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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中 최고 갑부 황광위 (주간조선 2009.05.25)

[국제] 中 최고 갑부 황광위 '궈메이' 前 회장
감옥서 자살 시도한 ‘중국판 박연차’… 그의 대성공과 몰락
지난 4월 29일, 중국 베이징의 교도소에서 한 남자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의 이름은 황광위(黃光裕·40). 지난해 11월 주가조작과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되기 전까지 연 매출 1000억위안(약 20조원)의 중국 최대 가전유통업체 궈메이(國美)를 이끌던 젊은 기업인이었다. 그는 30대 젊은 나이에 맨손으로 430억위안(약 8조60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를 쌓아 중국 최대 갑부 자리에 오르기도 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다행히 그는 감옥에 있던 한 교도관에 의해 발견돼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의 자살소동은 중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광둥성 산터우 출신으로 중학교 중퇴 학력
직원 20만명 거느린 궈메이의 황제가 되다


20만명의 직원과 280개 도시 1200여개 가전양판점을 거느리고 중국 가전유통업계를 평정했던 그도 처음부터 부자였던 것은 아니다. 개혁개방 전이던 1969년 중국 남부 광둥성 산터우(汕頭)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황광위는 어릴 적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너무 가난한 나머지 고철과 플라스틱 병을 수거해서 고물상에 넘기는 양아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16살 되던 해인 1986년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하고 3살 위의 형 황쥔친(黃俊欽)과 함께 집을 떠나 사업을 시작했다. 황광위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세도 안 된 나이에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너무 배가 고파서였다”며 “하지만 돈을 모아 성공해야겠다는 패기와 자신감은 충만했다”고 말한 바 있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홍콩 최고 부자가 된 리카싱 청쿵실업 회장도 그의 역할 모델이 됐다.

▲ 황광위 前 궈메이 회장 / photo 바이두
1986년 황광위 형제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고향인 산터우가 아닌 북부 네이멍구(內蒙古)였다. 네이멍구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는 건조한 사막지대로 남부 광둥성과 기차로 15시간 넘게 떨어져 있다. 당시 황광위 형제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일종의 보따리 무역. 물자가 부족한 북방 네이멍구에서 특정 물품에 대한 주문을 받고 물자가 비교적 풍부한 광둥성까지 직접 가서 등에 짊어지고 날라오는 방식이었다. 개혁개방 전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물자가 부족한 북방에서 팔면 꽤 짭짤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물건 중에는 밀수품도 적지 않아 “밀수로 종잣돈을 마련했다”는 루머는 황광위를 항상 따라다녔다. 그렇게 1년간 일을 해 4000위안가량을 수중에 넣은 황광위 형제는 더 큰 시장인 베이징으로 옮겨 약 100㎡(약 30평) 규모로 궈메이 의류점을 시작했다. 6개월 뒤 의류사업을 접고 당시 수요가 서서히 급증하던 가전제품을 취급하면서 궈메이 성공신화는 시작됐다.


박리다매로 군소업체 쓰러뜨린 ‘가격 도살자’
가전소매점 첫 신문광고 히트… 타고난 사업가


가전제품을 팔기 시작한 황광위 형제가 사용한 판매전략은 박리다매(薄利多賣). 이윤을 적게 남기는 대신 많은 물건을 판매하는 전략이다. 이는 당시 대다수 가전소매상들이 사용하던 후리소매(厚利少賣), 즉 적은 물건을 팔고 이윤을 많이 남기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판매전략이었다. 가전제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던 1980년 후반에는 공급자가 시장을 주도하는 공급자 우위시장이 형성돼 있어 ‘후리소매’ 방식은 당연한 판매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황광위는 ‘시장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가장 많은 소비자에게 판매한다’는 가격정책을 세우고 시장을 공략했다.

형 황쥔친은 주로 가게에서 제품을 관리하고 실무는 동생인 황광위가 담당했다. 황광위는 자전거에 세탁기, 냉장고, TV를 싣고 베이징 골목골목을 누볐다. 가전제품 공급이 달리면 직접 기차를 타고 광둥성으로 가서 물건을 떼어 여행가방에 넣고 베이징으로 짊어 나를 정도였다. 그렇게 황씨 형제가 운영하는 궈메이가 명성을 얻게 되자 그에게 세탁기를 구입한 사람은 다시 그의 가게로 찾아와 냉장고와 컬러 TV를 구입했다. 당시는 가전 3종 세트(세탁기, 냉장고, 컬러TV) 구입 열풍이 불 때여서 황광위는 연쇄적인 판매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반면 그의 박리다매 전략으로 인해 가격경쟁에서 도태된 군소업체들은 그를 ‘가격도살자(屠夫)’로 부르며 소매점 유리창에 벽돌을 던지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궈메이는 또 일개 가전소매점으로는 최초로 신문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개혁개방 전 중국, 특히 보수적인 베이징에서는 “신문광고를 하는 제품은 잘 안 팔리는 제품”이란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다. 하지만 황광위는 그 속설을 뒤집듯 1991년부터 베이징 지역의 유력 신문인 베이징만보(北京晩報)에 ‘가전을 사려면 궈메이로 오라(買家電, 到國美)’는 짧은 문구의 광고를 실었다. 광고단가가 저렴한 대신 주목도가 높은 신문의 가운데 접히는 부분에 광고를 게재해 비용지출을 최소화했다. 결국 황광위의 광고전략은 적중해 궈메이에서 가전제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됐다. 반면 황광위를 따라 뒤늦게 신문광고를 집행한 후발주자들은 광고단가 상승으로 황광위보다 비싼 가격에 광고를 집행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