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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21세기의 다빈치 떠나다 (조선일보 2011.10.06 21:38)

[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21세기의 다빈치 떠나다

현대인의 삶을 바꾼 IT 거인의 56년
사생아… 이단아… 독재자… 혁신가… 영화바보다 더 영화같은 삶
생후 1주일만에 입양돼, 대학 중퇴 후 창고서 창업
애플 신화 만들어… 췌장암 이후 7년간 투병

"가장 위대한 혁신가를 잃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애플'의 창업자 겸 전 최고경영자(CEO)로 우리 삶을 혁신했던
스티브 잡스(56)가 5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기술·경영·디자인을 꿰뚫어 본 '이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뉴욕타임스)도 암과 벌인 7년 전쟁에선 승리하지 못했다. 2004년 췌장암 수술, 2009년 간 이식 수술을 받고도 보란 듯 다시 나타난 그였다. 잡스는 지난 2월 17일 미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자신에 대해 '6주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보도한 다음 날 오바마 대통령이 주재한 IT 기업 경영진과 만찬 회동에 참석했고, 3월 2일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에 나왔다.

5일(현지 시각)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애플스토어를 찾은 추모객이 젊은 스티브 잡스가 사과(애플)를 들고 있는 사진을 아이폰에 띄운 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AP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특유의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둥근 안경을 착용한 잡스의 흑백 사진으로 전면을 채우고 '스티브 잡스, 1955~2011'이라는 문구만 달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영민함과 열정, 에너지가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 덕분에 우리 삶은 윤택해지고 향상됐다"고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뒤 입양,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로부터 축출된 뒤 복귀와 재기, 희귀암 발병과 투병, 아이폰·아이패드 출시를 통한 디지털 시대 새 라이프 스타일 창조…. 그는 드라마의 상상력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었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입양됐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딸을 시리아인 유학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심슨 부친의 반대로 미혼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잡스는 '대학 진학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양부모 폴·클라라 잡스에게 맡겨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이 강해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집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약을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전자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학·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잡스는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공부를 때려치운다. 그는 중퇴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구하려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종교 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약 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히피 저항 문화에 휩쓸려 밥 딜런과 비틀스에게 빠져 살았던 잡스는 자퇴 후 다니던 전자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불교로 개종해 아내 로린 파월과 결혼식도 불교 의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1976년 다섯 살 많은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공동 창업한다. 사무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양부모 집의 창고였다. 잡스는 이듬해 개인용 PC 애플2를 내놓으면서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기가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동안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다. 그는 1996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디지털 시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PC 시대를 열었던 그는 PC 이후 시대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올해 1월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말했다. 그는 췌장암 판정 후 '죽음'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돕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기하는 것이다" "묘비에 '최고 부자 잠들다'는 글귀엔 관심이 없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굉장한 일을 해냈지'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서 "늘 갈망하고 늘 우직하게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잡스가 이끈 제품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신은 우리가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정말 많은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내십시오."(2006년 5월 NBC뉴스 인터뷰)

그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 앤과 사이에 딸 리사가 태어났지만 혈육임을 부인했다. 양육비도 주지 않아 미혼모 앤이 근근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성장한 딸이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서 당시 일을 언급했다. 생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매몰차게 외면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재자'나 '사소한 일에까지 목숨 건 관리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디자인·광고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300개 특허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카피 탄생에 관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아이패드(iPad)에서 따온 '아이새드(iSad)'라는 추도사가 퍼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을 인용하며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insanely great honor)'이었다"고 말했다. IT 분야 싱크탱크인 엔드포인트 테크놀러지의 로저 케이 소장은 "전체적인 영향으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에게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 앞에서 5일 밤(현지시각) 중국인 유학생들이 길바닥에 촛불을 세워 애플 로고를 만들고 있다. 이날 세계 곳곳에서 잡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AFP 연합뉴스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특유의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둥근 안경을 착용한 잡스의 흑백 사진으로 전면을 채우고 '스티브 잡스, 1955~2011'이라는 문구만 달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영민함과 열정, 에너지가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 덕분에 우리 삶은 윤택해지고 향상됐다"고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뒤 입양,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로부터 축출된 뒤 복귀와 재기, 희귀암 발병과 투병, 아이폰·아이패드 출시를 통한 디지털 시대 새 라이프 스타일 창조…. 그는 드라마의 상상력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었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입양됐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딸을 시리아인 유학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심슨 부친의 반대로 미혼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잡스는 '대학 진학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양부모 폴·클라라 잡스에게 맡겨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자랐다.

1983년 11월 당시 28세의 스티브 잡스(왼쪽에서 둘째)가 방한,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을 만났다. 73세였던 이 회장은 당시 잡스에 대해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 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제공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이 강해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집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약을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전자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학·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잡스는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공부를 때려치운다. 그는 중퇴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구하려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종교 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약 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히피 저항 문화에 휩쓸려 밥 딜런과 비틀스에게 빠져 살았던 잡스는 자퇴 후 다니던 전자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불교로 개종해 아내 로린 파월과 결혼식도 불교 의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1976년 다섯 살 많은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공동 창업한다. 사무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양부모 집의 창고였다. 잡스는 이듬해 개인용 PC 애플2를 내놓으면서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기가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동안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다. 그는 1996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디지털 시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PC 시대를 열었던 그는 PC 이후 시대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올해 1월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말했다. 그는 췌장암 판정 후 '죽음'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돕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기하는 것이다" "묘비에 '최고 부자 잠들다'는 글귀엔 관심이 없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굉장한 일을 해냈지'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서 "늘 갈망하고 늘 우직하게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잡스가 이끈 제품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신은 우리가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정말 많은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내십시오."(2006년 5월 NBC뉴스 인터뷰)

그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 앤과 사이에 딸 리사가 태어났지만 혈육임을 부인했다. 양육비도 주지 않아 미혼모 앤이 근근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성장한 딸이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서 당시 일을 언급했다. 생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매몰차게 외면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재자'나 '사소한 일에까지 목숨 건 관리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디자인·광고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300개 특허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카피 탄생에 관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아이패드(iPad)에서 따온 '아이새드(iSad)'라는 추도사가 퍼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을 인용하며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insanely great honor)'이었다"고 말했다. IT 분야 싱크탱크인 엔드포인트 테크놀러지의 로저 케이 소장은 "전체적인 영향으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에게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생부 만나진 못했지만… 온라인으로 이어진 ‘부자의 情’

세계일보 | 입력 2011.10.11 20:08 | 수정 2011.10.11 22:11 |

사망원인 췌장암·호흡정지…보건당국, 사망진단서 공개
애플 본사서 19일 추모행사

애플의 아이콘이자 전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5일 오후 3시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 자택에서 호흡정지와 췌장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10일 공식 확인됐다.

블룸버그 등 미 언론에 따르면 새너제이에 있는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 카운티 공중보건부가 이날 공개한 잡스의 사망진단서에는 직접적인 사인은 '호흡정지'로, 근본 사인은 '전이성 췌장신경내분비종양'으로 돼 있으며 부검은 하지 않는 것으로 적혀 있다.

잡스는 특정 종교와 무관한 샌타클래라의 한 묘지에 7일 매장된 것으로, 직업란에는 '기업가'라고만 기록돼 있다. 애플은 5일 잡스가 숨졌다고 발표했으나 사망 원인 등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애플은 오는 19일 잡스를 추모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팀 쿡 애플 CEO는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잡스의 삶을 기리는 행사가 19일 애플 본사에서 비공개로 열린다고 밝혔다.

인터넷상에서는 애플의 신제품인
아이폰4S가 미국에서 출시된 14일을 '스티브 잡스의 날'로 정해 잡스의 상징이었던 검정 터틀넥 셔츠를 입자는 움직임이 일고있다.





스티브 잡스의 친부모인 압둘라파 존 잔달리(왼쪽)와 조앤 캐럴 시블 심슨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1955년 태어난 잡스를 입양시킨 얼마 후 결혼했으나, 다시 잡스를 찾지 않은 채 1962년 이혼했다.
알아라비아네트 제공

잡스 사망 직후 인터뷰를 거부했던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는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를 통해 잡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진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잔달리는 잡스를 입양 보낸 것은 실수였다며 만나서 커피 한잔 하고 싶다는 소망을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잔달리는 2005년쯤 잡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이었다"고 회상하며, 그 후 애플의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잡스의 연설 장면 등을 온라인으로 지켜보게 됐다고 말했다.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잔달리는 잡스의 건강이 나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해부터 주기적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메일은 "생일을 축하한다", "건강을 빨리 회복하길 빈다" 등의 간단한 내용이었으며, 두 번의 짧은 답장을 받았다. 잡스는 사망 6주 전 "감사합니다"라고 잔달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잔달리는 자신을 "애플의
얼리 어답터(남들보다 먼저 신제품을 사서 써 보는 사람)"라고 소개하며, 애플의 모든 제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보이며 "잡스는 천재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잔달리는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잡스의 어머니 조앤 심슨을 만났다. 심슨은 1954년 잡스를 임신했지만 잔달리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부모 때문에 다음해에 태어난 잡스를 입양시켰다.


회사 관두고 창업? 젊은 직장인들 '잡스 증후군'

조선비즈 | 입력 2011.10.20 03:24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위대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만이 진정한 만족을 줄 것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돼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대기업 7년차 최모(33·전산담당)씨는 애플 신화를 남기고 떠난
스티브 잡스의 어록을 되새기며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하는 일이 잦아졌다. 암 투병을 하던 잡스는 생전에 "돈은 중요하지 않다. 내일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라"고 강조했다. 최씨는 "회사의 부속품처럼 살기보다 잡스처럼 가슴 떨리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최근 잡스의 삶에 자극받아 진로를 고민하는 '잡스 증후군'을 앓는 젊은 직장인들이 생겨나고 있다. 기업의 인재들이 이런 방황을 하고 있다면 기업 입장에선 큰 손실이다. 회사 내에서도 충분히 꿈을 펼칠 수 있음을 일깨워 줘야 한다.

◇밥벌이에 자부심을

국순당 배중호 대표는 1992년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술을 빚는 사업이 싫었다고 한다. '술장사'라는 생각뿐 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직원들도 대부분 회사 일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했다. 배 대표는 고민 끝에 '몸에 좋은 술을 만들고, 전통주를 지켜낸다'는 기업 철학을 세웠다. 이런 기업 가치를 갖고 개발한 '백세주'는 약주 시장을 새롭게 개척했다. 직원들의 의식도 바뀌었다. 개량한복을 입고 일하는 직원들은 '전통주에 관한 한 우리가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 책을 제작한 출판사 쌤앤파커스의 직원들은 자신의 사명을 책상 위에 걸어놓고 일한다. 일명 '사명 선언서'다. "돈과 권력에 관계없이 모든 인격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겠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윤택한 정신세계를 가꾸도록 돕겠다" 같은 내용들이다. 박시형 쌤앤파커스 대표는 "수습사원 기간을 마친 뒤 사명선언서 낭독식을 갖는데, 처음엔 취업이라는 개인 목적만 생각했던 젊은 직원들도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사명감을 찾고 나선 큰 열정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월급만 지급하는 것은 단순한 '노동 계약'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치를 부여하면 노동 계약은 한 차원 높아진다. 직원들이 회사와 연대감을 갖고 회사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을 하나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소외당하던 직원들도 가치를 심어주면 충성파가 된다. 2000년 외환위기 직후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교보생명 신창재 회장은 보험 설계사들을 모두 불러놓고 '가치 선포식'을 가졌다. "우리는 하찮은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은 곤경에 빠진 고객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온갖 수모를 당하던 주부 설계사들은 이날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고객 앞에서 당당한 열혈 직원들로 거듭난 이들은 교보생명을 업계 1위로 올려놓았다.

◇혁신의 설렘

요즘 직장인들은 잡스가 추구했던 '혁신과 변화'에 감동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긍지를 원하는 것이다.

애플이 직원을 사로잡은 방식도 그와 같았다.
아이폰을 만드는 핵심부서인 무선사업부는 1년에 고작 3일 쉬고 일할 정도로 노동 강도가 세다. 그러나 고된 업무를 견디게 하는 것은 "최고의 회사에서 세상을 바꾼다"는 자부심이다. 잡스는 직원들로 구성된 '100인 연찬회'를 개최해 인재들의 자부심을 높이기도 했다. 해마다 잡스로부터 지명된 최고의 100인들은 잡스와 3일간 토론하며 자신이 혁신의 주체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출판사
웅진씽크빅은 '혁신 3종 세트'로 성장하고 있다. 모든 직원은 일주일에 2시간30분씩 업무를 중단하고 '아이디어 모임'을 갖는다. 여기서는 자신의 업무와 상관없는 아이디어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또 직원이 기발한 창업 아이디어를 내면 회사는 사내 벤처사업을 지원한다. 최대 30일간의 해외 체험활동도 지원한다. 직원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고,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를 사업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직원 우선주의

즐거운 회사문화로 직원들을 사로잡은 회사들도 많다.

"매일 아침 눈뜨면 회사 갈 생각에 가슴이 설레요. 주말에는 월요일이 너무 멀게 느껴져 참을 수 없을 정도예요." 미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 자포스(Zappos)의 한 직원 말이다. 이 회사 철학은 '직원의 행복이 고객의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정한 이 회사의 10대 가치에는 '재미와 약간의 희한함을 창조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사무공간을 놀이동산처럼 꾸며 놓기도 하고, '얼간이처럼 옷 입기' 같은 행사도 연다. 1999년 신발 전문 쇼핑몰로 출발한 이 회사는 10년 만에 매출 10억달러 회사로 성장했다.

인터넷 업체 넷앱은 직원들에게 마사지실과 무료 세차를 제공한다. "직원들은 더 나은 연봉이나 직책을 제안받았을 때가 아니라,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이직을 생각한다"는 경영진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도움말=김성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이정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김가영 세계경영연구원 연구원


잡스, 갤럭시 처음 보곤 "왜 따라해!"
전자신문 2011.11.09 19:16

"스티브 잡스가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을 처음 봤을 때 '왜 내 제품을 모방해!'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나도 비슷한 분노를 느꼈다."

 제이 엘리엇 전 애플 수석부사장(누벨 CEO)의 회고다. 9일 전경련 국제경영원과
웅진씽크빅 등이 공동 주최한 CEO 조찬세미나에 참석한 엘리엇 전 부사장은 삼성전자와 애플이 벌이는 특허전에 대해 묻자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이 애플 아이폰과 상당히 닮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잡스의 '멘토'로 불린 인물이다. 잡스보다 13세 손위로 기업 시장에 안주하던 IBM과 인텔 등 전 직장에서 나온 후 우연히 한 식당에서 25세의 잡스와 만났다. 이후 30분이 넘게 컴퓨터산업의 미래 이야기를 나누다 애플에 합류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존 스컬리에 의해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날 무렵 함께 나와 픽사를 인수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삼성전자의 소프트파워 부재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삼성전자나 소니, 델은 절반만 가지고 싸운다"며 "삼성전자 광고를 보면 하드웨어 얘기뿐이고 결국 그 안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삼성이나 소니 같은 기업들이 왜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창의력은 하드웨어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엘리엇 전 부사장은 "애플은 컴퓨터회사라기보단 '컴퓨팅'회사"라며 "제품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또 "시장 현황에 영향받지 않도록 '쿨'해지고 시장 최초가 돼야 한다"며 "애플 스토어를 처음 낼 때는 모두 다 실패할 거라고 했지만 지금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보다 유명한
랜드마크가 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에 대해선 "모토로라와 구글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을 인수할 때는 기업 자체가 아닌 사람과 기술을 인수해야 한다"며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는 큰 실수"라고 말했다.

 한국에 온 소감으론 "IT 분야 한국 젊은이들을 몇 명 만나봤는데 놀라운 창의력을 가지고 있었다"며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를 없애고 시스템을 만들어 이러한 창의력을 흡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잡스가 없는 애플의 미래에 대해선 "향후 5년은 지금의 혁신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잡스 분발시킨동기는 인생이 짧다는 사실"

세계일보 | 입력 2011.11.09 19:21 | 수정 2011.11.09 20:34

헌신적 사랑 복합적 성격 묶어줘
암 걸리기 전부터 종종 죽음 얘기
삶이 짧다는 것에 혼신의 힘 다해

[세계일보]

"스티브 잡스를 분발시킨 가장 중요한 동기는 인생이 짧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애스펀연구소에서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잡스의 전기를 쓰며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잡스의 삶과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아이작슨은 1984년 시사주간 타임의 기자 시절 잡스와 인연을 맺었으며 타임 편집장, CNN 최고경영자를 거쳐 현재 애스펀연구소 회장 겸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잡스의 요청으로 그의 전기를 쓰게 된 아이작슨은 잡스를 약 50차례 인터뷰했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주변 인물도 취재했다. 아이작슨은 "그의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전기에 쓰고 있는 내용을 말해줬다"며 "그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긴 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잡스가 유일하게 관여한 부분은 책 표지였다. 그는 단순하고 세련된 표지를 원했다고 한다.

잡스는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그는 암에 걸리기 전에도 죽음에 관한 얘기를 자주 했으며, 우리는 태어나고 죽으며 아주 짧은 삶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열정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또 "선불교 수련을 쌓은 때문인지 잡스는 윤회를 믿었으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그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월터 아이작슨

아이작슨은 잡스에 대해 강점과 약점을 모두 지닌 까다로운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잡스의 창조성은 다른 생각을 하는 능력, 가장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무엇이 잡스를 위대하게 만들었을까. 아이작슨은 이 물음에 "잡스는 위대한 제품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면서 "그는 컴퓨터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컴퓨터 업계를 변화시켰고, 뮤직 플레이어와 휴대전화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음악산업과 휴대전화산업을 변화시켰다"고 답변했다.

이어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애플의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다른 것을 생각(Think Different)'한 천재"라고 규정했다.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 잡스에게 경도된 것은 아닐까. 그는 "감정적으로 그에게 끌린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에 근거해 최대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잡스 전기에는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잡스를 입양한 양부모와 애플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 선불교 스승인 스즈키 순류, 그리고 잡스와 인연을 맺은 여러 여인들…. 아이작슨은 잡스의 현재 부인인 로런 파월이 잡스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20여년 동안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그의 낭만적이면서도 통념을 거스르는 성향과 과학적이고 사무적인 성향을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유에서다.

아이작슨은 잡스 없는 애플의 미래를 "향후 5년에서 10년은 번성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낙관했다. 잡스는 생전에 삼성과 치열한
지식재산권 전투를 벌였다. 그럼에도 잡스의 전기에는 삼성 관련 언급이 없다. 아이작슨은 "잡스는 삼성을 애플의 훌륭한 동반자로 생각했지만, 삼성과 대만 기업 HTC 등이 사용한 안드로이드가 애플의 운영체제를 도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분개했다"면서 "자서전 집필 과정에서는 잡스가 삼성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작슨은 전기에서 "잡스가 너무 긴장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적은 가수 밥 딜런을 만났을 때 뿐"이라고 썼다. 잡스는 왜 밥 딜런에게 열광했을까. 아이작슨은 "잡스는 밥 딜런이 자신의 세대를 대변한 반항아이자 시인이었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밥 딜런이 계속 변화했다는 점을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전기 작가 아이작슨 "잡스, 경쟁자 삼성을 미워했다"

매일경제 | 입력 2011.11.09 17:17

작고한 천재,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삼성에 대해 파트너로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삼성이 스마트폰에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탑재하자 미친 듯이 화를 냈고, 이겨내야 할 경쟁자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를 집필한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이 8일 워싱턴DC 자신의 사무실에서 매일경제와 기자회견을 하고 잡스와 삼성의 관계를 이같이 묘사했다.

아이작슨은 "잡스는 안드로이드 오퍼레이션 시스템은 애플을 훔쳐 베낀 것이라고 믿었다"면서 "잡스는 그래서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몹시 싫어했다"고 술회했다. 이어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삼성이나 HTC 등의 휴대폰 회사들도 그래서 싫어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잡스가 살았다면 그는 더 많은 경쟁자와 계속해서 싸웠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잡스는
아이패드 이후에 그의 역작은 아이 클라우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아이작슨은 소개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컴퓨터에 연결하고, 어디에서든 이를 구동시킬 수 있는 아이 클라우드 시스템 구축에 그는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개인이 갖고 있는 모든 콘텐츠를 동시에 구현시키는 데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단계'의 컴퓨터 진화를 보길 원했다. 알려진 대로 잡스는 TV의 진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그는 복잡한 리모컨으로 TV를 조작하는 데 짜증을 냈다. TV를 간소하게 만들겠다고 늘 이야기했다.

아이작슨은 돈에 대한 잡스의 철학도 소개했다.

그는 "잡스는 돈에 관해서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그가 대학에 실패하고 인도를 여행했던 젊은 시절, 그는 몹시 가난했다. 거부가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는 늘 돈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벌더라도 대궐 같은 큰 집을 갖거나 집 주변에 담장을 쌓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의 집은 동네의 평범한 모퉁이 집에 불과했다. 퇴근 후 그는 부엌 주변의 테이블에서 아이들, 부인과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만나고, 학교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엘리엇 전 애플 부사장 "잡스는 부끄럼쟁이였다"

한국경제 | 입력 2011.11.09 16:44 | 수정 2011.11.09 17:18

제이 엘리엇 전 애플 수석부사장이 프리젠테이션의 '달인'이었던 스티브 잡스에 대해 "부끄럼을 매우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라고 말해 눈길을 끈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경희대학교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테크플러스 2011'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달 초 영면한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엘리엇은 "그는 사실 부끄럼을 대단히 많이 탔고 대중 앞에서 하는 연설도 아주 싫어해 유명한 '
스탠포드대 연설'도 겨우 하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잡스는 1985년께 뉴욕의 한 식당에서 엘리엇과 식사를 함께 하던 중 유명 연예인이 들어오자 "제이, 제이 저기로 가서 사인 좀 받아 줘"라고 말했다.

엘리엇은 "잡스 당신이 사인을 직접 받아 와야하기도 하지만 실은 저 연예인이 사인을 여기로 받으러 와야하는 거야"라고 말했지만 잡스는 재차 사인을 받아와 달라고 졸랐다는 것.

이어 "아시다시피 잡스가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 연예인은 영화 음악을 담당하던 연예인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잡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엘리엇은 "그는 훌륭한 혁신가였다. 나는 그의 인재 사랑, 조직 문화와 제품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보인 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잡스는 에디슨처럼 특허를 만드는 능력이 있다기 보다는 기술을 기반으로 제품을 인간화시킨 데 장점이 있다"며 "그를 이을 혁신가는 현재로선 어떤 산업 분야에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점에서 그의 단점은 본인이 하는 애플의 일에만 집중해서 개인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그는 "잡스는 타인이 제품이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나 수익에 대한 것 보다는 '내가 사용자라면 어떤 제품을 만들지'를 고민했다"며 "한국뿐 아니라 다른나라 기업 CEO도 이런 점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엘리엇은 "잡스의 리더십을 배우려면 자기 제품의 최고 사용자가 돼야 하고 그 제품을 사랑해야한다"고 말했다.

엘리엇은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함께 지난 20여년간 제품 개발과 인재 채용, 조직 문화 , 브랜딩 등 애플의 전반적인 경영에 참여한 인물로 왼손잡이인 잡스가 '나의 왼팔'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믿고 기댄 멘토로 알려졌다.

<인터뷰> 아이작슨 "잡스를 있게 한 이는 아내"

연합뉴스 | | 입력 2011.11.09 15:11 | 수정 2011.11.09 15:17

스티브 잡스 공식 전기 작가 "그는 창의성ㆍ예술성을 기술과 결합한 천재"

"잡스 없는 애플, 5∼10년은 건재할 것"

(워싱턴=연합뉴스) 성기홍 특파원 = "오늘날의 스티브 잡스가 있기까지는 그의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하나로 묶어낸 아내 로런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지난달 5일 세상을 떠난 애플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59) 씨는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연합뉴스를 비롯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18세기 미국의 정치인 겸 외교관, 문필가인 벤저민 프랭클린,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등의 전기 작가로도 유명한 아이작슨은 잡스가 자신에게 공식 전기 집필을 부탁하면서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각도 담아 객관적인 전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1984년 시사주간지 타임의 기자 시절부터 잡스를 알게 돼 전기를 쓰는 인연을 맺은 아이작슨은 타임 편집장을 거친 언론인 출신으로 CNN 최고 경영자를 거쳐 현재
아스펜 연구소 회장 겸 최고 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아이작슨은 2009년 전기 집필을 시작한 이후 잡스를 약 50차례 가까이 인터뷰를 했고, 100여명 이상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그의 전기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잡스 전기를 쓰게 된 과정과 그의 재능, 성격, 평가 등을 술회한 아이작슨과의 인터뷰 일문일답.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후 왜 이렇게 왜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기를 끈다고 생각하나.

▲잡스는 아주 감성적인(emotional) 사람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과 감성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전 세계인들은 그가 만든
아이폰, 아이팟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그토록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제품들을 만들어낸 주인공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영국 팝 그룹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1940-1980)이 세상을 떠났을 때와 같은 분위기이다. 내가 존 레넌이 죽었을 때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잡스가 왜 당신을 자신의 전기 작가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언론인이라는 점 때문에 부탁했다고 했다. 벤저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헨리 키신저 등에 대한 전기를 쓴 적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또 그들로부터 얘기를 이끌어내는데 능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의 전기가 객관적인 책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는지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전기를 순수 역사학자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프랭클린, 아인슈타인 전기를 쓴 당신에게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한 게 자신을 그들과 같은 반열로 스스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2004년에 잡스가 나한테 처음 전기를 써 줄 것을 제안했을 때 반농담 식으로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때는 잡스는 훨씬 젊은데다 인생의 오르막내리막을 경험하는 시기였고 나는 그의 암 투병 사실을 몰랐다. 그때 나는 "당신의 전기를 쓰는데 관심이 많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신이 은퇴한 이후 20∼30년 뒤쯤에 생각해보자"며 거절했다.

그러다 2009년에 잡스의 아내인 로런 파월이 '스티브가 암과 싸우고 있다'며 그의 전기를 쓸 것을 다시 제안했다. 그때는 수락했다. 잡스는 프랭클린과 같이 아주 독창적이고 경이로운 인성을 소유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잡스가 자신의 전기에 대해 요구한 것은 없었는가.

▲전혀 없었다. 어떤 내용은 들어가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든지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나에게 준 지침은 책의 겉표지이다. 한국어판 표지도 똑같은 것이다. 그 책 표지 디자인은 그가 직접 제시한 것이다. 책 표지가 사진이어야 하고 단순하게 가기를 원했다.

--잡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전기를 읽어보았는가.

▲그는 출판되기 전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원고도 보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전기 집필이 끝날 무렵 그 내용을 말해줬을 때 아주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잡스는 중요한 순간에 자주 눈물을 흘린 것으로 나와 있는데 어떤 정서인가.

▲그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을 흘리곤 했다. 때때로 얘기를 하던 중 그를 쳐다보면 뺨에 눈물을 흐르는 것을 보곤 했다.

--잡스 없는 애플이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잡스 체제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애플을 경영하면 향후 5~10년 동안은 애플이 존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애플을 이끌어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훌륭한 예술적 재능과 대단한 기술적 역량을 갖고 있다.

--전기에서 잡스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돼 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어떻게 애플이라는 조직의 리더, 경영자가 될 수 있었는가.

▲훌륭한 경영자가 되려면 괴팍한 성격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경영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잡스의 뒤를 이어 현재 애플의 최고경영자를 맡은 팀 쿡은 매우 침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전혀 괴팍하지 않다. 반면 잡스는 괴팍하면서도 매우 감성적이며 또 예술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훌륭한 경영자이다. 훌륭한 경영자가 되는데 하나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잡스의 성격 중 하나로 묘사된 반사회적(counter-culture)인 성향은 애플의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의 반사회적 성향은 잡스를 매우 흥미롭게 하는 한 요소이다. 잡스는 히피이기도 했다. 잡스는 1960년대 말의
반체제 운동, 히피 운동과 실리콘밸리의 공학, 기술 운동을 하나로 합치려 했고, 그것이 바로 애플 조직의 정수(essence)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삼성과 삼성의 기술에 대한 잡스의 생각은 어떠했나.

▲잡스는 삼성을 높이 평가했고, 삼성은 애플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반면 구글의
안드로이드폰은 애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생각했다.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말은 세 차례 반복한 '오 와우'(Oh Wow)라고 한다. 무슨 의미라고 추정하나.

▲그것의 의미는 누구도 추정할 수 없다. 잡스는 종종 '삶은 거대한 미스터리'라고 말하곤 했다. 잡스의 삶 중 일부도 거대한 미스터리이다.

--잡스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특히 조직의 보스으로서도 통상적인 모델은 아니다. 그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그는 보스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모델은 아니다. 모든 이는 모든 다른 유형의 인간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잡스는
빌 게이츠를 평가절하하곤 했다는데 그에 대한 생각은.

▲잡스와 게이츠는 아주 강한 친분 관계를 유지해왔다. 경쟁하는 사이인 동시에 존경하는 사이였다. 1970년대 중반에 만나 35년 이상 지속했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잡스가 죽기 2개월 전이다. 게이츠가 잡스를 찾았다.

잡스가 더욱 예술적이고 열정적이며 미학적 취향을 가졌다면, 게이츠는 비즈니스 지향적 인물이었다. 잡스는 게이츠를 존경했다.

--잡스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많은데 누가 가장 영향을 많이 끼쳤나.

▲아내 로런 파월이다. 그녀는 잡스의 낭만적이고 반사회적이며, 감각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 비즈니스적 성향을 뒷받침했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적극적 성향의 로런은 잡스의 낭만적인 성향과 사업가적인 성향 양 측면의 성격을 통합시킨 사람이다.

--잡스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모든 사람은 잡스를 모순 덩어리, 복잡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잡스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나도 잡스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의 모든 것을 증오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잡스를 왜 천재로 규정하나.

▲천재는 창의적이어야 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잡스는 창의성과 예술성을 기술과 결합한 인물이다.

천재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쳐야 하며, 또 자신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99%의 노력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잡스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후회하는 대목이 있다면.

▲그가 후회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젊은 시절 여자친구(크리스앤 브레넌)의 임신과 그녀게서 태어난 딸(리사)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정말 후회한다고 말했다.

월터 아이작슨 "잡스, 원고 안 읽었고 방향도 제시 안해"

한국일보 | 입력 2011.11.09 17:43 | 수정 2011.11.09 20:31

잡스 전기 작가 아이작슨 "객관적인 책 원했기에 나도 정직하게 기록"
"아내가 가장 큰 영향 줘, 파트너로 생각한 삼성 구글로 가자 몹시 화내"

베스트셀러 <
스티브 잡스 > 작가 아이작슨 인터뷰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 < 스티브 잡스 > 를 쓴 월터 아이작슨(59)은 지난달 5일 숨진 잡스를 "세상을 변화시킨 천재이며 피카소, 아인슈타인처럼 다르게 생각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유명 언론인이자 전기작가인 아이작슨은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워싱턴의
비정부기구 아스펜재단에서 8일(현지시간)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잡스와의 인연 등을 1시간에 걸쳐 자세히 털어놨다.

그는 "모든 게 잡스의 선택이었다"고 했다. 잡스는 2004년 자신을 다룬 책들이 진실과 거리가 있자 전기작가로 유명세를 타던 아이작슨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시
벤저민 프랭클린에 이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전기를 쓰고 있던 아이작슨은 "당신은 전기를 쓰기에 너무 젊다"며 "20~30년 뒤 은퇴하면 생각해보자"며 거절했다. 그때 잡스는 "'프랭클린과 아인슈타인 다음에 내가 놓일 수 있느냐'는 반농담을 했다"고 아이작슨은 회고했다.

두 사람의 재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009년 잡스의 부인 로런 파월(47)이 잡스가 췌장암에 걸린 사실을 알려오면서 그에 대한 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월터는 이를 위해 40번 넘게 잡스를 인터뷰했고, 한밤 중에는 전화로 취재했다.

잡스는 그러나 생전 자신의 전기에 대한 원고를 보지 않았고, 책의 방향도 제시하지 않았다. 아이작슨은 "잡스는 객관적인 책이 되길 바랐고, 나도 정직하게 기록했다"며 "다만 책 표지 디자인은 잡스의 작품"이라고 했다.

아이작슨은 잡스 사후의 열풍에 대해 "잡스가 세상에 남긴 감성적 연결고리 때문"이라고 했다. 비틀스의 존 레넌이 숨졌을 때 사람들이 노래로 그와 연결됐듯 잡스의
아이폰, 아이팟으로 그와 감성적 유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작슨은 잡스가 마지막 순간 유언처럼 세 번 반복한 '오, 와우'의 뜻을 "마지막 순간의 아름다운 감정을 비유한 것, 세상 사람들에게 안녕 인사를 한 것, 또는 삶은 미스터리란 뜻이 담겨 있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아이작슨은 "그는 성격이 괴팍하다"며 "하지만 감성적이고 예술적이며,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또 "1960년대 히피 문화에서 비롯된 그의 반사회적 성향이 독창성을 이끌어냈고, 지금은 애플의 핵심 정신이 됐다"고 분석했다.

아이작슨은 부인 로런을 잡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로 꼽았다. "로런 덕분에 잡스의 모순적인 성향과 생활들이 하나로 묶어지고 지탱됐다"고 했다.

그는 "잡스가 삼성을 매우 존중했고, 좋은 파트너로 생각했다"면서 "그러나 삼성이 구글의
안드로이드 진영으로 가자 몹시 화를 냈다"고 전했다.



스티브 잡스 전기 쓴 월터 아이작슨 “잡스, 삼성 높이 평가하면서도 증오”

국민일보 | 입력 2011.11.09 19:14 | 수정 2011.11.09 21:20

'파트너로서 존경, 경쟁자로서 증오.'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삼성에 대해 이 같은 애증을 갖고 있었다. 그의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은 삼성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잡스의 공식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59)은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자신의 사무실에서 국민일보를 비롯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설명했다.

잡스는 그에게 전기 집필을 부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각도 담아 객관적으로 써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천재 잡스가 있기까지는 "절대적으로 아내의 힘이 컸다"고 평가했다.

아이작슨은 1984년 시사주간지 타임의 기자 시절부터 잡스와 인연을 맺었다. 2009년 전기 집필을 시작한 이래 50차례 가까이 잡스를 인터뷰했고, 100여명의 주변 인사를 만났다. 그는 타임 편집장과 CNN 최고경영자를 거쳐 현재
아스펜 연구소 회장 겸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사망한 잡스가 사람들로부터 왜 이렇게 많이 인기를 끈다고 생각하나.

"그는 아주 감성적이며, 세상 사람들과 감성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그가 만든
아이폰, 아이팟을 즐기면서 그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비틀스 멤버였던 존 레넌이 세상을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다. 내가 레넌이 숨졌을 때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그가 자신의 전기에 요구한 것은 있는가.

"단 하나, 지금의 책표지 외에는 없다. 단순한 디자인은 그가 직접 제시한 것이다. 원고도 보지 않았다. 다만 집필이 끝날 무렵 내용을 말해줬더니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잡스 없이 애플이 잘 해나갈 수 있나.

"잡스 체제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애플을 경영하면 5∼10년 동안은 잡스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팀 쿡이나 조니 아이브 등 자신이 사망한 이후 후계팀을 생각해놓은 것 같다."

-그의 성격으로 묘사되는 반문화적(counter-culture) 성향은 애플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잡스는 히피였다. 그는 60년의
반체제 운동, 히피 운동과 실리콘밸리의 공학을 하나로 합치려 했다. 그것은 애플 조직의 정수(essence)라 할 수 있다."

-잡스가 한국의 삼성과 삼성 기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삼성을 높이 평가했고, 동반자로 생각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폰은 애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삼성 등 휴대전화 회사들도 한편으로는 싫어했다. 파트너로서 삼성에 무한한 존경심을 가졌지만,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삼성 휴대전화가 나왔을 때 아주 싫은 라이벌로 간주한 것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계속 (삼성 등) 경쟁자들과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세 차례 반복했다는 '오, 와우(Oh, Wow)'는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누구도 알 수 없다. 잡스는 종종 '삶은 거대한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그의 삶 일부도 거대한 미스터리다."

-잡스가 왜
빌 게이츠를 평가절하했다고 생각하나.

"70년 중반에 만난 두 사람은 강한 친분관계를 계속 유지해 왔다. 서로 경쟁하며 존경하는 사이였다. 잡스가 예술적이고 열정적이며 미학적 취미를 가졌다면, 게이츠는 비즈니스 지향적 인물이었다."

-누가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는가.

"절대적으로 아내 로런 파월이다. 그의 낭만적이고 반사회적이며 감각적이고 과학적인, 그리고 비즈니스적인 모든 성향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게 없었더라면 오늘의 잡스가 있을 수 없었다."

-부(富)에 대한 철학이 있나.

"잡스는 돈에 관해서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그가 대학에 실패하고 인도를 여행했던 젊은 시절, 몹시 가난했다. 거부가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늘 돈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벌더라도 대궐 같은 큰 집을 갖거나 집 주변에 담장을 쌓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의 집은 동네 평범한 모퉁이 집에 불과했다. 잡스는 늘 돈과 물질에 집착하면 인생이 망가진다고 말했다."

-잡스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한 대목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젊은 시절 여자친구(크리스앤 브레넌)의 임신과 그녀에게 태어난 딸(리사) 문제에 대처했던 방식은 정말 후회한다고 말했다."



엘리엇 前 애플 수석부사장 "애플, 다음 혁신목표는 TV"

한국경제 | 입력 2011.11.09 18:32

애플 ,5년간 성과 이어갈 것…삼성전자 기술력 높이 평가

"애플의 다음 혁신 목표는 TV가 될 것입니다. 하드웨어 각각이 아니라 '스크린' 그 자체를 지배하는 방향으로 업계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애플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가 '나의 왼팔'이라 칭했던 제이 엘리엇 애플 전 수석부사장(69 · 사진)은 9일 오전 서울 코엑스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청 조찬 강연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1980년 인텔에서 일하고 있는 엘리엇은 잡스의 권유로 애플로 옮겨와 1986년까지 인사 및 운영 담당 부사장을 지냈다. 이후 다양한 소프트웨어 전문 업체에서 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소프트웨어 벤처기업 누벨을 경영하고 있다.

엘리엇은 이날 강연에서 줄곧 소프트웨어와 브랜드를 포함한 전체적인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기업의 창조성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등이 모두 결합돼 나타난다"며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경쟁력도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그 안의 소프트웨어와 각각의 제품들이 결합된 시스템에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폰4S'에 적용된 음성 인식 기술에 대해서는 "20년 동안 애플이 목표로 해왔던 것이 이제야 실현된 것"이라고 평했다.

엘리엇은 삼성전자의 경쟁력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삼성전자의 기술력은 굉장하다"며 "내 집만 해도 예전에는 소니 일색이었지만 이제 모두 삼성전자 제품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의 특허 전쟁에 대한 질문에는 즉답을 피하면서도 "잡스가 지난해 출시된 삼성전자 스마트폰 '
갤럭시S'를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전했다. "지나치게 아이폰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한국 기업에 대해서는 "지난해 한국의 여러 정보기술(IT) 기업들을 방문했는데 재능과 열의를 겸비한 젊은이들이 많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도 "하지만 이들 인재가 지나친 수직적 위계 질서 때문에 창의성을 꽃피지 못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애플의 미래는 낙관적이라고 했다. "잡스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도 팀 쿡 현 최고경영자(CEO)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팀을 운영했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5년 정도는 지금의 성과를 계속 이어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엘리엇 前애플 수석부사장 "모든 IT제품은 TV로 종결될 것"

매일경제 | 입력 2011.11.09 17:17

"해병이 아닌 해적이 돼라." 지난달 5일(현지시간) 타계한 스티브 잡스. 그가 아이팟ㆍ아이폰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무엇보다도 자유로움을 추구했기 때문이며 또 잡스가 구상했던 마지막 완성형 기기는 바로 TV인 것으로 드러났다.

9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전경련 부설 국제경영원(IMI)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제이 엘리엇 전 애플 수석부사장은 "애플은 항상 생각하고 열린 소통을 하는 사람들을 원했다"며 "잡스는 일사불란함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아이디어를 내놓는 '해적'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레스토랑"이라며 "IBM을 떠나 인텔에 몸담고 있었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잡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곧 그가 내게 입사를 권유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나는 잡스가 누군지도 몰랐고 애플도 몰랐다"며 "인텔에 다니고 있는 내 월급을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흔쾌히 '물론'이라고 대답했다"고 덧붙였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사람의 가치를 파악하고 빠르게 결정하는 잡스의 과단성이 인상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 예로 그는 '마우스'를 들었다.

그는 "제록스 파크에 잡스와 같이 견학을 갔을 때 제록스의 차세대 제품 중 잡스가 유난히 관심을 가진 게 있었는데 바로 마우스였다"며 "제록스는 훌륭한 기술을 개발하고도 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지만 잡스는 이것이 컴퓨터를 더욱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임을 간파하고 매킨토시에서 최초로 상용화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엘리엇 전 부사장은 잡스의 제품 철학은 항상 '쓰기 쉬움'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잡스는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이 헨리 포드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포드가 단지 대량생산(포디즘)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마음에 들고 사용하기에 좋은 차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팟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음악을 좋아하던 그가 소니를 방문한 뒤 우리도
워크맨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시작됐다"며 "처음 것은 너무 커 잡스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어항에 던져 넣기도 했다"고 말했다.

결국 잡스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고 사용하기 편한 애플의 워크맨이 바로 '아이팟'이라는 것이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이렇게 사용자 편의성을 추구한 잡스의 최종 구상품은 바로 TV라고 언급했다. 그는 "잡스는 TV까지 보여주지 못했지만 모든 것은 스크린으로 종결될 것"이라며 "컴퓨터보다 TV가 훨씬 쉽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잡스가 비사회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잡스는 제품에 대한 열정으로 격분한 적도 종종 있었다"며 "특히 잡스가 삼성
스마트폰을 보고 '왜 내 제품을 모방했는가'하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잡스 이후의 애플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잡스가 팀 쿡을 중심으로 한 훌륭한 후임 팀을 만들고 떠나 3~5년 단기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쿡은 사려 깊고 일관성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 삼성과 애플의 법적 소송에 관해서는 "두 회사는 법적 소송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며 "물론 경쟁은 필요하지만 잘 해결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잡스 '왼팔' 엘리엇 "애플은 삼성 부품 없으면 안돼"

한국경제 | 입력 2011.11.09 17:17 | 수정 2011.11.09 17:18

제이 엘리엇 애플 전 수석 부사장이 특허전쟁과 별개로 애플이 삼성전자의 부품을 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전망했다.

그는
스티브 잡스 전 최고경영자(CEO)의 오랜 친구이자 애플에 재직할 당시 잡스의 '왼팔'(잡스는 왼손잡이였다)로 불렸을 만큼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인물이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9일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테크플러스포럼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애플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제품의 품질"이라며 "삼성이나 LG 등 한국 기업의 부품은 최고의 품질로 인정 받아왔기 때문에 당장 부품처를 다변화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애플 아이폰에 쓰이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칩은 그동안 삼성전자가 독점으로 공급해왔다. 모바일 AP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에 들어가는 시스템 반도체로 PC로 치면 두뇌격인 중앙처리장치(CPU)에 해당한다.

업계에서는 그러나 애플과 삼성전자가 전 세계에서 특허전쟁을 벌이면서
아이폰5에 들어가게 될 A6칩은 삼성전자가 아닌 대만의 TSMC 등에서 공급할 것이라는 관측이 높았다.

이에 대해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또한 "2012년까지의 부품 공급에 대해서는 애플과 이미 얘기를 끝냈고, 2013~2014년 이후 공급에 대해서도 팀 쿡 CEO와 논의했다"고 언급해 부품거래가 이어질 것을 시사했다.

결국 양사 모두 소송은 소송,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는 양면 전략을 펼치겠다다는 전략이라고 업계는 보고 있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또 애플이 당초 '특허'에 대해서는 크게 대비하지 않다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경쟁사들이 너무나 빠르게 애플을 이용하는 것을 보고 특허 중요성을 인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애플은 삼성전자와의 특허전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다만 앞으로는 애플도 특허에 보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직 일에만 몰두했던 잡스 돈 집착, 삶 파괴한다 말해”

한겨레 | 입력 2011.11.09 21:11

스티브 잡스 전기작가 아이작슨 인터뷰


윤회 믿어 죽음 담담히 수용


삼성 '동반자' 구글 '적' 평가

"잡스는 1960년대 말의 반체제·히피 운동과 실리콘밸리의 공학·기술 운동을 합하려 했고, 그것이 바로 애플 조직의 본질이다."

지난달 5일 숨진 애플의 공동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59·사진)은 8일 미국 워싱턴서 가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잡스의 반사회적인 성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작슨은 "잡스는 울타리도 없는 작은 집에 살았고, 매일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을 정도로 평범한 생활을 했다"며 "잡스는 '돈과 물질에 대해 너무 많이 고민하면 삶이 파괴될 수 있다'며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고 말했다. 불교신자로 윤회를 믿는 잡스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도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잡스는 삼성에 대해선 '애플의 동반자'로 높이 평가한 반면, 구글에 대해선
안드로이드폰이 애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생각해 매우 싫어했다고 그는 전했다. 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에 대해선 "경쟁자인 동시에 존경하는 사이로 애증 관계였다"며 "죽기 두 달 전, 게이츠가 잡스를 찾아 추억을 나눴다"고 말했다.

잡스는 정치에는 거의 문외한이었지만 "버락 오바마와 민주당을 지지해 오바마를 위한 광고를 만들려고도 했고, 한때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2004년에 잡스가 처음으로 전기를 써줄 것을 제안했으나, 그때 잡스는 젊었으므로 '20~30년 뒤, 당신이 은퇴한 이후에 보자'며 거절했다. 그러다 2009년 잡스의 아내인 로런 파월이 '스티브가 암과 싸우고 있다'며 다시 제안해 수락했다"고 말했다.

잡스는 모든 걸 솔직하게 써달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요구도 없었으며, 표지 디자인은 잡스가 직접 제시한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벤자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헨리 키신저 등의 전기 작가로도 유명한 아이작슨은 1984년 시사주간 < 타임 > 기자 시절부터 잡스를 알게 돼 전기를 쓰는 인연을 맺었으며, < 타임 > 편집장과 < 시엔엔 > (CNN) 최고경영자(CEO)를 거쳐 현재 아스펜연구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