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관리, 한국 광부에게 이름대신 번호로… 난 광산번호 1622호"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3] 현지서 박사학위 딴 후 귀국해 교수된 권이종씨
1622호는 급료 주는 근거이자 신원 확인 생명 번호
바위에 손 깔렸을 때 한달 넘게 송금 못해 죄책감도
어머니처럼 돌봐주던 현지인 "공부하라" 귀국 말려
자긍심 가질 수 있게 파독광부들에게 '명예' 줬으면
"여기 입술 아래 '광부 문신' 보이세요? 예전에는 턱밑까지 더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5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좀 짧아졌네요."
권이종(73) 한국교원대 명예교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턱 부분에는 굵은 연필로 그은 것 같은 길이 2㎝가량 검푸른 선이 있었다. '파독 광부'로 탄광에서 일하다가 얼굴이 찢겨 석탄가루가 스며들어 생긴 '천연 문신'이라며 "내 삶의 훈장"이라고 말했다.
- 권이종씨가 막장 근무를 마치고 나온 파독 광부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들고서 당시 근무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마르켄눔머(광산번호) 1622'
배치된 곳은 독일 메르크슈타인 지역 아돌프 탄광이었다. 고된 막장 일을 마치고 지상에 올라오면 관리자가 물었다. "벨체 마르켄눔머 하벤 지(당신의 광산번호는)?" 섭씨 30~36도 지하 막장에서 하루 8시간 이상 꼬박 일하다 보면 얼굴은 검은 탄가루 범벅이 된다. 시커먼 겉모습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서 대신 광산번호로 신분을 확인하고 작업량 등을 기록했다. '마르켄눔머'는 급료를 주는 근거이자 사고로 죽었을 때 신원을 확인하는 '생명 번호'이기도 했다.
- 1964년 10월 독일 탄광에 배치된 권이종(맨 왼쪽) 교수가 동료들과 아침에 탄광에 들어가기 직전 찍은 사진. 채탄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어서 얼굴과 작업복이 깨끗하다. /권이종 교수 제공
◇공항에서 발길 돌려 박사학위까지
파독 계약 기간 3년을 마치면 귀국하거나 계약을 연장해 더 일을 할 수 있었다. 권 교수는 귀국을 택했다.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탄광 마을에서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봐줬던 로즈마리 부인이 달려와 "지금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된다. 공부를 하고 가야 더 행복한 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권 교수는 "그때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 광산에서 막장 근무를 마치고 나온 파독 광부의 모습. 얼굴이 온통 석탄가루로 뒤덮여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광산번호로 신분을 식별했다. /한국 파독 광부 간호사 간호조무사 연합회 제공
권 교수는 로즈마리 부인의 도움으로 아헨교원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독일 생활 16년째 되던 1979년 2월 교육학 박사학위를 땄다. 권 교수는 귀국 후 전북대와 교원대 교수, 차관급인 청소년개발원 원장을 지냈다. 그는 "파독 광부 출신이 교수도 되고 차관급으로 출세도 했다"면서 "이런 기회를 준 독일을 늘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독 노동 인정해줬으면"
권 교수는 요즘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올해 상반기 개관하는 서울 양재동 기념관 '한독의 집'(가칭)에 전시할 물품들을 독일 정부의 도움을 받아 실어오고 있는 중이다. 막장에서 일할 때 쓰던 함머(쇠망치), 카일(쐐기) 등을 전시하고 당시 파독 광부 생활을 그대로 재현할 생각이다.
파독 광부 출신으로 권 교수처럼 한국에서 대학교수가 된 사람은 20여명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파독 광부 출신이라는 걸 밝히기 꺼린다. 권 교수는 "광부 출신이라고 알리는 게 학계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 교수는 "어려웠던 시절 나라 경제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명예를 줬으면 한다"면서 "특히 광부 일로 얻은 진폐증으로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낯선 나라서 서로 의지" 광부·간호사 커플 수백쌍 탄생
(조선일보 2013.01.07 03:00)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권이종씨 결혼때 현지신문 보도
- 1971년 독일 아헨의 한 지방신문에 실린 권이종 교수 결혼 사진과 기사. 신문은 같은 고향(전라북도) 출신 남녀가 한국에서는 서로 모르고 지내다 독일에 와서 부부가 됐다고 소개했다. /권이종 교수 제공
권이종 교수는 아헨교원대 학생이던 1971년 독일에서 만난 간호사 출신 백정신(68)씨와 결혼했다. 아내 백씨는 1963년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로 근무한 후 아헨가톨릭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 중이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출신의 결혼은 독일 사회에서도 큰 화제였다.
당시 지역 신문은 "두 사람은 같은 고향인 한국 전주에서 성장해 더러는 같은 거리를 따로따로 걷기도 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고향에서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두 사람이 아헨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낯선 나라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만난 젊은 남녀들은 서로 처지를 위로하며 금세 사랑에 빠졌다. 광부·간호사 부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어도 수백쌍이 탄생한 것으로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는 추산하고 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는 7936명이 독일로 갔고, 간호사는 1960년대 이전 개인적으로 들어간 사람을 포함해 1976년까지 1만1057명이 파견됐다.
지난해 7월 미국 종신직 연방판사에 오른 존 리(45·한국 이름 이지훈)씨의 부모 이선구(73)·이화자(69)씨도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이다. 남편 이선구씨는 1965년 파독돼 아헨 지역 광산에서 일했고, 아내 이화자씨는 1966년 파독 간호사 1기 출신이다. 두 사람은 독일에서 장남 존 리씨를 낳은 후 1970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우리나라가 저렇게 못살았던 때가 있었는지 몰랐어요"
(조선일보 2013.01.07 03:00)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어린이들, 엄마·아빠 손잡고 역사박물관 파독 전시실 찾아
지난해 12월 26일 문 열어… 관람객 2만명 훌쩍 넘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돈 벌러 독일까지 가셨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우리나라가 저렇게 못살았던 때가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제가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것도 그분들 덕분인 것 같아요."(강현구·12·부천남초등학교 5년)
지난달 26일 서울 세종로 옛 문화관광부 건물에 문을 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파독 광부·간호사 전시관이 어린이들에게 현대사의 산교육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파독 광부·간호사 전시관은 '대한민국 성장과 발전'을 주제로 한 5층 상설전시실에 중동건설 근로자 전시관과 함께 67.58㎡(약 20평) 규모로 마련돼 있다.
-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층에 마련된 파독 광부·간호사 전시관을 부모와 함께 찾은 초등학생들이 파독 광부 작업복과 간호복을 입은 마네킹을 바라보고 있다. 전시관에는 광부·간호사의 여권과 월급명세서·일기·편지 등이 전시돼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강북구 수유동에서 온 류경(여·10·우이초등학교 4년)양은 파독 광부 김영식씨가 한국에 두고 온 가족에게 보낸 '딸에게 보낸 엽서'를 유심히 봤다. 엽서에는 '귀여운 딸 문성아! 선영이 보살피고 엄마 말 잘 듣고 있느냐. 아빠는 선영이·문성이 예쁘게 키우려 열심히 일한단다. 부디 만날 때까지 귀엽게 자라거라. 안녕. 77.4.15'라 적혀 있었다. 류양은 "그동안 제가 할아버지·부모님께 응석을 많이 부렸는데 이렇게 어렵게 사셨다는 것을 보니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아이들과 함께 온 공명숙(여·43)씨는 "아이들이 고려·조선 역사는 잘 알면서도 한국의 오늘을 만든 현대사를 모른다"며 "불과 몇십년 전 할아버지·할머니가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찾았다"고 말했다. 김포에서 온 정진국(68)씨는 "하루에 두 끼 먹기도 어려운 시절에 내 친구들도 월남에 파병 가고, 독일에서 광부로 일했다"며 "나도 열여덟에 충청도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식당 종업원을 했는데 그때 생각이 나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역사박물관의 국성하 학예연구사는 "아이들은 불과 50년 전에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이렇게 살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어르신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어려운 시절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다"며 "올해 파독 광부·간호사 50주년을 맞아 관련 기획전시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