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평가제의 귀환?
경쟁 부추기는 상대평가제 가라!
▲ 2005년 서울대에서 20일간 총장실 점거 농성을 벌였을 때 학생들이 주장했던 것은 ‘상대평가제 반대’였다. 지난 12월 13일 연세대 의대는 국내 대학 최초로 절대평가제를 도입했다. photo 연합 |
2005년을 전후해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 대부분의 대학이 상대평가제를 일부 또는 전면 도입하면서 절대평가제는 옛 이야기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지난 12월 3일, 연세대 의대는 국내 대학 최초로 전 교육과정을 절대평가 체제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연세대 의대 교육과정개발사업단이 3년간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확정된 것인데, 2014학년도부터 의과대학 전 과정에서 ABCDF 체제의 상대평가제를 ‘Pass’, ‘Non-pass’를 판단하는 절대평가제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전 과정에서 절대평가제를 시행하는 것은 연세대 의대가 처음이다. 윤주헌 연세대 의대 학장은 “전국 상위 0.1%에 속하는 우수한 학생들에게 상대평가 점수를 매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학점을 따는 데 열중하기보다 잠재적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번 개선안의 목표”라고 밝혔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상대평가제와 절대평가제 사이의 줄다리기는 연세대뿐 아니라 전국 대학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경희대의 경우, 상위 40% 학생들에게 B+ 이상의 학점을 주는 유연한 방식의 상대평가제가 시행 중이었다. 그런데 2008년 학교 측에서는 이에 덧붙여 하위 30%의 학생들에게 C+ 이하의 학점을 주게 하는 엄격한 상대평가제를 시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방침에 총학생회를 필두로 학생들이 반대의 뜻을 표하면서 지금껏 매년 유예돼 오다가 작년 들어서 사실상 없던 일이 됐다. 작년 10월 29일, 학교 측과 학생회 간 있었던 토론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주용 경희대 총학생회 회장은 “2008년부터 매년 학생회에서 반대해 와서 1년 뒤에, 또 1년 뒤에 도입하겠다던 것이 작년에 무산된 것”이라며 “학생들은 엄격한 상대평가제를 반대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절대평가제 전면 도입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주장의 이유는 “대학 교육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 “각자의 능력에 맞춰서 성적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간 경쟁을 부추겨 학점을 따다 보면, 줄세우기 그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정 총학생회장은 “작년에 들어서는 학교의 교육 방침도 변화하면서 경쟁보다는 지식 습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7월 강성모 KAIST 총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대평가제를 절대평가제로 전환하는 방침을 추진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KAIST 홍보팀에서는 “KAIST는 장학금 지급 비율이 다른 대학에 비해 월등히 높은데, 최근 몇 년간은 차등등록금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학점 때문에 등록금 고민에 빠지는 학생이 느는 것을 보면서 일정 학점만 넘으면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절대평가 방식을 도입했다”면서 “강 총장의 발언은 차등등록금제 폐지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라고 덧붙였다. 학점 취득 방식을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지만,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변화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짠 학점’으로 유명한 서강대에서도 지난 4월 1일 전준수 서강대 대외부총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상대평가제는 불필요한 경쟁을 유발할 수도 있다”면서 “학점을 담당 교수의 재량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반면에 더욱 엄격한 상대평가제 도입을 주장하는 학교도 있다. 연세대 의대는 올해 들어 상대평가제를 폐지했지만, 연세대 정갑영 총장은 지난해 8월, ‘2012 연세비전 교직원 컨퍼런스’ 자리에서 “학점 인플레를 바로잡겠다”며 “재수강을 원칙적으로 금지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2013학년도 신입생부터 재수강을 금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허남진 서울대 기초교육원장은 대학에서 엄격한 상대평가제를 도입하게 된 배경을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대학들이 계열별로 학생을 모집하게 된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각 학과별로 정원을 정해 학생을 모집하던 방식과 달리 2000년대 초반부터 각 대학은 단과대별로 학생을 모집해 1년간 교양 과목 및 전공 기초 과목을 수강하게 한 후, 2학년 때부터 각 학과로 나누어 전공 공부를 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학과를 결정할 때 가장 객관적인 요소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학점이다. 인기 학과에 많은 학생이 몰릴 경우 학점에 따라 순차적으로 선발하려다 보니 상대평가제가 도입된 것이다.
또 절대평가제하에서 이른바 ‘학점 인플레’가 생겨났던 것이 상대평가제를 도입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허 원장은 “취업을 하려면 좋은 학점을 받는 것이 중요한데, 절대평가제는 교수 재량에 맡기다 보니 학점이 후해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가 ‘대학알리미’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월, 전국 4년제 대학 173곳의 대학별 등록금 현황, 강좌당 학생 수, 성적 평가 결과 등을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2년 8월과 2013년 2월 졸업한 4년제 대학 졸업생의 90%가 B 학점 이상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에서도 A 학점 이상 받은 졸업생은 33.2%로 ‘학점 인플레’ 현상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추세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에게서 “학점을 가지고는 지원자의 능력을 판단할 수 없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상대평가제가 학생들 간 경쟁만 부추기고 좋은 학점을 받는 것에만 몰두하게 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의 상위 25개 의대나 일본의 주요 의과대는 각 과목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얻었는지만 판단하는 ‘Pass’, ‘Non-pass’ 제도만 실시하고 있다. 허남진 원장 역시 상대평가제를 전면 시행하는 데는 부작용이 따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학생 수가 적은 과목이나 실기 과목, 외국어 과목에 대해서 학점 줄세우기를 하는 것은 본래 목표에 어긋나는 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각 대학의 기초 외국어 과목에는 “외국어고등학교 출신이나 재외국민 학생의 수강을 막아야 한다”는 학생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학점을 잘 받기 위해 ‘기초 중국어’ 과목 수업을 듣는다는 제보가 매 학기마다 나오는 실정이다. 허 원장은 “물론 절대평가제에도 제약이 필요하다”며 “무조건 좋은 학점을 받지 않게 적절한 선을 제시해줘야 하지만, 그 대안으로 상대평가제를 전면 시행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느냐는 것이 최근의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의 논란은 고등학교 이하 중등 교육 현장에까지 확산되는 모양새다. 지난 2011년 12월,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중등학교 학사관리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중·고교에 적용되고 있는 석차 9등급제 상대평가 방식을 학업성취도를 평가해 A~F로 표기하는 절대평가 방식, 성취평가제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012년 입학한 중학생부터 성취평가제가 도입됐고, 2014년에 고등학교에서도 적용할 예정이다. 원래는 대학 입시에도 성취평가제를 반영할 예정이었지만, 일선 학교와 대학들의 반발로 2019학년도까지 유예됐다.
교육부에서 성취평가제를 도입하는 근거는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있다. 지난 2011년 지은림 경희대 교육대학원 교수가 전국 중·고등학생과 학부모, 교사 2만1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9등급제인 고교 내신 제도에 대해 학생의 40.7%, 학부모의 26.1%, 교사의 22.0%가 불만을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상대평가에 따른 학업 스트레스가 심하냐는 질문에는 70%가 넘는 학생과 50%가 넘는 학부모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지난 12월 15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교사의 45.6%는 성취평가제 도입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성적 부풀리기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75.0%)는 것이 그 이유다.
지은림 교수는 “장기적으로 봐서는 절대평가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상대평가하에서는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시험에 임할 수밖에 없고, 줄세우기로 인해 시험 잘 보는 것에만 몰두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평가의 신뢰성과 타당성이 확보돼야 하는 것은 물론 교사에 대한 교육도 강화돼야 하고, 대학들은 다양한 입학 전형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이 지 교수의 말이다. 지 교수는 “평가 제도의 문제는 어떤 목표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하는 교육 철학의 문제”라면서 “절대평가제와 상대평가제를 각각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교육 철학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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