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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스스로 일어서려고 할 때 사회가 도와줬으면…` (조선일보 2010.10.30 04:04)

[사다리를 세우자] "스스로 일어서려고 할 때 사회가 도와줬으면…"

[9·끝] 낙오된 사람들의 희망
"무작정 찔끔찔끔 돈만 주는건
지금처럼 살다 죽으란 얘기"
"일하려고 기술학원 다니는데
능력 있다며 지원 끊어서야…"

"없는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공부뿐이다. 무작정 찔끔찔끔 돈 주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저소득층이 학자금 통장에 20만원 모으면 정부가 '잘했다'고 5만원 보태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이경수씨·59세)

"거창한 대책만 능사가 아니다. 60~70대는 대부분 관절염이 있는데 건강보험이 안 돼 한달에 약값이 7만원 든다. 관절염 약만 보험이 돼도 일하기 수월할 것 같다."(황석호씨·75세)

본지가 지난 18일부터 연재한 '사다리를 세우자' 기획의 취지에 공감해 기꺼이 자기 얘기를 털어놓았던, '사다리에서 떨어진 우리 이웃'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① 남편이 암에 걸린 뒤 빈곤층으로 몰락한 강진희(이하 가명·39)씨, ② 퇴직 후 10년간 네 번 망해본 '창업 말리는 창업 컨설턴트' 연기홍(50)씨, ③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초등학생 손자를 키우는 이경수(59)씨, ④ 단칸방에서 혼자 월 35만원으로 살아가는 황석호(75)씨는 본지 난상토론을 통해 '이렇게 사다리를 복원해달라'는 바람을 쏟아냈다. 토론엔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 직원 박재경(54)씨가 전문가 자격으로 참여했다.

―애들 아빠가 급성 백혈병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긴급지원 제도'가 있다기에 알아봤더니, '전셋집에 살면 안 되고, 형제 간 재산이 얼마면 안 되고…' 하는 식으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다. 친정도 시부모님도 재산이 없는데 결혼한 시누이 재산이 8900만원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못 받았다. 담당 공무원이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도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러 갔다가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아들은 저 먹고살기도 버거운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병수발하고 남은 돈 2100만원을 탈탈 털어 전세 단칸방을 하나 마련했다. 그것도 내가 탈락한 이유 중 하나였다.

만화가 정철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전형적인 '빈곤 미끄럼틀'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중년 조기퇴직자의 창업이다. 여러 관청과 단체가 창업자를 지원하고 있지만, 대부분 돈 주는 프로그램이지 장사하는 요령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은 드물다. 창업자들은 퇴직금을 야금야금 생활비로 까먹을까 봐 '일단 창업부터 하고 보자'고 뛰어드는데, 십중팔구 망해서 가난해진다. 나도 그 과정을 겪었다.

―노인이 전부 정부에 의존할 수는 없다. 본인이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 다만 정부도 좀 거들어주면 고맙겠다. 나는 노령연금 9만원에 독거노인 지원금 6만원, 일해서 번 돈 20만원을 합쳐서 한달을 산다. 겨울철만이라도 난방비를 보조해주면 좋겠다.

―독거노인이 갑자기 편찮으셔도 복지관에 차가 없어 시내버스로 병원에 모셔야 한다. 도저히 버스 탈 상황이 아니면 내 호주머니를 털어서 택시로 모신다.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 콜택시처럼 독거노인을 위한 콜택시가 생기거나 복지관에 상주 차량이 생기면 좋겠다.

―남편을 간병할 때, 같은 병원에 있던 20대 백혈병 환자가 "엄마, 죽기 전에 소원인데 골수이식 한번 받아봤으면 좋겠어" 했다. 환자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딸들이 시집가려고 모아놓은 저축까지 전부 털어 넣었다. 열흘간 3000만원이 들어갔다. 필리핀 여자와 결혼한 가난한 신랑이 "어차피 치료비도 없는데 먹지 말라는 것 다 먹고 죽겠다"며 입원실에서 짬뽕과 오징어젓갈을 마구 먹었다. 부인은 한국말을 모르니 상황도 모르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 남자가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이런 사람들에게 정부 도움이 절실하다.

―반면, 복지제도를 약삭빠르게 악용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남편과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가 "PC방 하는 며느리가 가게 명의를 포함해 모든 재산을 딴 사람에게 옮겨놓은 덕분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됐다"고 했다. 이런 사람이 빼먹으니까 정말 필요한 사람은 혜택을 못 받는다.

―아는 사람이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보증금을 마련했는데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사망했다. 관리소에서 유족들에게 "세대주가 사망했으니 집을 비우라"고 했다. 유족이 수중에 돈도 없는데…. '이렇게 불합리한 제도가 어디 있느냐'고 따졌더니 관리소는 "입주 대기자가 10만 가구나 돼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살지만 어떻게든 손자는 대학까지 보내고 싶다. 저소득층이 학자금을 저축하고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줘야지, 무작정 돈만 주는 것은 '지금처럼 살다 지금처럼 죽으라'는 말밖에 안 된다.

―창업도 그렇다. 정부가 돈 주는 제도만 자꾸 만드는데, 그러면 이용자들이 국가에 의존하게 된다. 창업 자금 지원받으러 오는 사람 중 상당수가 '당연히 주는 돈'인 줄 안다. 정부에서 기부금 주는 것도 아닌데….

―안 되는 가게를 뒤늦게 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문 열기 전에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파리 날리는 가게에 전문가가 찾아가서 가게 인테리어와 메뉴를 바꿔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 나온 곳치고 정말 회생한 가게는 별로 없었다. 요컨대 '재정 지원'에서 '교육 지원'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물론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골수이식을 받고 회복 중인 남편이 주민센터에 하루 몇 시간씩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기술강좌가 있느냐고 문의했다. 공무원이 "이제 일할 능력이 됐느냐? 학원을 다니려면 기초생활수급을 포기하라"고 했다. 내게는 주민센터 공무원 말이 "30만원짜리 학원 6개월 다니고 수급을 끊을래, 아무것도 배우지 말고 지금처럼 계속 정부 돈으로 연명할래?"로 들렸다. 완치 후에 살 길을 찾아주는 정책이 없으면 우리 가족은 계속 낙오자로 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