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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국제분야

이드리스 말레이시아 총리실 경제장관 (조선일보 2013.03.09 03:07)

이드리스 말레이시아 총리실 경제장관

"전문가 500명 합숙, 혁신적 경제개혁 모델 만들어… 2년만에 1인당 국민소득 45% 늘었다"

이슬람 경제권 표준 만드는 나라… 이슬람식 식품·화장품 등 '할랄 산업' 몇년새 급격히 성장… 말레이시아가 주도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 주력 분야 12개 산업 외에는 관심 없어, 정부가 주도하지만 민간 투자가 92%

 

이드리스 말레이시아 총리실 경제장관

"저 창밖에 짓고 있는 호텔 보이죠. 땅을 산 지 2년 넘게 허가를 못 받아 공사를 못했죠. 하지만 우린 2주 만에 허가를 내줬습니다. 그 호텔이 있는 게 좋다고 판단했거든요. "

우리나라의 옛 경제기획원 장관 역할을 하는 이드리스 잘라(Idris Jala·55) 말레이시아 총리실 경제장관은 "말레이시아 최초의 6성급 호텔 '세인트 레지스'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내년 말 문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넉넉한 인심을 가진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만 말레이시아 경제의 오늘과 내일을 말할 땐 목소리도 빨랐고 힘도 실렸다.

그는 우리나라의 옛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비슷한 '경제 개혁 프로그램(ETP)'의 총감독관이다. 2020년까지의 경제 운용 방안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현 나지브 라자크 총리가 2009년 집권한 뒤 만든 중·장기 경제 발전 계획으로 석유·에너지를 비롯, 팜오일·금융·관광·전기전자 등 12개 분야를 국가 주력 산업으로 선정했다. 예전 우리나라의 집중 성장 모델을 연상시킨다.

이 분야들은 정부와 민간 전문가 500여명이 8주간 합숙하며 선정했다고 한다. 그들은 합숙한 호텔을 '호텔 캘리포니아'라고 불렀다. '원할 땐 언제든 체크아웃하세요. 하지만 떠날 수는 없어요…'라는 팝송 호텔 캘리포니아 내용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예전엔 모든 걸 다 하려 했었죠.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요. 이젠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에 집중해서 승리자가 될 겁니다." 그는 "오랫동안 선진국의 성공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건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지난 1일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시내에 있는 고급 쇼핑몰‘파빌리온’지하 식품 매장. 먹거리를 사러 나온 손님들이‘비(非)할랄(non halal)’코너에서 장을 보고 있다. 이지하식품 매장의 다른 곳 대부분은 할랄 식품을 판매한다. 돼지고기 등 이슬람 율법이 금지한 품목들은 매장 한쪽에 따로 마련된 코너에서만 살 수 있다. 중국계 등 비이슬람 국민들(38% 안팎)이 이용한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쿠알라룸푸르=장일현 기자

 

주력 산업을 선정하는 기준은 명확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 분야만 키운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원해도 경쟁력이 없으면 제외시켰다"고 했다. 자동차는 국내 메이커가 두 개가 있는데도 주력 산업에서 제외했고, 철강도 뺐다. 이유는 "우리보다 훨씬 잘하는 나라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영인 출신이다. 쉘(Shell) 말레이시아 부사장을 거쳐 말레이시아항공 최고경영자(CEO)를 맡던 시절 "전권을 주겠다"는 나지브 총리의 약속을 받고 일을 맡았다. 그가 정치가 싫고 국회의원들과 만나기 싫다고 해서 기존 경제 부처 대신 총리실 산하 장관으로 임명했다. 국회의원은 총리가 만나면 된다.

그는 "관료주의는 항상 시간이 걸리고 비효율적인데 한편에선 기업들이 힘들어하고 비용은 눈덩이처럼 커진다"며 "우리는 시간과 비용을 모두 아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인당 국민소득 1만5000달러 달성을 목표로 12개 분야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모든 사업 기회가 이곳에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45% 늘어난 9700달러가 됐다"며 "이런 추세라면 예정보다 2년 빠른 2018년에 1만5000달러 목표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개혁 프로그램은 정부 주도 프로그램이지만, 자본은 대부분 민간이 댄다. 총 투자비 4400억달러 중 민간 투자가 92%를 담당하고 정부 몫은 8%에 불과하다. 실제로 경제 개혁 프로그램 실시 이전 10년 동안 GDP 대비 평균 6.7%였던 민간 투자가 2011년 12.2%, 작년엔 무려 22%가 됐다.

―할랄 산업과 이슬람 금융의 '허브(hub)'가 되겠다고 했는데 전략은 뭔가.

"글로벌 넘버원이 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일까 자문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수쿠크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금융이었다. 이슬람 인구가 매년 1.8% 이상 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할랄 산업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2010~2011년 식품은 15%, 의약품은 11%, 화장품은 65% 성장했다. 문제는 표준(standard)이다. 한 나라의 할랄 인증이 다른 나라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모든 나라가 인정하는 국제적 표준을 만들겠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강력한 경쟁력은 그곳에서 나온다."

―성장 드라이브로 발생할 사회적 불평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

"고소득 일자리 330만개를 만들려 한다. 성장을 하지만 일자리는 없는 미국·유럽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지난 2년간 41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마구잡이 성장도 자제한다. 우리도 1980년대 10%대 성장을 해봤다. 호황(boom) 뒤에는 늘 파산(bust)이 뒤따랐다. 우리에겐 4~5% 성장이 적당하다."

―한국 기업이 말레이시아에서 도전할만한 분야는.

"우린 한국 정보통신(IT) 분야의 성공과 능력을 존경한다. 그런 최정상 기술을 우리의 각종 프로젝트에 적용하기를 원한다. 명심할 것은 12개 분야 이외에는 우리가 경쟁력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12개 분야에 투자해야 성공할 것이다."

☞할랄(Halal)

이슬람 율법 ‘샤리아(Sharia)’에 따라 ‘허용되는 것’을 뜻한다. 돼지고기, 술, 투기 등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먹거나 소비 또는 생산해서는 안 된다. 허용된 식품과 공산품에는 할랄 마크가 찍힌다. 요즘 이슬람권에서는 할랄 산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