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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뉴스/세기의 사건사고

외국 정상에게 "Who are you" … 우리 대통령 실수에 혼쭐 (중앙일보 2014.07.12 00:24)

외국 정상에게 "Who are you" … 우리 대통령 실수에 혼쭐

정상회담 통역사들의 세계
눈에 안 띄려 늘 허리 숙여 새우등, 가까이 있다 보니 비상시엔 경호도
화장실 자주 갈까 봐 물도 안 마셔 … 기침 우려 감기 안 걸리게 신경
차베스, 돌연 단군신화 꺼내 쩔쩔
외모 준수하면 영부인 통역 많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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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풍경을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통령 바로 옆에서 서류 뭉치를 들고 대통령 말에 심각하게 귀 기울이는 사람, 정상회담 통역사들이다. 그들은 정상이 대화하는 모든 곳에 함께 있다. 조용하지만 막강한 정상회담 통역사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그들에게는 숨은 애환이 있었다.

 ◆오찬·만찬 통역 땐 바나나로 끼니 때워=

대통령의 통역사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영어·중국어와 같이 많은 사람이 배우는 언어는 경쟁자가 많기에 그만큼 최고급 인재가 되기도 쉽지 않다. 아랍어와 같은 언어는 일단 전문가가 되면 경쟁자는 적지만 언어뿐 아니라 문화권 자체가 큰 차이가 나는 까닭에 정상급 수준에 도달하는 길이 상당히 어렵다. 외교부 내에선 대화의 95% 이상을 완벽하게 통역해주면 최고급 인재로 통한다. 하지만 쟁쟁한 외국어 전문가가 모인 외교부에도 그런 인재는 손에 꼽을 정도다. 대통령 통역 담당은 언어별로 2~3명 정도를 정해 자주 바꾸지 않는 편이다. 외교부 자체 인력으로 대부분 충당하고 전공자가 적은 언어는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외부 인력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정상 통역을 하려면 언어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국민 정서와 현안, 한국과의 관계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 지난 3~4일 한·중 정상이 만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화제가 된 것처럼 때로는 그 나라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와 노래, 연예인 이름까지도 익혀야 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공부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정상 곁에서 통역을 하려면 때로는 경호 역할까지 맡아야 한다. 경호원이 있지만 정상회담 상황에서 대통령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통역인 까닭에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순간 대응이 필요하다고 한다.

 통역엔 육체적 고역도 따른다. 2007년 외교부에 들어와 베트남어 통역을 맡고 있는 임보라 개발협력과 외무행정관은 “정상이 만나면 하루 일정이 10개가 넘을 때도 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봐 물도 못 마시고, 오찬과 만찬 통역을 하면 밥도 못 먹고 바나나로 대충 차에서 때운다”며 “저는 키가 큰 편이라 VIP(대통령)보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항상 숙이다 보니 등이 굽어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순간에 기침을 해서 방해를 하면 안 되므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 하는 것도 정상 통역사의 기본이다.

 ◆돌발 발언에도 의연하게 대처해야=

정상회담이라고 해서 대통령의 발언이 늘 정제돼 나오는 건 아니다. 1993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영어 동시통역을 담당했던 김지명 한국문화유산교육연구원장이 전한 일화다.

 “미국 시애틀 인근 블레이크섬에서 열린 당시 회의 때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열정적인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각국 정상이 오찬을 한 자리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총리가 다음해 APEC 회의를 당초 약속된 11월이 아닌 10월에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추진하며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던 YS는 일정 바꾸는 걸 못마땅해했다. 오찬 뒤 오후 회의가 시작되자 YS가 예정에 없이 갑자기 발언권을 얻어 ‘국가 관계에는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일본을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대통령의 감정을 그대로 전하는 게 좋지 않겠다 싶어 순간적으로 ‘국가 간에는 상호 신뢰(mutual trust)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로 조금 누그러뜨려서 통역했다.”

 외국 정상도 사전에 예측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99년 10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이 방한해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다. 당시 스페인어 통역을 맡은 한원덕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청와대 만찬 직전 차베스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스페인어로 읊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비상이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로 시작하는, 누구나 아는 시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전체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장 주변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 측 고위 인사도 많은 상황에서 시를 잘못 통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내용을 알아내 준비를 했지만 차베스는 실제 만찬 때는 시는 읽지 않고 돌연 단군신화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환인·환웅·웅녀 등 한국 사람도 헷갈리는 얘기를 차베스가 하자 한 교수는 등에 식은땀이 났다고 한다. 한 교수는 “차베스 대통령이 단군신화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해 우리 민족을 ‘인내하는 민족’이라고 말하더라”며 “어떤 정상들은 한국 사람도 잘 모르는 한국의 역사와 예술작품을 미리 준비해와 말하는데, 그럴 때면 정말 당황스럽다”고 했다.

  통역사는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도 관리해야 한다. 가끔 친근함을 보이기 위해 직접 영어를 구사한 대통령이 엉뚱한 실수를 할 경우 이를 재빨리 수습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 전직 대통령은 외국 정상과 만나 첫 인사를 “How are you(안녕하세요)”라고 해야 하는 걸 실수로 “Who are you(누구세요)”라고 해서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때로는 빛나는 통역사가 되기도=

정상 통역사 중에는 준수한 외모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경우도 있다. 2003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았던 이여진 전 외교통상부 외무관도 그런 경우다. 그는 정상들 못지않게 ‘미모의 통역관’으로 화제가 됐고, 당시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는 “노 대통령의 영어 통역사가 누구냐”는 글이 상당수 올라왔었다. 그는 이후 미국 로스쿨에 진학해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효성그룹 오너의 아들과 결혼했다.

 정상 통역사를 고를 때 외모를 반드시 따지는 건 아니지만 준수한 외모는 때론 경쟁력이 된다고 한다. 과거 외교부 내에서 외모가 준수한 사람은 대통령 영부인(퍼스트레이디)의 통역 역할을 맡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조태용 외교부 제1차관도 과거 북미에서 근무할 때 이런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고 한다.

 정상 통역사 중엔 전설적인 인물도 적지 않다. 지난 5월 81세를 일기로 타계한 러시아의 통역가 빅토르 수호드레프가 대표적이다. 수호드레프는 59년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소련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부터 30여 년간 정상 통역을 맡았다. 냉전시대 미·소 양국 정상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수호드레프의 사망에 공식 성명을 내고 “소련과 미국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라며 “예민한 관찰력과 유머 감각, 따뜻함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2004년 작고한 러시아어 통역가 류학구씨도 통역사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90년 9월 한국과 옛 소련 간 수교를 전후한 시기 중요한 회담마다 통역을 맡았던 그는 90년 5월 노태우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 직전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고서도 내색 없이 통역을 매끄럽게 해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든 일화가 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노 전 대통령은 소련 측에 범인을 반드시 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사진 설명

지난 3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서 통역하고 있는 김지혜 외교부 서기관(가운데). 왼쪽은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5월 미국을 방문해 마이클 블룸버그 당시 뉴욕시장과 대화할 때 이여진 전 외교통상부 외무관(가운데)이 통역하는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어 동시통역을 담당했던 김지명 한국문화유산교육연구원장. 옛 소련의 전설적인 통역사 빅토르 수호드 레프(가운데·올해 5월 작고)가 1972년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왼쪽)과 닉슨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통역하는 모습. [중앙포토]

[S BOX] 철통 보안 의무 … 기밀 누설 중국 통역사 사형도

대통령의 통역사에겐 보안과 국익이라는 문제가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정상 간 대화 내용은 대개 1급 비밀에 해당하고, 그에 따라 엄격한 보안 준수 의무가 부과된다. 민감한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면 외교 문제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통역사의 부적절한 표현 하나가 엄청난 국익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스페인어 통역가인 한원덕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통역사가 기분 좋게 말을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국익이 달라질 수 있다”며 “정상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게 좋은지, 아니면 조금은 뉘앙스를 바꿔 전달하는 게 좋은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교류가 많지 않아 자국에서 통역사를 데려오지 않는 외국 정상들은 중요 의제를 다룰 때 한국 측 통역사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상회담은 아니지만 ‘숙연한 통역’이 필요할 때도 있다. 영어 통역사인 김지명 한국문화유산교육연구원장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때 영어 동시통역을 맡았다. 김 원장은 “장례 행사 용어와 관행을 연구하느라 1997년 영국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장례식 전체 동영상을 수없이 봤다”고 회고했다. 석 달 뒤인 8월 거행된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때는 두 번째 경험이라 통역이 한층 수월했다고 한다.

 해외에선 통역사의 비극적인 죽음도 있었다. 2005년과 2006년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통역을 맡았던 장류청(張留成) 전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남북한담당처장이 2010년 정상회담 기밀누설 혐의로 사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