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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中 최고 갑부 황광위 (주간조선 2009.05.25)

[국제] 中 최고 갑부 황광위 '궈메이' 前 회장
감옥서 자살 시도한 ‘중국판 박연차’… 그의 대성공과 몰락
가전할인마트에서 부동산 개발까지
공격적 인수합병으로 경쟁업체 평정


베이징 가전시장을 평정한 황광위는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다. 1999년 베이징과 가까운 톈진(天津) 진출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으로 궈메이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톈진으로 진출할 때는 현지 유통업체들이 연합체를 구성해 ‘궈메이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는 톈진에서 발을 못 붙이게 한다’고 선언하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경쟁업체 직원이 개업식 매장에 들어와서 진열된 가전제품의 플러그를 뽑기도 하고, 심지어 매장 안에 시한폭탄이 설치돼 있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황광위는 오직 소비자만 바라보고 ‘박리다매’ 원칙을 묵묵히 고집해 진출 3개월 만에 톈진마저 평정했다. 그때부터 일부 언론들은 그를 ‘중국의 샘 월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유통업체 월마트의 창업주 샘 월튼은 ‘매일 가장 낮은 가격(EDLP·Every Day Low Price)’이란 캐치프레이즈로 미국 유통시장을 평정한 인물이다.

또 1999년에는 펑룬(鵬潤)이란 부동산 개발회사를 세우고 부동산과 가전할인마트를 동시에 개척하는 식으로 선양, 광저우, 상하이 등 중국 전역에 궈메이의 깃발을 꽂기 시작했다. 더욱이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그의 자산가치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또 2004년 6월에는 궈메이전기를 홍콩증시에 우회 상장하고 2007년 각각 53억위안과 38억위안을 투입해 업계 3위의 가전유통업체인 용러(永樂)와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는 경쟁업체 다중(大中)을 인수했다. 지난해 3월에는 산둥성을 기반으로 하는 산롄(三聯)의 주식을 인수하면서 가전업계의 확고한 ‘갑’으로 도약했다. 거듭되는 인수합병 성공으로 황광위는 ‘북방의 늑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의 문어발식 확장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그는 ‘상자무역(商者無域·장사꾼에게는 정해진 영역이 없다)’ 논리를 내세워 사업확장을 정당화했다.


정경유착 비리, 정·관계로 불똥
자살 기도 배경 놓고 추측 무성


하지만 2006년부터 몰락의 조짐이 서서히 그를 덮치기 시작했다. 2004년 궈메이를 홍콩증시에 우회상장하는 과정에서 관계 당국에 뇌물을 제공하고 편의를 제공 받았다는 혐의로 사법당국의 수사선상에 오른 것이다. 또 그 문제가 채 해결되지 않은 지난해 11월 28일에는 별도의 혐의로 구속까지 되고 말았다. 추가된 혐의는 경쟁업체 용러를 인수합병할 때 역시 관계당국에 편의제공을 부탁하며 뇌물을 건넸다는 혐의와 대량의 재산을 세탁해 해외로 몰래 빼돌리고 해외 상장회사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세금탈루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또 현지 언론에서는 그의 형 황쥔친이 인수한 제약업체 ‘ST진타이(金泰)’의 주가조작에 그가 공모했다는 말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2007년 상하이증시에 상장돼 있던 ‘ST진타이’ 주가는 42번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면서 530%가 넘는 급등세를 보였다.

▲ 황광위와 그의 가족
그가 구속되면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상당수 고위관료들은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튈까 두려움에 떨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광위의 문어발식 확장 과정에서 정경유착에 관한 추문이 항상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11월 황광위의 전격 구속 후 궈메이의 우회상장에 도움을 준 상무부의 고위관료와 공안부 관계자가 파면되었고 황광위와 사업상 관계를 맺었던 광둥성 정협주석, 저장성 기율검사위의 고위 관료 등이 잇따라 사정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황광위의 배경이 됐던 막강한 고위관료들이 등장하면서 “이번 사건 수사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전격 결단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황광위 구속수감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간부와 고위 관료들 사이에 고급 유흥업소 출입 자제령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현지 언론과 네티즌들은 그의 자살소동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자신과 관련된 인사들이 계속 조사를 받자 스트레스를 못 이겨 자살을 시도했을 것”이란 추측이 대부분이지만 “윗선을 자르기 위해 자살을 강요 당했을 것”이라는 말도 흘러 나오고 있다. 동정론도 비등하고 있다. 맨손으로 부를 일군 황광위는 유일한 취미가 일이었고 골프 등 사치성 오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소박한 인물로 인기가 높았다. 그는 또 중학교 중퇴의 짧은 학력을 극복하기 위해 야간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기도 했고 성공한 뒤에는 고향마을에 400만위안을 쾌척해 비포장 진흙탕 길을 대신할 ‘궈메이대도’란 신작로를 닦아줬다. 지난 2004년 처음으로 중국 최대의 갑부로 등극했을 때 그는 “내가 중국 최대 갑부로 떠오른 것은 주식 공개 때문”이라며 “중국에는 나보다 부자들이 훨씬 많다”고 겸손하게 말하기도 했다. 한 네티즌은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지만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며 “중국식 자본가의 몰락”이라고 말했다.


황광위의 형, 황쥔친

궈메이 실질 창업주 겸 ‘숨은 황제’
15년 전 독립해 부동산 개발 사업


황광위 사건에는 그의 형 황쥔친(黃俊欽) 신헝지(新恒基)그룹 회장도 연루돼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1986년 3살 아래 동생인 황광위의 손을 잡고 네이멍구에서 사업을 시작한 황쥔친도 황광위 못지않은 갑부다. 개인재산만 65억위안(약 1조3000억원)가량으로 2006년 중국 부호 순위에서 20위를 기록했다. 그는 지난 1993년 궈메이의 경영방침을 놓고 동생과 의견이 맞지 않아 쇼핑몰과 대형빌딩 개발을 주로 하는 신헝지그룹을 만들어 분가했다. 신헝지그룹은 베이징과 동북지방 일대에 여러 개의 쇼핑몰을 개발했다. 궈메이 본사도 신헝지그룹이 베이징에 건설한 빌딩에 입주해 있다.

궈메이를 세우는 데는 형 황쥔친의 공이 더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자제품을 다루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TV 모니터와 내부부품을 직접 조립해 TV를 만들어낸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궈메이 컴퓨터 수납 프로그램도 직접 만들었고 신헝지그룹의 부동산 설계에도 참여해 왔다. 하지만 패기 넘치는 동생과 달리 내성적인 성격으로 언론 인터뷰를 극도로 꺼려 그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각에서는 “궈메이의 숨은 황제는 황쥔친”이라는 소문도 흘러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