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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백범 김구 `내가 윤봉길 의사를 죽게 했다` 통곡 (조선일보 2009.08.15)

백범 김구 "내가 윤봉길 의사를 죽게 했다" 통곡

윤봉길 의사 고종사촌 동생인 김종모 옹

“형님은 마냥 자상한 분이었어. 그런 분이 어떻게 그 무시무시한 왜놈 군인들을 뚫고 폭탄을 던졌는지 모르겠어. 아이고, 인터뷰니까 형님이 아니라 윤봉길 의사라고 해야겠네.”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본군 전승기념식 무대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고종사촌 동생인 김종모(86)옹. 윤 의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생존인물이다.

김 옹은 윤봉길 의사가 나고 자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 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 지난 주 목바리 마을에서 만난 김 옹은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이고 허리는 많이 굽었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김 옹은 윤봉길 의사 고모의 셋째 아들로, 윤 의사보다 14살 어리다. 그는 윤봉길 의사가 운영했던 부흥원(마을회관) 야학당의 마지막 세대이며, 해방 직후 윤 의사가 조직했던 농민단체 월진회(月進會)의 재건에 동참한 바 있다.

◆백범 김구 “내가 윤봉길 의사를 죽게 했다”며 통곡

김옹은 동네 앞 벌판을 가리키며 1946년 4월 27일 ‘상하이의거 제14주년 기념식’ 참석차 백범 김구 선생이 시량리를 찾았던 날을 떠올렸다.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에게 훙커우 공원 거사를 도모하도록 주선했다.

“저기 벌판 보이지? 저기가 백범 선생이 연설하던 곳이야. 백범이 오신다니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지.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백범 선생이 ‘내가 윤 의사를 죽게 했다’며 통곡해서 듣는 사람들도 모두 울었어.”

김 옹은 “백범 선생이 우리 외삼촌 내외분을 가리키며 ‘저분들은 윤 의사의 부모가 아니라 전 국민의 부모’라고 말했다"면서 ”그날 밤 자신이 윤 의사를 대신해 아들 노릇을 한다며 외가에서 주무셨는데, 경찰 수십 명이 밤새 집 주위를 둘러싸서 경비를 섰다”고 전했다.

김 옹은 윤 의사의 장남 윤종(尹淙, 1984년 작고)씨가 1950년대 성균관대학교에 다닐 때 백범 선생의 차남인 김신 장군(전 공군참모총장) 댁에서 숙식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김 장군이 윤 의사 아들을 뒷바라지 해준 것은 윤 의사를 지극히 아끼는 아버지 백범 선생의 유지를 받든 것”이라면서 “과연 독립운동의 대가(大家)다운 도량이라고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높았다”고 당시 마을 안팎의 반응을 소개했다.

◆윤 의사 순국 후 탄압 당한 집안과 마을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윤봉길 의사는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몇 주 후 일제는 우편을 통해 윤 의사의 유품을 보내왔다. 날마다 친정에 들르시던 어머니를 따라 김 옹도 그날 윤 의사 댁에 갔었다.

“집배원이 오더니 소포 꾸러미를 주더라고. 외숙모(윤 의사 어머니 김원상 여사)가 뜯어보더니 회중시계, 도장, 중국 돈, 안경 같은 게 나오는 거야. 대뜸 물건을 알아보고 ‘우리아들이 죽었구나’하며 통곡을 하셨지. 모두가 다 같이 울었어.”

집안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계속됐다. 일본 경찰은 걸핏하면 윤 의사의 집을 찾아와 임시정부에서 부쳐온 비밀 편지라도 없는지 장롱에 들어있던 옷가지를 하나하나 털어가며 난장판을 만들고 갔다. 윤 의사의 어머니는 간혹 “가슴에 큰 병이 들었다”고 통곡하며 아들을 일찍 보낸 고통을 토로했다고 한다.

김 옹은 윤 의사 집안뿐만 아니라 시량리 사람들도 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전했다. 가마니 짜기 실적이 안 좋다고 마을 노인들을 눈 위에 무릎 꿇리기, 강제 징용으로 청년들을 덕산면에 모이게 한 후 시량리 출신들만 따로 모아 군홧발로 짓밟기 등이 그가 밝힌 대표적인 사례다.

◆동생에게 장난감 만들어주던 자상한 모습

김 옹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이웃에 사는 윤 의사 집에 자주 다녔다.

“6살 때 친형님 둘이 윤 의사에게 한문을 배우러 다녔어. 나는 형들을 따라갔지. 공부방 앞에 가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형님들 공부를 방해하게 됐어. 그때 선생님이었던 윤 의사가 수업 중에 나와 그 자리에서 장난감을 만들어주셨어.”

김 옹의 말에 따르면 윤 의사는 컵 같이 생긴 도구에다 물에 불린 오징어 껍질을 팽팽하게 씌운 다음, 줄로 끝을 동여매고 햇볕에 말렸다. 젓가락만한 나뭇가지로 두드리니 ‘둥둥둥’ 북소리가 났다. 윤 의사는 “형들 공부하는데 조용히 이걸 가지고 놀라”고 한 뒤 다시 공부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김 옹은 윤봉길 의사의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에 등장하는 야학당 학예회의 모습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29년 봄, 야학당 대표 교사였던 윤 의사는 학생들을 이끌고 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예회를 열었다.

“윤 의사가 부흥원에서 신파(학예회)를 열었는데 이 근방 사람 수백 명이 모여 동네가 난리가 났었어. 유성기(축음기)를 그날 처음 봤는데 커다란 상자 속에서 여자의 노래가 나오니까 보통 신기한 게 아니더라고. 모두 저 속에 작은 여자가 들어 앉아 노래를 부른다고들 생각했어.”

김 옹은 “신파가 끝나니까 윤 의사가 어린애들한테 종이봉투에 과자를 10개쯤 넣은 선물을 나눠줬다"면서 ”얼마나 꼼꼼하고 정이 많았던 분인지 모른다“고 했다.

3시간 가량 윤 의사에 얽힌 추억을 들려준 김 옹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누구 덕분에 지금 이렇게 당당히 살고 있는지 돌아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본군 전승기념식 무대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고종사촌 동생인 김종모(86)옹. 윤 의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생존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