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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튀는 문제해결 방안/꼭 필요한 생활의 지혜

[Why] 애완 거북이보다 못한 家長 대접받는 것 같다고요… '비굴·능글' 두 단어만 기억하세요 (조선일보 2013.07.27 03:21)

[Why] 애완 거북이보다 못한 家長 대접받는 것 같다고요… '비굴·능글' 두 단어만 기억하세요

대한민국 평범한 아버지들에게 '생존법' 알려주는 책 펴낸 김종태씨의 씁쓸한 충고

‘母系사회 권력자’ 아내, 그 추종자 딸들
통장 맡겼더니 권력도 넘어가 약한 아빠돼
강아지·거북이가 눈병 걸리면 부산떠는데
내가 눈병 걸려 아프면 거들떠도 안봐요

쉬는 아빠 못마땅한 딸들의 합창
아빠는, 전생에 가구였을 거야
그러니 지금도 침대서 꿈쩍도 안하잖아
아빠는, 전생에 청소부였을 거야
그래서 쓰레기 한번도 안치우는 것 같아

나의 ‘깨알 복수’ 아내는 알까
자고 있으면 뽀뽀하는 척 가장해
침을 잔뜩 묻혀서 잠에서 깨우고
샤워후엔 수건 2장씩 사용 빨래감 늘리고…

 


	지난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건물 계단에서 김종태씨가 본인의 책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건물 계단에서 김종태씨가 본인의 책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씨는“집안 여자들이 청일점인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뭉친다”며“딸들이 던지는 의미심장한 말들의 근원은 아무래도 와이프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대한민국 가장(家長) 김종태(46)씨가 하루 종일 밖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 오후 10시. 집에 들어가면 거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피로를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들어갔다간 집안일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터득한 비법은 이렇다. '밝은 얼굴로 들어가선 안 된다. 진이 빠진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하아아아… 회사에서 지금까지 일했는데 진이 촤아아악 빠졌어. 빨리 이불 펴 이불 펴. 나 바로 잘래." 하지만 얼굴빛이 흙빛으로 충분히 바뀌지 않아서일까. 종종 작전은 실패한다. 남편의 연기를 간파한 부인은 그에게 쓰레기봉투를 손에 들려 밖으로 내쫓는다. 김씨는 한숨 길게 내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나는 수퍼맨이 아니야. 크립톤 행성에서 오지 않았어…."

평범한 가장의 비루한 생존법을 담은 책 '숨어서 보는 내 남편의 아찔한 일기장'의 저자 김종태씨를 지난 23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2달 전 출판된 책은 지금까지 1만부가 팔렸고 인터넷 게시물 누적 조회 수가 30만회를 기록했다.

독자들은 "모두가 일상에서 겪을 만한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내려가 유쾌하게 공감했다"는 서평을 올렸다. 김씨는 "이미 모계사회(母系社會)가 돼버린 한국 사회에서 남편들이 살아남는 법은 비굴해지고 능글맞아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비죽비죽 웃었다.

김씨가 몸이 부서져라 밖에서 일하다 들어와도 부인과 두 딸은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밖에서의 가장의 노고(勞苦)를 치하하긴커녕 아빠가 쉬는 모습을 비하하기 바쁘다.

"아빤 전생에 가구였을 거야. 지금도 침대에서 꿈쩍 안 하잖아." 딸들의 이 전생(前生) 시리즈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변주된다. "아빤 전생에 청소부였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쓰레기를 한 번도 안 치우는 것 같아. 아빤 전생에 머슴이었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집안일에 손 하나 까닥 안 하잖아. 아빤 전생에 대장금이었을 거야. 전생에 대장금으로 얼마나 요리를 해댔으면 지금은 음식 만드는 데 손 하나 까딱 안 하잖아."

그럴 때 김씨가 내뱉는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하다. "야! 너랑 나랑 나이가 몇 살 차이가 나는지 알아? 자그마치 스물여덟 살 차이다. 그런데 왜 반말해!" 김씨가 생각하는 가장 큰 배신자는 이 모든 대화를 방임한 채 히죽거리며 듣고 있는 와이프다.

김종태씨는 PCB(회로기판) 만드는 중소기업 동영테크의 설계·개발부 이사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 기계설계과를 졸업한 후 회사에 입사, 20년 동안 주 6일을 밤낮으로 일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중학교 시절 만나 결혼에 골인한 동갑내기 부인과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큰딸, 고2가 된 둘째 딸과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김씨는 스스로 자신의 가족 내 서열을 7위로 규정한다. 아내와 두 딸, 강아지 '백호', 거북이 두 마리에 뒤이은 마지막 순위다.

가족들은 거북이가 눈병에 걸리면 돌봐도 김씨가 눈병에 걸리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가 '눈이 아프다' 그러면 애들이 쳐다도 안 보는데, 거북이가 아프면 온종일 어항 앞에 붙어 있어요." 어느 날 김씨가 퇴근해서 거실에 들어오는데 두 딸은 아버지를 본체만체하고 어항 앞에만 붙어 있었다. 서운한 김씨가 뭐 하느냐고 묻자, 큰딸 정수는 "말 시키지 마. 거북이 눈병 나서 아파"라고 대꾸했다. 김씨는 "아 그러냐. 그 거북이 내가 사준 건데…"라고 중얼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딸들은 엄마 말은 잘 들었다. "방에 들어가"란 한마디 말에 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김씨는 "가정 내 권력을 쥔 사람은 와이프"라고 말했다. 가정은 아빠들에게 낯선 공간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 일만 하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아빠는 자식들에게 엄마만큼 가깝지 않다. 돈을 버는 건 아빠지만 그 돈을 자식들에게 쓰는 건 엄마다. 아이들은 엄마의 말을 거역하면 직접적 타격을 입는다는 걸 안다.


	비굴 · 능글 아버지 상황별 대처 방안
"가정의 평화를 위해 월급 통장을 아내에게 맡겼다"는 김씨는 통장과 함께 가정 내 권력도 아내에게 넘겼다. 김씨는 가정에서 존재감도 영향력도 없는 '허약한 아빠'다. "지금 내가 애들을 콘트롤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어요.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와이프로부터 받는 용돈을 쪼개 애들에게 찔러주는 정도죠." 김씨의 용돈은 10년째 오르지 않고 있다. 월급은 오르지만 애들이 커갈수록 학원비·생활비가 더 빨리 오르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용돈으로 환심을 사기 위해서 비자금이라도 만들어야 할 지경입니다."

김씨가 살아남는 방법은 자존심 버리기다. 자식들과 소통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식들은 아빠에게 다가오지 않으니, 결국 아쉬운 아빠가 자식에게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자를 보내도 답문이 없고, 전화를 해도 받질 않는다. 대학교에 막 들어간 큰딸에게 요즘 학교생활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내가 이야기하면 아빠가 알아?"라는 면박을 받기 일쑤다. "나의 노고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애들인데…."

김씨는 가족 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기 위해 2001년부터 12년 동안 인터넷 게시판 '양들의 모임'에 글을 연재했다. 이 시대의 남편과 가장으로서 겪었던 소소한 일들을 솔직하게 올려 회원분들로부터 폭발적인 큰 인기를 끌었다. 지난 5월엔 그동안 쓴 글들을 모아 책을 냈다. 김씨는 "가족들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토로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인터넷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 사이 초등학교 1학년이던 큰딸이 이제 스무 살 여대생이 됐다.

김씨의 글 속엔 밖에서 업무에 치이고 집으로 들어와도 쉴 수 없는 가장의 삶이 담겨 있다. 남편·아버지·아들이라는 중첩된 역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집에서 아내와 애들 눈치 보면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모습은 애절하다.

그러나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집안에서 왕따를 당해도 그걸 절대 아는 척하거나 우울한 티를 내면 안 돼요. 때론 죽은 척까지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가 꼽은 생존의 비법은 '능글'과 '비굴'이다. 이 두 가지는 엄마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의 가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김씨가 선택한 '만능열쇠'다. 예를 들어 딸의 교복 치마가 짧다고 지적하고 싶을 땐 에둘러 말한다. "하루 사이에 키가 많이 컸구나." 그렇게 말해도 딸로부터 돌아오는 말은 "내 치마가 학교에서 제일 길거든? 아빠는 조선시대 사람 같다"는 비난이다.

"화내지 말고 '아, 하나 더 배웠구나' 그렇게 여기면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대화를 통해 요새 애들이 얼마나 치마를 짧게 입는 줄 알게 되는 거니깐요."

얼마 전엔 자취를 시작한 큰딸이 방학이 됐는데도 집에 오기 싫다고 해 2시간 거리를 차로 달려 딸을 모셔왔다. 게임학과 다니는 큰딸은 컴퓨터 그래픽 특수효과 전문가가 되고 싶어한다. "퍼시픽림 CG 너무 진짜 같지 않냐. 그걸 어떻게 만들었지?" 딸이 좋아하는 화제로 대화를 걸어야 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빠, 그 장면은 그게 아니야." 김씨는 "내가 조용히 있으면 대화가 안 되고, 대화를 하고 싶으니까 어쩌겠어요"라고 말했다. "내가 또 비굴하게 나서야지, 하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면 한두 마디에 대화가 끊기거든요. 딸이 좋아하는 화제를 찾으려고 지금도 노력 중이에요."

부인이 부부관계가 '아친남'(아내 친구 남편)들에 비해서 부족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면 "그거 다 대외용이야. 그 남편 얼굴 좀 보자. 당신도 일주일에 7번 한다고 해"라고 일축해 버린다. "부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기분을 풀죠."

몰래 만든 신용카드가 걸리면 과장된 '퍼포먼스'로 부인의 화를 누그러뜨린다. 이럴 때를 대비해 그동안 버리지 않고 모아둔 유효기간 지난 카드를 들고 부인 앞에 서서 "내가 잘못했어. 그래! 당신 앞에서 빠갤게"라고 외치며 가위질로 이미 쓸 수 없는 카드를 갈가리 잘라내며 넘어간다.

가끔 가장의 권위를 보여주겠다며 하는 반항은 대부분 자신밖에 모르는 소소한 것들이다. '수건 빠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라며 불평하는 아내의 말을 기억했다가 샤워하고 쓸데없이 수건을 두 장씩 쓰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뽀뽀하는 척하며 와이프의 얼굴에 침을 묻히는 것도 한 방법이다. 늦게 퇴근해서 침대에서 곤히 자는 아내에게 다가가 뽀뽀를 가장하고 침을 잔뜩 묻혀 잠에서 깨우고 고소해한다.

밥상머리에서 앉아 아내가 정성껏 만든 반찬을 깨작거리는 방법도 있다. 부인이 막 만든 음식에 젓가락을 대지 않아 부인을 서운하게 만드는 수법이다. 하지만 그도 끝까지 안 먹을 순 없다. 부인이 안 볼 때 하나씩 몰래 먹는다고 했다. "둔한 와이프는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나의 섬세하고 치밀한 복수에 앞으로도 쭉 당하게 되겠죠. 소심한 듯 따르는 남편이 더욱 무섭다는 것을 와이프가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