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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주간조선] 조선해양공학계 노벨상 ‘데이비드 테일러 메달’ (조선일보 2013.12.15 14:15)

[주간조선] 조선해양공학계 노벨상 ‘데이비드 테일러 메달’

선박 부식 비밀 연구 등
논문 500여편
타이타닉 침몰 분석도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백점기 교수/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백점기 교수/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Because I’m here, my wife is now participating in the awarding ceremony in Korea on behalf of me. I very much trust my wife that she will never take away with the prize money. I hope so.”(내가 여기(시애틀) 있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 아내가 한국 시상식에 참석 중이다. 나는 집사람이 상금을 챙겨 달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부산대학교 백점기(56) 조선해양공학과(선박해양플랜트기술연구원장) 교수의 ‘조크’로 행사장은 일순간 웃음바다로 변했다. 지난 11월 8일 오후 2시(한국 시각)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미국조선해양공학회 연차 총회장이었다. 백 교수는 이 자리에서 2013년 데이비드 W. 테일러 메달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테일러 메달은 세계 조선해양공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릴 정도로 명예로운 상이다. 매년 미국조선해양공학회가 전 세계 학자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연구성과를 낸 단 1명의 학자를 선발해 시상한다. 1935년부터 시작된 테일러 메달 시상식은 78년의 전통을 자랑하지만 백 교수는 74번째 수상자다. 이날 백 교수는 50돈짜리 순금으로 된 메달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같은 날 한 시간 뒤인 오후 3시, 부산 해운대의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또 다른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백 교수의 부인 김윤희(55)씨는 남편을 대신해 마이크를 잡았다. “큰 상을 받게 됐는데 남편은 출장 중이라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김씨는 상패와 함께 2억원의 상금을 받았다.

 이날 행사는 경암교육문화재단(이사장 송금조)이 주최한 제9회 경암학술상 시상식. 백 교수 등 수상자로 선정된 5명의 각계 전문가는 각각 2억원씩의 상금을 받았다. 백 교수가 테일러 메달 수상 소감으로 “부인을 믿는다”고 말했던 것은 경암교육문화재단이 주는 고액의 상금을 염두에 두고 겹경사를 자축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백 교수는 올해 국내외에서 자타가 공인한 세계 최고의 조선해양공학자가 됐다. 최대 상금을 자랑하는 경암학술상과, 테일러 메달을 같은 해 수상한 게 한 증거다. 테일러 메달은 그동안 미국과 영국에서 독식하다시피 해 왔다. 비(非)영미권 학자로서는 백 교수가 첫 수상자다. 원천기술을 많이 확보한 일본에서도 테일러 메달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조선해양공학계는 왜 그를 주목하고 있는 걸까. 지난 11월 29일 백 교수가 원장을 맡고 있는 부산대 선박해양플랜트 기술연구원에 들어서자 연구원들이 백 교수의 사무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백 교수는 이 연구원에 대해 “2008년 영국 로이드교육재단과 우리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들었다. 연구원은 선박해양플랜트의 안전 사고를 최소화하는 구조역학 연구 전문기관이다. 2011년에는 선박해양플랜트 기술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됐다”고 말했다.

 체크 무늬 티셔츠 차림인 백 교수는 인터뷰를 위해 미리 자료화면을 준비해 놓은 듯했다. 사무실 내 소회의용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에 연결된 대형 모니터를 통해 자신이 연구하는 조선해양플랜트 분야의 동영상을 보여주며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설명했다. 이날 오후 2시50분에 시작한 그와의 인터뷰는 사무실에서만 3시간가량 진행됐다.

 “공교롭게도 11월 8일 1시간의 격차를 두고 미국과 한국에서 두 개의 시상식이 열렸다.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동시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했다. 경암학술상이 큰 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불참할 수밖에 없었던 건 조선해양공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데이비드 테일러 메달의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먼저 접했고 참석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아내와 가족들이 놀랐을 정도로 상복이 많았다.”

 백 교수는 이 두 개의 상을 포함, 모두 네 개의 큰 상과 다섯 가지 명예를 얻었다고 했다. 테일러 메달상, 경암학술상, 영국 왕립조선학회 최우수 논문상, 미국 기계공학회 OMAE 최우수 논문상 등 4개의 상을 받았고 명예 하동군민 선정, 미국 조선해양공학회 부회장 선출,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공과대학교 자문이사 선임, ㈔화재폭발안전포럼 이사장 선출, 일본선급 한국기술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국내외에서 명성을 쌓았다. 영국 왕립조선학회 최우수 논문상의 경우 백 교수는 올해로 다섯 번째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백 교수는 세계 조선해양공학계에서도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활동 폭을 넓혀왔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선급 한국조선자문위원장, 대한조선학회 선박해양플랜트구조연구회장, UNESCO 조선해양플랜트 기술 백과사전 편집장, 국제 선박해양플랜트 전문가 회의(ISSC) 상임이사, 국제저널 ‘선박과 해양 구조물(Ships and Offshore Structures)’ 편집장도 맡고 있다. 연 300억원 규모인 기술원의 살림과 부산대 교수직을 겸하면서도 세계에 한국 조선해양공학 기술을 알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국조선해양공학회는 백 교수의 연구 실적과 더불어 그의 이같은 노력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백 교수는 비(非)선형구조역학의 권위자이면서 동시에 조선해양플랜트의 안전설계 분야에서 독보적 연구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비선형구조란 직선 형태의 대칭구조가 아닌 것을 말한다. 즉 선박 또는 해양플랜트에 1의 힘을 가해서 1만큼 변형이 일어나면 선형(직선)구조이고, 1 이하 또는 이상으로 변형되면 비선형구조라고 한다.

 바다에 떠 있는 조선해양플랜트는 바람·파도·조류 등 기후변화와, 폭발·화재 등의 돌발사고에 의해 선체 또는 구조물에 가해지는 변형이 제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예측불가능한 변형은 대형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백 교수는 조선해양플랜트의 비선형구조역학을 연구해 돌발 사고를 사전에 차단하는 설계를 연구하고 있다. 그의 연구 성과는 구조물의 기둥을 어떻게 설계할지, 철판의 치수는 어느 정도로 만들지, 방화벽을 어느 곳에 설치할지 등 구조 설계의 모든 분야에 활용된다.

 “1 대 1로 대응하는 힘과 변형의 관계는 선박 설계의 기본이면서 계산하기가 어렵지 않다. 물론 이론과 현실이 100%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극한 환경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나타나는 예측불가능한 구조 변형을 어떻게 예측해 사전에 대응할 것인가에 있다. 조선해양플랜트에서 비선형 구조를 예측하고 이를 차단하기 위한 설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직도 많은 숙제가 남아 있다.”

 조선해양플랜트의 비선형구조역학은 움직이는 선박 자체를 가볍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유체역학과는 연구방향이 다르다고 한다. 비선형구조역학은 고정된 형태로 석유 및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해양플랜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다에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설계 요인은 파도다. 파도가 치면 선박이나 구조물이 흔들리게 되고 기능 발휘에 문제가 생긴다. 녹슨 송유관에서 가스가 유출될 수 있고 발전기에서 불꽃이 튈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거의 모든 학문을 끌어들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유조선 철판을 두 겹으로 만들고 해양플랜트에 방폭벽을 설치한 건 우리 연구가 반영된 결과다.”

 조선해양플랜트 사고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88년 영국 인근 북해에서 발생한 ‘파이퍼 알파(Piper Alpha)’ 해양플랜트 폭발 사고와 2010년 미국 멕시코만의 석유시추시설 폭발 사건이 있다. 북해 가스폭발 사고 당시 160명 이상이 사망했고 멕시코만에서 발생한 ‘딥워터 호라이즌’ 기름유출 사고 당시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환경오염이 발생했다. 백 교수는 대표적인 해양사고로 손꼽히는 두 사건의 연구 분석에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백 교수는 지금까지 총 50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국제학술지에 250여편의 논문이 실렸고 우리나라의 조선해양학회 등에서 발표한 논문이 250편을 넘는다고 했다. 연간 평균 15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해 온 것.

 “논문을 쓰기 시작한 게 석박사 과정 때부터니까 30년 이상 써온 셈이다. 주제를 잡고 나면 논문 자체를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 그만큼 해결할 사안이 많다는 얘기도 된다.”

 영국 왕립조선학회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한 백 교수의 논문 다섯 편 중 하나는 선박의 부식에 관한 연구였다. 바다에 떠 있는 선박이나 해양플랜트는 박테리아나 화학반응에 의해 쉽게 부식된다. 녹이 슬게 되면 외부 힘에 의한 변형이 예상보다 커지게 된다. 즉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벌크선의 경우 철광석 등을 싣기 때문에 선적 바닥에 가까운 부위가 많이 부식되고 선상 쪽으로 갈수록 철제의 부식 정도가 약하다. 부식을 막기 위해 코팅을 하거나 구조물 자체를 교체할 수 있지만 비용부담이 따른다. 비용을 줄이면서 동시에 선박 및 플랜트를 부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문제는 학계의 오랜 숙제였다.

 백 교수팀은 해답을 찾아냈다. 백 교수는 우선 전 세계 선급회사들로부터 선박의 정기점검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자료를 통계화해 선체 곳곳의 부식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결과를 얻었다. 선박은 3년마다 한 번씩 정기점검을 받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세계 주요 선급사가 보유한 수십 년간의 다양한 선박 점검 자료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조선업계는 선박 전체에 대한 부식의 정도를 동일하게 취급했기 때문에, 부식에 대비해 철판을 두껍게 만들어 선박과 플랜트의 무게가 커지는 비효율을 감내해 왔다.

 “선박이나 해양구조물은 3년에 한 번씩 정기점검을 받도록 돼 있다. 선급사들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건강검진을 받듯 모든 것을 체크하는데, 이때 선박 또는 구조물의 부식 정도를 모두 측정한다. 내가 연구하기 전까지 선체 부식 자료는 전산화되지 않았다. 모두 서류로 처리했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 자료를 미국, 일본, 노르웨이 등지의 선급회사에서 무료로 받아 통계를 냈다. 그 결과 선체 곳곳에서 발생하는 부식의 정도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선박이나 해양구조물은 과거 부식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철판의 두께를 정상보다 두껍게 만들어왔다. 당연히 무거워졌고 고비용에 효율성은 떨어졌다. 그러나 빅데이터를 통해 만든 통계자료가 나온 뒤로는 선박과 해양구조물의 각 부위에 따른 부식의 정도가 다르고 선체 부위별로 철판의 두께를 달리 해도 안전하다는 게 입증됐다. 부식에서 안전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선박과 플랜트의 무게를 줄이는 게 가능해졌다. 선급회사들은 더 이상 정기점검 자료를 공짜로 내주지 않는다. 중요한 데이터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그동안 연구를 통해 여러 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하지만 대부분 논문발표 등을 통해 일반 업계에 공개했고 특별히 로열티를 받지는 않는다고 했다. 해양에서 발생하는 사고를 막기 위한 연구성과는 많은 사람에게 공개됨으로써 인명 및 환경파괴와 같은 대형피해를 막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백 교수의 철학이다.

 비선형구조역학 분야의 원천기술과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는 백 교수에게는 최근 다양한 연구제안이 들어온다. 대표적인 게 영화 ‘타이타닉’을 제작했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타이타닉 사고에 대한 과학적 분석’ 요청이다. 1912년 발생한 여객선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15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역사상 최고의 인명 사고로 기록돼 있다.

 “2010년 말쯤 미국의 해군사관학교쯤 되는 네이벌아카데미의 한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캐머런 감독이 타이타닉호 침몰 100년(2012년)을 맞아 침몰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하는데, 충돌 이후 배에 가해진 변형과 그 결과에 대한 분석을 내가 맡았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배가 부러지는 걸 정밀하고 효율적으로 계산해 내는 데에는 전 세계적으로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사용된다. 연구 결과, 타이타닉호는 빙하와 충돌 후 배에 물이 찼고 약 23도 정도 기울어졌을 때 두 동강이 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영화에서처럼 90도가량 기울어지며 배가 부러진 건 아니다. 캐머런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의 비과학적인 부분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디스커버리 채널을 통해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캐머런 감독 측은 방송에서 연구자료를 토대로 영화를 다시 촬영해야 하지 않느냐는 농담도 했다. 모두 캐머런 감독이 자비를 들여 만들었는데, 과학자 이상의 호기심을 가진 감독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11월 말에는 미국 보잉사에서도 백 교수의 이론을 활용하기 위한 문의가 있었다. 보잉의 한 엔지니어가, 백 교수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출판사를 통해 낸 책 ‘선박 형태의 해양 구조물(Ship-shaped offshore installations)’을 읽고 백 교수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질문 받은 내용은 책의 중간에 나오는 충격작용에 관한 것이었다. 힘이 빠르게 작용하면 항복응력(降伏應力)이 높아지고 느리게 작용하면 응력이 낮아진다. 보잉 사람은 ‘이런 논리를 적용해 항공기 내부 의자의 무게를 줄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나는 적용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다만 항복응력은 고속으로 갈수록 물질이 푸석푸석해지는 단점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조언해줬다.”

 백 교수는 경남 하동군에 건설 중인 해양플랜트 종합시험연구소를 총괄 책임지고 있다. 국내에서 최대 규모로 건설되는 이 연구소에서는 조선해양플랜트에서 발생하는 화재, 폭발 사고를 실험할 수 있다. 연구소 건설을 위해 정부와 경남도, 하동군이 1000억원을 투입했다.

 백 교수가 조선해양공학자로 꿈을 키우기 시작한 건 대학 진학 때부터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그는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위해 부산으로 ‘유학’을 왔다. 바닷가와 인접한 곳에 살아서 마도로스를 꿈꿨던 그가 대학 원서를 내야 할 때 그의 손에는 부산대 원서와 한국해양대학교 원서가 모두 들려 있었다. 백 교수는 마지막 순간에 선장보다 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는 배멀미를 하는 체질이다.

 백 교수는 경암학술상 시상식에 불참한 게 마음에 걸렸던지, 귀국 후 곧장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에게 감사 인사를 갔다. “아내가 세금을 떼고 난 나머지 상금을 고스란히 갖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내와 함께 송 이사장 댁을 다녀왔다. 하하하”

인터뷰 말미에 백 교수는 국내 조선 및 해양플랜트 산업 육성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영국의 선박산업을 뛰어넘고 우리가 다시 일본의 선박산업을 넘어 세계 1위에 오른 건 인프라, 기술, 인재, 미래 비전 등 4가지 요소에서 경쟁국을 따돌렸기 때문이다. 요즘 중국이 선박 분야에서 우리를 바짝 뒤쫓고 있다. 기술과 인재 부문에서 우리가 다소 앞서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인프라를 놓칠 경우 세계 1위 자리를 중국에 내주게 된다. 정부가 부도 위기에 내몰린 조선해양업체들을 살리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조선해양 분야의 업황은 곧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 지난 100년간의 흐름으로 볼 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