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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신아시아구상

달러 부자 중국, CMI 창설서 엔화 자존심에 상처 주다 (중앙일보 2009.05.13)


[중앙일보 이상렬]

 3일 오전 인도네시아 발리의 인터내셔널 컨벤션센터 1층 히비스커스 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중국의 셰쉬런 재정부장, 일본의 요사노 가오루 경제재정상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2006년 5월 아시아공동기금(CMI 다자화) 논의 시작 3년 만에 결실을 본 순간이었다. 1200억 달러 규모의 CMI에 각국이 얼마씩 분담하느냐는 협상은 아시아 금융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와 직결된 파워게임이었다. 이날 한·중·일 3국 재무장관의 미소 뒤에는 숨가쁜 '아시아 화폐전쟁'이 있었다.

 ◆확인된 중국의 부상=CMI 분담금 중 중국의 분담 규모는 384억 달러(32%)로 일본과 똑같다. 협상 내내 중국과 일본은 서로 더 많은 돈을 내겠다고 경쟁했다. 분담액이 많을수록 CMI에서 지분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2조 달러 가까운 외환보유액을 앞세워 의욕을 보였다. 일본은 자존심이 걸린 사안이었다. 최근 중국의 경제력이 급부상했지만 국제기구에선 여전히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하고, 일본으로선 이런 우위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일본의 지분은 각각 6.227%, 12.932%로 중국(IMF 3.807%, ADB 5.53%)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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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4월 초 태국 파타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기간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만났다. 소식통에 따르면 원자바오 총리는 아소 총리에게 “실무자들의 논쟁이 있는데 양국이 똑같이 분담금을 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소 총리는 즉답하지 않았다. 결국 한 달 뒤 발리에서 곡절 끝에 중국과 일본은 같은 금액을 분담하기로 결론 냈다. 국제기구에서 중국이 일본과 대등한 지위에 올라선 첫 사례다. 익명을 요구한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실상 중국의 승리”라고 말했다.

◆일본의 필사적 견제=요사노 일본 재무장관은 3일 발리 현지에서 아세안과 600억 달러 규모의 엔화 통화스와프 계획을 발표했다. CMI와 별도로 아세안 국가들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금융 공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일본 시장에서 엔화 표시 국채(사무라이 본드)를 발행할 때 최대 50억 달러(약 5000억 엔)까지 보증해 주겠다고 밝혔다. 이는 만일의 경우 다른 나라의 국채가 탈이 날 경우 일본 납세자들이 물어 주겠다는 것이어서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일본의 대대적 자금 투하에는 전략적 목표가 있다.

재정부 관계자는 “아시아에서 위안화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초강수를 뒀다”고 말했다.

◆'비토권' 확보한 한국=협상 기간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였다. 중·일 양국은 한국의 분담액을 줄여야 한다고 공동전선을 폈다. 한국 몫을 줄여야 그들의 몫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중·일 양국이 제안한 한국 분담액은 중·일의 절반도 안 됐다. 윤증현 장관은 “차라리 판을 깨겠다고 하라”며 배수진을 쳤다. 한국은 어렵사리 분담금으로 중·일의 절반인 192억 달러(16%)를 배정받았다.

향후 CMI 운영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투표권(Voting Power)이다. CMI는 회원국 가입 여부는 만장일치로, 자금 지원 등 그 밖의 주요 의사결정은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이뤄진다. 한국은 비토권 확보에 주력했다. 결국 중·일·아세안은 모두 28%대, 한국은 14%대로 투표권이 분할됐다. 어느 한 나라도 단독으로는 비토권을 갖지 못하고, 두 곳의 연대만으로는 일을 성사시킬 수 없는 분할이 이뤄졌다. 한·중·일과 아세안 중 최소 세 곳이 힘을 합쳐야 안건이 통과되는 '힘의 분할'이 탄생했다. 아시아 화폐전쟁의 결과다. 

이상렬 기자

◆CMI=1200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공동기금(CMI 다자화)은 여러 나라가 돈을 내 만든 기금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아시아 국가들의 힘으로 막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설립하자는 얘기가 나왔으나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뒤 2000년 5월 양자 간 통화스와프 형식으로라도 금융위기에 대비하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회의가 열린 태국 치앙마이의 지명을 따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로 명명됐다. 2006년 '아세안+3' 회의에서 결속력 강한 단일 기금을 만들자는 논의로 발전했다. 회원국의 위기 때 자금을 지원하지만 IMF처럼 최종 대부자(Last Resort)나 정책 감시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학계에선 다자화 기금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 AMF 설립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으로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