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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민노당 강기갑 대표 “육식도 NO, 양약도 NO…난 자연인”(스포츠서울 2009.06.10)

민노당 강기갑 대표 “육식도 NO, 양약도 NO…난 자연인”

민주노동당 강기갑(56) 대표는 연일 강행군을 벌이고 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 강도는 더욱 세졌다. 지난 7일부터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기조 전면 전환 등을 외치며 삼보일배까지 나섰다. 목적지는 청와대. 그러나 매번 경찰의 제지로 그 근처를 맴돌다 하루를 마감하는 것을 반복 중이다.

강 대표의 이 같은 투쟁적 행보는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니다. 삼보일배, 단식 등 비폭력 투쟁을 우선시해왔지만 올해 초에 벌어진 ‘국회 활극’ 사건을 계기로 폭력적인 면모가 더 부각되고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시선들이 늘어난 것도 사실. 트레이드 마크인 긴 수염과 개량 한복에 걸맞는 점잖은 정치, 대화의 정치는 언제 실현할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다. <스포츠서울닷컴> 취재진 역시 그런 궁금증을 떠안고 강 대표를 만났다.

“어렸을 땐 맹랑한 아이로 통해…독사에 물려 죽을 뻔도”

-강 대표께선 한복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한복은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에 좋게 만들어진 것이다. 신체적으론 피부가 호흡할 수 있게 해줘 모세혈관 속 노폐물이 제거된다. 아주 과학적인 의상이다. 좀 거추장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한복을 입다 보면 행동이 점잖아진다.

-그러면 정장을 입은 적은 없었는가

예전부터 생활 한복을 많이 입었다. 결혼할 때도 정장 한 벌 입고 사진 찍은 후 그대로 걸어뒀다. 그때 말고는 특별히 입은 기억이 없다.

강 대표는 예상대로 남다른 한복 사랑을 과시했다. 다른 질문을 꺼낸 뒤에도 “한복은 또한 옷고름을 풀고 묶고 하면서 자신의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어서 좋다”고 첨언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한복 얘기를 더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취재진은 다음 질문을 속히 진행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어땠나. 장난꾸러기였을 것 같은데

‘명랑’이 아닌 ‘맹랑’한 아이였다. 내가 어릴 때는 염소, 송아지 등을 키우며 풀을 뜯어 먹이는 일이 일상화됐었다. 또한 이 동네 저 동네 아이들이 그런 목적으로 모이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씨름도 하고 싸움도 하곤 했는데, 그런걸 꽤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처럼 지냈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한 뒤로는 집안 일을 돕는 등 착실하게 보냈다.

1953년생인 강 대표는 경상남도 사천에서 4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없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3학년 때 손가락 사이를 독사한테 물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지금도 이 부위가 겨울만 되면 저린다”며 “물장난 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두 차례 있었다”고 답했다.

이처럼 그의 어릴 적 모습은 여느 시골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집안 형편은 꽤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는 9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할아버지의 기나긴 방랑 생활로 인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강 대표가 태어날 무렵에는 아버지가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정신 차리고(?) 집안 일을 도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좀 더 커서 농민운동을 하다 수도원을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속생활을 10년 간 했다. (71년 사천농고 졸업 후) 집안에서 구입한 야산을 구입해 개간하고 농장을 가꾸는 일에 매달렸다. 그 와중에 카톨릭농민회 활동까지 벌였다. 하지만 독재정권 탄압으로 농장 일과 농민운동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운동의 길을 택했다. 그러던 중 한 신부님이 ‘수도자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길도 있다’는 말에 감화를 받고 수도원에 수사로 7년간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수도원 측에서 ‘하산하라’는 말을 듣고 다시 사회로 나와 농민운동에 전념하게 했다.

“농촌 결혼문제 전념하다 반려자 만나…수염, 평생 안 깎을 것”

-‘농촌 총각 결혼대책위’를 만든 것이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

그 당시(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농촌에서 결혼 못해 자살하는 총각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풀어나가자고 해서 대책위를 꾸렸다. 그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언론에도 엄청나게 많이 소개됐었다. 그때 만난 사람 중에 지금의 내 집사람도 있다.

강 대표는 당시 ‘농촌 총각 결혼대책위’ 간사로 활동했던 14살 연하의 박영옥씨(42)과 결혼했다. 컴퓨터 제조회사를 다니던 박씨는 농촌운동에 뜻을 두고 대책위 간사로 일하면서 직장도 그만두면서까지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서로 이성적으로 끌리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을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사랑도 싹트게 됐다. 이들의 러브 스토리는 이미 일부 매체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대책위로 활동하며 첫 쌍을 결혼시킬 때까지 머리도 안 깎고 수염도 깎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그때 처음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대략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깍지 못했는데 당시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이후 결혼을 시키고 깨끗하게 깎았다. 그런 다음 수염을 다시 기르게 된 계기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농촌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는 것과 더불어 모든 만물이 다 필요에 따라 생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농사도 자연농법으로 지었듯이 수염도 굳이 예리한 칼로 깎아내는 것이 이상스럽게 생각됐고, 이것(수염을 기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로 가지 않을까 싶다.

-‘정치인 강기갑’으로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 실세였던 이방호 사무총장을 누르고 당선됐을 때였던 것 같다.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 순간이 다 기억에 남는다. 전국의 농민들이 사천으로 와주고, 태안 주민들도 밤 늦도록 시내를 돌아다니고, 심지어 친박 진영에서도 도와주는 등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결과에서도 보듯 178표차라는 박빙의 선거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당선이 확정된 직후 함께 한 동지들이 울며 기뻐하고 껴안고 만세를 부르던 때였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의정 활동 중에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손이 여전히 아프신 걸로 알고 있다. 현재 상태는 어떤가.

애초에 전치 12주의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다. 벌써 6개월이 지났는데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다. 손가락 마지막 마디는 골절장애 상태가 될 것 같다.

강 대표는 지난 1월 국회 사무총장실의 원형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그 위로 올라가 발을 굴린, 이른바 ‘활극’을 펼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와 관련, 김용갑 한나라당 상임고문은 “수염을 깎고 한복을 벗어야 한다”고 비판하는 등 사회 일각에서 비판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강 대표의 측근은 “물론 과격한 행동에 문제점이 있긴 했다”면서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알아줬으면 좋겠다. 물리적 저지 말고는 딱히 다른 방도가 없어서…”라고 했다. 강 대표도 “내가 행사한 폭력은 빙산의 일각이다. 여당의 보이지 않는 폭력은 얼마나 많은가”라며 “칼자루는 여당이 쥐고 있다. 그걸 마구 휘두르면 우리도 안 다치려고 방패를 들 수밖에 없는데…그런데 이건 서로 수긍이 안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 채식 위주로 식사…막내아들 ‘보고싶다’는 전화에 마음 아파”

-(화제를 돌려) 식생활이 특이하다고 들었다.

특별할 것까진 없는데…. 자연식을 즐긴다. 농사도 친환경농법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채소나 발효 음식을 위주로 먹는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왔다. 식사도 하루 두 끼만 먹고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을 원칙으로 지켜왔다. 육식은 안한 지 20년 가량 됐다.

-양약도 쓰지 않는다고 하던데

사람에게는 조물주로부터 받은 면역력과 자기 치유력이 있다. 그래서 가능한 자기 치유력을 증강시키는 자연요법 등을 쓰고 있다.

-흥이 나면 가끔 노래를 잘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즐겨 부르는 노래는 무엇인가. 혹시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좋아하는 노래는 ‘흙에 살리라’, ‘물레방아 도는 내력’ 등이다. 그리고 연예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아 기본적으로 가수나 연예인을 잘 모른다.

-자녀들에 대해서 좀 얘기해달라. 의정 활동에 바빠서 거의 만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3남 1녀. 주원(17), 주호(15), 소화(11), 금필(6), 이렇게 넷이다. 주원이와 주호는 현재 충북 제천 소재의 간디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고, 소화와 금필이는 사천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고 있다.

주원이와 주호는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전화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방학 때는 함께 지내기도 한다. 유일한 딸인 소화는 춤과 노래를 무척 좋아해 내가 집에 가면 준비한 공연을 해준다. 막내 금필이는 항상 “아빠, 언제가?”라고 물으며 일정을 확인한 후에 호랑이 놀이, 보물 찾기, 자전거 타기 등을 함께 한다. 요즘 2주째 집에 못 가 아이들이 많이 서운해 하고 있다. 금필이가 전화해 “보고 싶어 빨리와, 나하고 놀자”고 하면 아버지로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

-(다시 화제를 돌려) 단식을 가장 많이 하는 의원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파동 문제로 거의 한달 간을 단식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체중이 3~4kg가 빠지면서 아직까지도 건강이 좋지 못하다. 단식할 때 힘들기도 하지만 단식을 풀 때 어려움이 더 크다. 먹고 싶은 욕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데 이를 참지 못하면 치명적이다. 그걸 참아야 한다. 단식을 열흘 하면 회복식은 한달 정도 해야 한다. 그런 게 어려운 점인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 분향소에서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분향했는데.

많은 국민들께서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미안해하고 울분을 가졌다. 나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인의 정치적 항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봉하마을과 대한문 앞 시민분향소에서 조문을 했다. 모두가 몇 시간씩 기다리며 조문을 하는데 나라고 특별할 것이 있겠나 싶었다.

-정치인으로 언제까지 활동할 계획이신지.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도 얘기해달라.

솔직히 정치에 관심은 많았지만 내가 정치인이 되리라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 이렇게 재선의원까지 되고 보니 스스로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느끼곤 한다. 내 정치생명을 짐작할 순 없지만 주어진 소임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그것이 당원과 사천시민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할 일이 다 정리되면 다시 내 삶의 터전이었던 농촌으로 돌아와 농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면 좋겠는데 현재로선 언제가 될른지 알 수 없다.

강 대표를 직접 만나보니 소탈하고 순박한 시골마을 이장의 모습과 별다를 게 없었다. ‘인간 강기갑’은 매력적이고 인간미가 넘친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앞으로의 정치 활동에서 그런 면모가 자주 발현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뒤로한 채 1시간30여분 가량의 짧지만 속이 꽉 찬 인터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