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개조 첫 단추 '官피아'부터 수술하라]
낙하산 세 번은 타야 "복받았다" 부러워하는 공무원들
고위 공직자 출신 기관장의 고백
"버티느니 전관예우 받자…임기동안 일 없기 바랄 뿐
매년 후배들 눈치만"
해수부·국토부 관료 출신들이 업무를 독점해온 한국해운조합
“한직이라도 버텨볼 것이냐, 아니면 전관예우를 받을 것이냐는 선택입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부처를 떠난 한 퇴직관료의 말이다. 그는 관료 생활을 마감하는 시점을 판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했다.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에 따라 ‘인생 2막’의 수준과 질이 달라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조직을 위해 용퇴를 해달라는 후배들의 읍소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경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퇴직 후 이들의 관심은 전관예우 혜택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하고 늘릴 수 있느냐다. 산하기관이나 협회에서 3년짜리 자리 하나를 받은 뒤 임기가 끝나가면 후배들이 또 다른 자리를 알아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3곳의 기관장·임원 자리를 돈 사람들을 ‘셋-턴을 했다’고 표현하며 “복 받았다”고 부러워하는 것이 대한민국 관가의 풍경이다.
대부분의 부처는 산하기관이나 협회 등에 퇴직 관료들을 포진시켜 놨다.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2010년 1월~2013년 8월 기준 산하기관, 협회 등에 재취업해 있는 4급(서기관) 이상 퇴직 공무원은 모두 420명에 달했다. 국방부 출신 퇴직 공무원이 210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 46명, 국토교통부(옛 국토해양부) 42명, 외교부(옛 외교통상부) 24명, 안전행정부(옛 행정안전부) 19명, 농림축산식품부 17명, 기획재정부 16명 등의 순이었다. ‘모피아(기재부+마피아)’, ‘산피아(산업부+마피아)’, ‘국피아(국토부+마피아)’라고 조롱받는 까닭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업에 별 다른 관심이 없다. 국정감사 등 외부적으로 크게 주목받을 수 있는 이벤트를 제외하고는 있는 듯 마는 듯 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전직 공기업 출신의 한 퇴직 관료는 얼마 전 취재진을 만나 “사실 그럴듯한 명함 들고 다니며 아는 사람들한테 밥 좀 사고, 편하게 지내다 가겠다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며 “정부의 감시 아래 업무체계가 다 짜여 있는 상황에서 사장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드물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관료는 이 말을 받아 “관료출신 CEO가 일을 챙기기 시작하면 아랫사람들이 무척 불편해한다”며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는 눈초리까지 받을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이런 적폐들이 쌓여 대형사고가 일어난다. 지난해 원전가동 중단사태로 큰 물의를 빚었던 한국수력원자력의 경우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이 사장직을 맡기도 했지만 그들은 원자력업계 내 비리와 부패 고리로 오랫동안 군림해온 ‘원전마피아’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비리를 척결하겠다며 난리를 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적폐가 쌓여가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공무원들이 퇴직 후 오히려 협회를 더 선호한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협회 이직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지만 대형 공공기관에 비해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경우가 다반사다. 금융투자협회의 상근 부회장과 자율규제위원장 연봉은 각각 3억원대에 이른다.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정상화 방안을 세게 밀어붙이고 있어 공공기관과 협회의 연봉 격차는 더 커질 조짐이다.
‘낙하산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공무원들은 퇴직 관료의 전문성과 업계 자율성에 따른 이직이라고 해명한다. 김현태 전 대한석탄공사 사장이 한국석유화학협회 부회장으로 내정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를 곧이 믿는 업계 관계자는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