻게든 컸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되돌아갈 수 없는 선택이지만 때론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