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제 아버지께서 얼마나 백부님 말씀을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저희 큰아버지께서 지금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 두 명이 마주섰다. 이들은 1920~30년대 임시정부에서 핵심 인물로 활약했던 춘산(春山) 이유필(李裕弼) 선생의 셋째 아들 이준영(80) 은혜연합감리교회 목사와 일본군에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조카 윤주(63)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지도위원.
이유필 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1932년 상하이 폭탄 의거 하루 전날 만난 뒤 서로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77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조카와 아들이 만났다. 그들은 초면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마주잡은 손을 한참동안 놓지 못했다.
- ▲ 사료를 펴고 선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는 윤봉길의사 조카 윤주씨(좌)와 이유필선생 아들 이준영씨.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하루 앞둔 날 저녁 이유필 선생 댁에서 따로 저녁을 먹고, 유서에서 이유필 선생과의 친분을 거론할 정도로 이들은 절친한 사이였다.
1931년 5월 상하이에 온 윤봉길 의사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가입하면서 당의 총무이사였던 이유필 선생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독립운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꼭 시간을 내서 한 달에 3~4번은 만났다. 또, 윤봉길 의사가 자신이 다니던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켜 임시정부 내에서 논란이 일자 이유필 선생이 앞장서서 변호해주기도 했다.
윤 위원이 “춘산 선생과 제 백부의 각별한 우애는 우리 집안에서 계속 전해 내려왔던 얘기”라고 말하자 이 목사는 “윤 의사가 평소 우리 집 단골손님이었는데 특히 냉면을 자주 만들어줬다는 얘기를 어머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며 활짝 웃었다.
- ▲ 이유필·윤봉길후손의만남
◆ 상하이 의거는 윤봉길 의사와 이유필 선생의 합작품?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기념식 무대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돼 상하이파견 일본군병대 제1분대로 끌려갔다. 당시 일부 신문 보도에 의하면 “윤봉길 의사가 체포 후 모진 고문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문서, 심문 조서, 본국과의 전보 내용을 살펴보면 윤 의사는 체포되자마자 “이춘산(李春山)이라는 한국인에게 폭탄과 200위안을 받고 폭탄 투척을 명령 받았다”고 진술했다. 일본군은 이날 오후 2시 윤 의사의 진술을 듣고 프랑스 경찰의 동의를 얻은 후 프랑스 조계에 있는 춘산 선생의 집을 급습했다. 이때 춘산 선생은 이미 피신한 뒤였지만, 하필 그 시간에 춘산의 첫째 아들 만영(晩榮)에게 선물을 주러 온 도산 안창호 선생이 붙잡혀 2년 반 동안 옥살이의 고초를 겪었다.
윤봉길 의사가 왜 춘산 선생의 이름을 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윤 위원은 “아마도 대한교민단을 이끌던 이유필 선생은 어떻게든 용의선상에 오를 것이 확실했기에 다른 임정 요인들을 도피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사전에 작전을 세운 것으로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 목사도 “상하이 의거에 아버지가 그만큼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며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 의거를 전적을 혼자 준비했다고 알려지면서 공을 독차지하는 것같아 가족들이 많이 섭섭해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1932년 5월 10일 김구 선생이 각 일간지에 “이봉창, 윤봉길 폭탄사건의 배후는 본인”이라고 발표할 때까지 일본군은 사건의 배후로 이유필 선생을 지목해 수사에 큰 혼선을 빚었고, 우연히 연행된 안창호 선생을 제외한 모든 임정 요인들은 피신에 성공했다.
◆ "하늘에서 지켜보면서 흐뭇해 하실 것"
이번 만남은 윤 지도위원이 이유필 선생의 아들인 이 목사를 윤봉길의사기념관으로 초청하면서 성사되었다.
윤 위원이 “기념관을 찾아주셔서 감사하다”며 “큰아버지(윤 의사)께서도 이 장면을 내려다보시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윤봉길 의사의 유족이 자신을 찾아준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윤 지도위원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두 사람은 “선열들이 반쪽짜리 나라를 만들려고 독립운동 한 것이 아니잖느냐”며 “남과 북의 공통분모는 ‘독립운동’이니 우리 유족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으며 첫 만남을 마무리했다.
- ▲ “제 아버지께서 얼마나 백부님 말씀을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저희 큰아버지께서 지금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제 64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절친하게 지냈던 독립운동가 두 명의 후손이 상봉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소재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1920~30년대 임시정부에서 핵심 인물로 활약했던 춘산(春山) 이유필(李裕弼) 선생의 3남 이준영 목사(80, 은혜연합감리교회)와, 일본군에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조카 윤주 지도위원(63,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이 77년 전 상하이 폭탄 사건 이후 처음 만났다. 초면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마주잡은 손을 한참동안 놓지 못하고 양가 어른들의 안부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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