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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뉴스/세기의 사건사고

비극 부른 선원·해운사·감독청·구조기관 이 중 누구 하나라도 정신 차렸다면… (한겨레 2014.04.23 00:56)

비극 부른 선원·해운사·감독청·구조기관 이 중 누구 하나라도 정신 차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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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차가운 바닷속으로 그들이 가라앉은 지 1주일이 지났다. 실종자 가족들, 아니 이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서 ‘희망’이라는 두 글자도 서서히 침몰해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들을 보면, 사고는 필연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린 목숨들을 깜깜한 바닷속으로 밀어넣은 낡은 배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1분, 1초가 생사를 가른 현장에서 책임과 윤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모든 과정의 어느 한 군데에서라도 시스템이 정상 작동을 했거나, 누구 하나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이런 ‘후진국형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부실에 부실이 이어지고, 최악이 최악을 부르면서 애꿎은 생명들이 속절없이 희생됐다. 이번 사고를 낳고 키운 원인을 조목조목 짚어본다.

①해운사 선박 구입부터 운항까지 총체적 문제

“2~3배까지 과적 운행”
인명 안전훈련도 외면

세월호의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여러 면에서 선사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특히 침몰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과적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201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뤄진 선박 개조로 복원력을 유지하며 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 적재량이 대폭 줄었는데도, 세월호는 오히려 2~3배의 화물을 실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영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한국선급에서 제출받아 22일 공개한 ‘세월호 선박 복원성 검사 결과’를 보면, 세월호가 감당할 수 있는 화물의 양은 애초 2437t이었지만, 개조 뒤 987t으로 대폭 줄었다. 배의 무게중심이 기존 11.27m에서 11.78m로 51㎝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무게중심이 높아지면 회전할 때 기울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복원력이 떨어져 더 많은 양의 평형수(1023t→2030t)가 필요하다. 개조 결과 세월호는 차량과 컨테이너, 기타 화물을 더해 987t 이상 실을 수 없는 배가 된 것이다. 화물 무게에 승객과 평형수, 연료, 식음료 등을 포함해 세월호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총량인 ‘재화중량톤수’는 3963t으로 확인됐다.

세월호의 화물 선적을 담당한 업체인 ㅇ통운은 “화물 적재기준은 3963t이며, 당시 세월호에는 3608t의 차량과 컨테이너, 기타 화물이 실려 있었다”고 밝혔다. ‘재화중량톤수’를 ‘화물의 기준’으로 놓고 그만큼 화물을 실었다면 세월호에는 기준보다 3배 이상 많은 짐이 실린 것이고, 이런 설명은 거짓말이 된다.

선사와 ㅇ통운이 밝힌 3608t이라는 무게가 승객과 평형수 무게 등을 모두 합친 것(재화중량톤수)이라고 가정해도, 987t의 기준을 놓고 보면 화물 무게만 약 2000t에 달한다는 것이 김영록 의원의 추정이다. 김 의원은 “결국 세월호는 2~3배까지 과적 운항을 하다 침몰한 것이다. 짐을 더 실으려고 평형수 양을 줄였을 가능성도 있다. 수사로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애초 청해진해운이 18년 된 노후 선박을 매입한 것부터가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1994년 일본에서 취항한 선박을 2012년 청해진해운이 사들여 세월호로 만들었다. 정부는 2009년 해운법을 고쳐 선박을 25년 쓴 뒤에도 매년 검사를 받으면 5년 더 운항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해운조합의 2013년 <연안해운통계연보>를 보면, 2008년 말 연안여객선 166척 가운데 선령이 20년 이상인 선박은 12척(7.2%)에 불과했지만 5년 만에 55척 늘었다.

청해진해운은 안전교육도 외면했다.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에는 인명 안전 훈련을 10일마다 모든 선원을 대상으로 시행하게 돼 있고, 사고 대응 훈련도 6개월마다 진행하는 게 원칙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일부 선원들은 안전교육을 아예 받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②항만청·해경·한국선급 엉터리 선박검사 등 관리감독 부실

안전검사 ‘합격’ 6일뒤 ‘불량’ 지적
기상악화 상황서도 출항 허락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운항은 관리·감독 기관들의 부실과 맞물리며 더 큰 부실로 이어졌다. 선박의 안전을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지방해양항만청, 선박 안전 검사 대행기관인 한국선급, 이들의 업무를 감독하는 해양경찰의 부실한 안전 관리가 빚어낸 ‘삼각파도’가 세월호를 집어삼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선급은 지난해 세월호가 객실을 증설할 때 설계도면 검사, 선박 복원성 검사, 선상 경사도 시험 등을 했다.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다. 올해 2월 실시한 세월호 정기 안전점검에서도 대부분 ‘양호’ 판정을 내렸다. 특히 침몰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선박 복원성(기울어진 배가 원상태를 회복하는 힘)과 화물 고정장치, 사고 당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인명 피해를 키운 구명벌(구명보트) 항목에서 모두 ‘합격’ 도장을 찍어줬다. 하지만 6일 뒤 해경이 다시 실시한 특별점검에서는 한국선급에서 합격 판정한 침수 방지용 수밀문과 비상조명 작동 등 5개 점검 항목에서 불량이 드러났다. 애초 선박 안전 검사가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리 가능성도 의심해 봄직하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은 지난해 3월 한국선급의 안전진단을 통과한 세월호에 해상여객운송사업 면허를 발급했다. 사고 전날인 15일 인천항 출항 당시에는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시정주의보를 해제했다. 인천기상대의 관측을 보면, 이날 밤 9시 인천항의 가시거리는 800m에 불과했다. 해사안전법 시행령 등을 보면 가시거리가 1㎞ 아래로 떨어지면 여객선은 출항할 수 없다. 하지만 인천해양항만청은 항만청 소속 해상교통관제센터의 관측을 토대로 가시거리가 1.8㎞에 이른다고 판단해 저녁 8시35분에 시정주의보를 해제했다. 인천해경 상황실은 인천해양항만청의 판단을 근거로 출항을 허가했다. 이날 밤 안개 때문에 모든 배가 출항을 포기했는데도 세월호만이 유일하게 인천항을 떠났다.

해운법에 따라 승객과 화물 적재 등 안전 관리를 총괄해야 하는 해경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해경은 중요한 안전 관리 업무를 한국해운조합 운항관리실에 위탁 운영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해운조합이 2100여개 선사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익단체’라는 점이다. 여객선의 안전 운항 관리를 선사들이 낸 회비로 운영되는 해운조합에 맡긴 탓에 애초부터 깐깐한 안전 관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사고 전날 세월호 출항보고서에 기재되지 않은 차량 32대, 승선자 명단에 없는 사망자가 발견된 것도 이런 부실한 출항 관리에서 비롯됐다.

앞서 청해진해운은 인천해경 특별점검에서 드러난 불량 사항에 대해 불과 1주일 만에 ‘시정 공문’을 보냈다. 시정 공문은 한국해운조합을 통해 해경에 전달됐다. 하지만 한국해운조합도, 한국선급도 시정을 마쳤다는 공문만 접수했을 뿐 실제 시정이 됐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해경도 얼마 뒤 문제점을 고쳤다는 청해진해운의 보고를 받았지만 현장 실사는 하지 않았다. 격실의 침수를 막는 수밀문을 수리하지 않은 채 사고가 난 것이라면, 이것도 피해가 불어난 원인이 됐을 수 있다.

 


③선장·선원들 승객 버리고 먼저 탈출 ‘파렴치’

전용통로 이용 ‘선박직’ 전원 생존
수사과정서 서로 책임 떠넘기기도

승객 476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16일 오전 9시50분께 세월호의 이준석(69·구속) 선장은 가장 먼저 도착한 구조선 해경 123정에 올랐다.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승객 수백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선장이라곤 믿기지 않는 행태였다. 선원법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선장은 인명, 선박, 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선장만이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항해사, 기관사 등 이른바 ‘선박직’ 선원들은 승객들을 내버려둔 채 자기들만 아는 전용 통로로 탈출하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였다. 기관장 박아무개(48)씨는 배가 기울자 승객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한 통로를 이용해 기관실 선원들과 3층에서 만났고, 그대로 탈출했다고 수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선내 방송으로 승객들에게 피하지 말고 안전한 선실에만 있으라고 해놓고 선원들은 자기들끼리만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배를 빠져나간 것이다.

이들은 또 수사 과정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진술을 해 실종자 가족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안내 담당 선원은 “선장으로부터 대피 안내방송을 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고, 다른 이는 “대피명령을 내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실제 방송을 통해 대피명령이 승객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 조타수 등 배 구조를 가장 잘 아는 선박직 선원 15명은 전원 생존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승객들의 탈출을 돕던 박지영씨 등 사무직·영업직 직원들은 이들과 달리 미처 대피하지 못해 숨지고 말았다. 승객과 선박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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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중대본·해경·해군 초기대응 미숙…수습 과정도 난맥상

해경, 119서 사고 위치 전달받고도
신고 학생에 “배 경도 말해달라”
안행부 장관은 사고 보고받고도
졸업식 기념사진 찍으러 가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16일 오전, 탑승객 구조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이때 현장의 해양경찰과 재난방재의 지휘부가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반복하며 초기 대응 미숙으로 ‘골든타임’을 날려버렸다. 골든타임은 응급환자가 목숨을 건질 최소한의 시간을 뜻하는데, 해난사고에서는 배가 물속에 가라앉기 전 생존자를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을 골든타임으로 본다.

해양경찰은 오전 8시58분께 처음 신고를 받았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6분 빠른 8시52분께 세월호에 탄 한 학생이 신고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급하게 “배가 침몰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학생에게 해경은 “배의 위치, 경도(경도와 위도)를 말해 주세요”라고 물었다. 학생이 배의 위치와 경도를 알 수 없는데다 신고를 받은 전남 119 상황실이 해경 쪽에 전달하면서 이미 학생 휴대전화의 위치가 전남 진도 조도면 서거차도 주변이라는 점을 알린 뒤의 일이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의 지휘부도 상황을 오판해 자리를 비우는 등 초기 구조 시간을 흘려보냈다. 사고 초기에 잠수요원들을 보내 세월호가 가라앉기 전에 선체 내부의 승객들을 구조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이날 오전 중대본의 본부장인 강병규 안전행정부(안행부) 장관은 충남 아산의 경찰교육원을 찾아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다. 강 장관이 사고 발생 보고를 받은 것은 오전 9시25분. 그는 이어 9시39분 중대본을 구성하라고 지시한 뒤 10시37분 아산에서 졸업식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관이 없는 동안 중대본을 책임지고 있던 이경옥 안행부 2차관은 오전에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며 구조자 수를 368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오후께 중복 집계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해 164명으로 정정 발표했다.

해군 구조함은 선체가 완전히 전복된 이후인 17일 새벽에야 도착했다. 정부가 공개했던 세월호 승선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외국인 주검이 발견되고,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 주검 신원이 바뀌는 일이 두 차례나 벌어지는 등 사고 수습 과정에서도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처음입니다 기자가 된 걸 후회했습니다

 (중앙일보 2014.04.23 02:18)

청춘리포트 … '세월호' 현장을 가다
120시간의 취재수첩

 

세월호 참사 현장은 취재수첩 몇 권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치열했다. 급박한 사고 소식이 수첩 속에 꼼꼼하게 기록됐다. 진도에서 세월호 침몰 현장을 취재한 이유정 기자가 수첩에 세월호 구조를 그려놓았다.

지난 16일은 청춘리포트의 편집회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예고한 대로 우리는 ‘대학생의 성(性)’을 테마로 다음 장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전 상상도 못했던 대형 참사가 터졌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말입니다. 우리 팀 기자들은 당장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언제나 치열한 취재 현장은 20~30대 젊은 기자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고에서 기성세대는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했습니다. 60대 후반의 선장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고, 대개가 50~60대인 정부 관료들은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쪽에선 20대 여성 승무원과 30대 교사가 학생들을 먼저 구하려다 죽어갔습니다. 청춘리포트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2030 기자들의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120시간. 이번 참사를 바라보는 청춘세대의 시각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16일 23:50,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잠수부가 칠흑의 바다 헤맬 때 상황실 문틈에선 치킨 냄새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는 초기 지휘부였다. 나는 사고 첫날부터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에서 중대본을 취재했다. 중대본의 처음 닷새는 한마디로 ‘우왕좌왕’이었다.

 특히 사고 당일(16일)은 무능한 정부를 제대로 체험한 날이었다. 오후 9시가 다 됐을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갈팡질팡하던 중대본 관계자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탑승자 462명, 사망자 4명, 구조자 174명, 실종자 284명. 이게 확실한 수치입니다.”

 드디어 중대본이 제대로 돌아가는구나. 나는 안도했다. 그런데 오후 11시43분쯤 인천 청해진해운에 나가 있는 동기 이서준 기자가 “해양경찰과 청해진해운이 숫자를 다시 세고 있다”고 알려 왔다. 나는 당장 중대본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불러준 숫자가 맞아요? 실종자 명단도 공개하세요.”

 이 관계자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실종자 명단은 없습니다.”

 뚝-. 전화는 그렇게 끊기고 말았다. 시계는 자정을 향했다. 3층 브리핑룸에 있던 나는 1층 상황실로 뛰어갔다. 그런데 상황실 문을 연 순간, 치킨 냄새가 풍겨 왔다.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 등 중대본 고위 관계자들이 야식을 먹고 있었다. 실종자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 못한 마당에 치킨이 넘어갈까. 나는 치킨을 권하는 손길을 뿌리친 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후로도 중대본은 탑승자·실종자·구조자 숫자를 또 다시 수차례 정정했다. 그날 밤 치킨을 앞에 둔 강병규 안행부 장관 곁에선 잠수부의 심야 수색이 곧 시작된다는 방송 뉴스가 흘러나왔다.



17일 01:00, 진도체육관
“저 기자인데요” 어렵게 뗀 한마디 … 그리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갓 3년차 기자인 내게 재난 현장은 버거웠다. 느닷없이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감히 물어볼 수 있을까.

 17일 자정 두려운 마음으로 진도체육관으로 들어섰다. 세월호 침몰 15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가족의 생사를 알 길이 없는 1000여 명이 울부짖고 있었다. 아들과 딸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도 바다 쪽에선 기별이 없었다. 차가운 바닷속 아이들은 이런 애끓는 사랑을 알까. 나는 울음을 눌러가며 실종자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저, 기자인데요….”

 한 어머니는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떤 아버지는 내 휴대전화를 빼앗아 던져버리기도 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가만히 돌아섰다. 그들이 기자를 밀어내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사건이 터지면 속보 경쟁을 하느라 취재원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는 일들이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실종자 가족을 계속 취재해야 했다. 재난 보도는 언론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재난의 실체와 원인을 정확하게 알려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신 나는 실종자 가족 인터뷰의 원칙을 세웠다. 내가 궁금한 것을 캐묻기보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들어줄 것.

 세월호 침몰 엿새째. 실종자 가족들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간다. 내가 쓴 기사를 통해 저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허술한 국가 재난 관리 시스템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나는 무거운 어깨를 추스르며 오늘도 진도 곳곳을 누비고 있다.



17일 04:00, 진도 팽목항
시신 입 벌려 치아 확인하는 어머니, 그 아픔을 기사에 담을 자신이 …


17일 오전 4시쯤으로 기억한다. 진도 팽목항에는 수백 명의 실종자 가족이 먼바다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부둣가 한쪽으로 앰뷸런스 석 대가 들어섰다. 우르르 몰려든 부모들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앰뷸런스에는 시신 두 구가 실려 있었다.

 자그마한 몸뚱이를 감싼 흰 천을 구급요원이 들어올렸다. 신원미상의 여성 두 명이었다. “모르겠어. 얼굴을 봐도….” 바들바들 떨던 부모들이 풀썩 쓰러졌다.

 한 어머니는 맨손으로 시신의 입을 벌렸다. “내 새끼가 맞는지 치아를 확인해야겠어.” 이 어머니는 자갈밭에 엎어져 통곡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 장면을 나는 기사로 옮기지 않았다. 몇몇 단어로 저 애통한 마음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4년차. 나는 처음으로 기자가 된 걸 후회했다.

 슬픔이 분노로 뒤바뀐 건 다음 날 목포해양경찰서로 취재 현장을 옮기면서다. 세월호를 버리고 달아났던 이준석 선장이 이곳에서 수사를 받았다. 그가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올 때였다. 나를 비롯한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지만 그의 답변은 간결했다.

 “퇴선 명령을 했습니다. 잠시 침실에 있었지만 술은 안 마셨습니다.”

 나는 그의 뻔뻔한 대답을 기사로 옮겼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충분히 담을 순 없었다. 재난 현장을 기사로 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진도 해역은 사흘 내리 비가 내렸다. 오늘(21일)에야 겨우 햇살이 비친다. 하늘이 실종자 가족들에게 내려준 희망의 빛줄기이길 바라본다.


18일 23:00, 인천 청해진해운 본사
직원들은 그저 “모른다”만 되풀이 … 닫힌 철문은 여전히 답이 없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 인천 본사는 세월호 침몰 당일부터 철문을 굳게 닫았다. 선사 관계자가 한 명이라도 밖으로 나오면 수십 명의 취재진이 그를 둘러쌌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모른다”고만 했다. 언론 대응을 맡은 김모 부장은 “영업팀에만 있어서 아는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회사는 세월호에 승선한 인원 수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사고 당일 477명이라고 했던 승객수는 며칠 뒤 475명으로 정정됐다가 또다시 476명으로 뒤바뀌었다.

 저들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세월호의 운영사가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 무책임할 수 있을까.

 인천여객터미널을 취재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박 탑승 시에 정확한 승객 인원을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던 것이다. 표를 끊고 직접 이름을 적어내면 터미널 직원이 그 종이를 찢어서 모았다. 이것이 승선 인원을 파악하는 절차였다. 아무 이름이나 적거나 아예 안 적어도 그만이었다. 18일 밤 취재진 사이엔 침몰한 세월호에 이름을 적지 않은 승객이 더 있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전근대적인 탑승자 관리를 보면 있을 법한 이야기란 생각도 들었다.

 청해진해운은 ‘무책임’ 해운이었다. 언론 대응은 물론 탑승객 관리도 책임 없는 자세로 일관했다.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을 버려두고 먼저 달아났던 선장과 선원들도 이 회사 소속이다. 저 무책임한 회사가 운영하는 선박에 325명의 어린 동생들이 올랐다가 끔찍한 침몰 사고를 당했다. 답답한 마음에 철문을 두드려 보지만 청해진해운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21일 09:00, 슬픔에 빠진 안산시
“위층에 사는 가족들이 안 보여요” 택시기사는 뉴스 들으며 한숨만


“우리 빌라가 2층인데 4층 집이 그날부터 안 보여요. 차마 물어볼 수도 없고. 동료 택시기사 중에도 사망 학생 부모가 한 분 있고요. 착한 학생으로 들었는데….”

 16일부터 세월호 침몰 관련 취재를 하느라 택시를 타고 안산시를 돌아다녔다. 어떤 택시든 분위기는 비슷했다. 침울한 표정의 기사들은 라디오로 세월호 침몰 뉴스를 들었다. 몇 마디만 나눠도 한숨을 쉬며 사고를 당한 이웃 얘기를 꺼냈다.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피해를 당한 단원고 학생을 여럿 알고 있었다. 형제가 몇 명인지, 아버지 직업이 뭔지 줄줄 뀄다. 21일 오전에 만난 한 택시기사는 “이웃집 학생이 실종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고잔동에서 만난 구모씨도 “조기축구회를 하는데 실종 학생을 자녀로 둔 회원만 4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남겨진 학생들의 고통은 더 컸다. 안산 시내 고교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도 교복을 입었다. 조문을 가기 위해서였다. 단원고 인근의 선부고 2학년 윤모군은 “18일부터 안산 고려대병원을 매일 들렀다”고 했다. 구조된 학생은 말할 것도 없다. 고대 병원에서 만난 한 학생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활발한 아이였는데 구조된 이후 계속 우울한 상태”라고 했다.

 취재를 하면서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곳 안산은 마치 폭격을 맞은 전쟁터처럼 황망한 분위기다. 안산의 평범한 시민들은 이웃이 겪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아파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손길도 늘어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