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발치에서 걸어오는 인요한 소장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90센티미터의 키와 육중한 체구, 그리고 하얀 피부와 푸른 눈동자가 그를 말해주었다. 회진을 돌고 오는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오늘 인터뷰하기로 한 기자입니다.” “아, 네. 리더십~! 아직 5분 남았죠.”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대기실에는 인요한 소장을 만나러 기다리는
사람이 기자뿐이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던 외국인의 진료를 마치자 비로소 제대로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인 소장은 반갑다는 말과 함께 왜 자신을 인터뷰 하고 싶은지 먼저
묻는다. <리더피아> 인터뷰 인물들의 공통점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진정한 리더라는 것인데, 그들의 삶을 독자들에게 나누고자 함에 인터뷰목적을 두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니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화답한다. “고~맙소잉. 헌데, 제가 리더의 자격이 있나 모르겠어요(허허).” 먼저 순천과 시작된 그의 인연이 궁금했다.
“진외증조부이신 유진 벨 선교사님이 1895년 제물포 땅에 첫 발을
내딛으셨지요. 당시 호남지역은 동학혁명의 발발지로 서양에 대한 반감이 유독 심한 지역이었어요. 거기서 묵묵히 선교와 의료사업을 펼치며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데 산파 역할을 하셨지요. 또 그 무렵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생을 바치기로 한 윌리엄 린튼이 유진 벨의 딸과 결혼, 그러니 나의 할아버지가 되시는 거죠. 이 분들의 만남이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지요.” 린튼가가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뿌리내려왔지만
그들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요구와 기독교인 탄압, 강제 추방 등으로 한동안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1956년 대전기독학관을 세우고, 대전대학교를 개교했으며, 윌리엄 린튼이 초대 학장으로서 마지막 소망을 이뤘다. 선교사이면서, 교육자로, 외교관으로, 언어학자로 한국을 사랑한 봉사자로 48년간 살았다. 그리고 그의 뜻과 바람은 아들인 휴 린튼과 손자 존 린튼, 바로 ‘인요한’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 의사 고시에 합격한 최초의 외국인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교포 학생들조차 본과를 졸업한 후 대부분 국내에서 시험을 치르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미국 의사면허를 따기 위해 그러는 마당에 굳이 한국에서 의사고시를 볼 필요가 있었을까. 주변에서 해주는 이런 말이 오히려 인요한 소장에게는 서운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전공 공부는 두말 할 것 없이 박차를 가했고, 취약한 한자 공부에 더 치중했다. 법의학 과목의 경우는 전공 책을 10번을 넘게 정독하고, 의학 용어에서부터 법 용어까지 한자투성이 책들을 읽기 위해 한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면서 왜 의사가 되고자 했을까. “과학을 엄청 좋아했습니다. 또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했는데, 과학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직업은 의사라고 판단했어요. 사람을 가까이 하고,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의학 말고 또 있나요. 의학은 어디까지나 로빈후드 정신으로 환자를 돌봅니다. 돈 많은 사람에게는 많이 받고, 보험 수가대로 면제인 사람은 면제하는 식으로요. 사실 특진을 많이 하기 보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 도우려고 애쓰는데 쉽지 않아요. 세브란스 병원이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환자의 절반이 무료 진료를 받았어요. 의료보험이 도입되면서 로빈후드 정신이 하향평준화가 돼서 , 사정이 어려워도 무작위로 무료 진료를 할 수도 없지요.” 국제진료센터는 외국인과 내국인 진료를 하고 있다.
외국인은 일년에 평균 2천명 가량 진료하는데,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이 안심하고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 캐나다, 호주, 미국, 중국, 뉴질랜드, 필리핀 등 국가에서 지정한 6개국 대사관의 지정 병원으로 비자 수속에 따른 각종 신체검사를 하고, 준비시켜 주는 업무를 한다. 이곳을 찾는 나머지는 환자인데, 일년에 3만 명 가량이 찾아온다. 한국에 병원이 도입된 것은 1895년 미국 선교사 알렌에 의해서다.
광혜원이 설립됐고,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한국 최초의 근대전 의학교를 설립했다. 1904년 세브란스라는 기부자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개원했고, 외국인 진료소는 1962년에 문을 열었다. 인 소장이 1991년부터 외국인 진료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는데, 가정의학 훈련은 미국에서 받았다. 한국과 미국의 의사자격증 및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가진 유일한 외국인 의사인 셈이다. 사실 그가 일찌감치 의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오랜 세월 동안 결핵 사업을 하신 어머니를 곁에서 봐오면서 다져진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내내 순천에서 자랐지만, 그의 국적이 미국인만큼 미국을 경험해야 하는 것도 그가 치러야 할 통과의례였다. 또, 한국의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미국 대학을 1년간 다닌 후,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다 . 그렇게 시작한 1년 간의 미국 대학 생활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군복무 하는 기분’이나 다름 없었단다.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다. 미국인이면서 미국이 편하지 않은 것,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갈 생각만 가득한 ‘한국인 인요한’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다 인요한 소장은 특히 북한에 관심이 많다.
그는 낙후된 북한 의료산업 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려는 노력을 하는 데 열심이다. 현재까지 21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살피고 돕는 데 아끼지 않는다. “저는 특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1, 2, 3세대 분들께서는 한국을 위해서 해준 게 많지만 저는 그분들 덕택에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은혜를 갚아야 해요. 사실 1984년 아버지께서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시면서 그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 인 소장이 의대 본과 2년에 재학 중이던 시절
부친의 부고에 관한 비보를 접했다. 농촌 교회 건축에 쓰일 자재를 싣고 요양소로 돌아오는 길에 맞은편에서 오던 관광버스가 인 소장의 아버지 차를 들이받아 변을 당한 것이다. 상태는 심각했다. 운전 기사는 음주 상태였고, 순천의 의료 상황은 열악했다. 광주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앰뷸런스 대신 택시를 불러야 했다. 의식 불명의 상태의 응급환자에게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서울에도 몇 군데 밖에 없는 앰뷸런스가 순천에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아버지는 광주 병원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이것은 겨우 20년 전 우리나라 의료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 소장은 응급환자를 대하는 엉성한 의료체계에 분노했고, 또 이것이 응어리로 남아 응급처치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기로 자처했다. “얼마나 빨리, 어떤 조치가 이뤄졌느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오갑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생명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 때 한국의 응급 의료 체계를 혁신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했어요. 지금은 한국 모든 도시와 병원에 앰뷸런스가 있지요. 이 앰뷸런스 체제의 최초 시발지가 바로 순천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4년간 수련의 과정을 지냈다.
사실 미국의 선진 의료체계는 의사로서 로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키워준 순천을 잊어서는 안되며, 자신이 살 곳은 한국이라는 것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게 수련 과정을 마치고, 1991년 미국에서 가정의학 전문의 자격면허를 취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텍사스에 사는 외삼촌 댁에 방문한 적이 있다.
“외삼촌 댁이 살던 텍사스는 한국의 깡촌이나 다름 없어요.
외삼촌은 그곳 3개 군의 응급의료체계 책임자였어요. 응급대원들과 며칠을 지내며 그들의 의료체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텍사스 촌구석의 응급대원들이 한국의 대원들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지만 체계적으로 잘 돼 있었어요. 그들은 오히려 일에 대한 자부심이 훨씬 컸지요. 왜 한국은 그렇지 못할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져 갔어요.” 그렇게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세브란스 병원 의사로 근무하던 중 일은 묘하게도 풀렸다.
순천에 계신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분들이 조의금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지 8년이나 됐는데, 무려 8년간 조의금을 모아 가족에게 전달한 것이다. 4만 달러,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천2백만 원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앰뷸런스 한 대를 마련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또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저희 가족에게는 힘든 일이었지만, 좋은 일로 마무리를 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서양 사람들은 나쁜 일을 가지고 좋은 일로 승화시키려고 하지요. 그래서 앰뷸런스를 사러 미국으로 갔는데, 생각 외로 너무 비쌌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992년 우리집 뒷마당에서 앰뷸런스를 만들었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맞는 한국형 앰뷸런스를요. 제가 돈이 부족했던 것은 오히려 복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생각해요.” 일단 15인승 승합 차량을 응급 치료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을 골자로 했다.
목수와 용접공, 자동차 정비공을 불러 개조에 들어갔고, 환자를 눕힐 공간, 환자 머리맡에 의사가 앉을 자리, 침대 밑과 천장에는 응급 장비 등을 설치했다. 개조된 앰뷸런스는 일주일만에 완성됐다. 그리고 시청 직원을 불러 구조변경 형식 승인도 받았다. 바로 한국형 앰뷸런스의 1호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한국 땅의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 소장의 모친이 운영하는 순천기독진료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순천소방서에 기증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더 긴급한 상황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올바른 활용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는 응급구조 제도가 아예 없는 실정이었어요.
텍사스에서 응급구조 일을 하던 외삼촌에게 도움을 받아 3명의 응급구조대원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셨어요. 1993년 2월 1일부터 3월 12일까지 순천소방서 대원들에게 응급구조사 교육을 실시했어요. 6주 후 첫 응급구조자 양성반 58명을 졸업시켰지요. 첫 한국형 앰뷸런스를 소유했고, 정식 교육을 받은 응급구조사가 긴박한 현장에 출동하기 시작했지요. 그게 전국으로 확산돼 119가 업그레이드 됐어요. 그리고 1994년 어느 중소기업의 회장님이 저를 돕겠다며 전화를 걸어왔어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일조하겠다며 기부를 하겠다더군요. 덕분에 그 기부금으로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서 엔지니어를 데려와서 1995년에 더 완벽한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어요. 현재 이 차는 전국에 4천 여대가 보급돼 있지요.” 북한을 돕는 건 당연한 책임 다시 북한 얘기로 돌아가자면 골자는 이렇다.
인 소장은 이런 기술 역시 북한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의 21차례나 되는 방북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맨 처음 그가 방북을 한 이유도 앰뷸런스 기증을 위해서였다. 1997년 유진벨재단 이사장이자 인 소장의 형 스티븐이 기증 경위를 밝혔다. 이에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은 앰뷸런스 및 결핵 사업을 하는 린튼가의 얘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직접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 정권(김대중 정부)이 들어선 1997년 말 북한은 정식으로 유진벨재단에 결핵퇴치 사업 지원을 요청했다. 인 소장은 2년 전인 1995년 외국인 신분으로 북한에 방문해도 무방하다는 공문을 이미 통일원에서 받아 놓았던지라 본격적으로 북한 의료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2003년까지 약 30만명을 치료했어요. 3백50억원의 기금을 모으고,
아홉 군데에 현대식 수술실과 결핵 검진차 17대, 앰뷸런스를 비롯한 다목적 차량 80여대를 북한에 보냈지요. 그런데 이후부터는 의료 사업이 축소되고 말았어요. 북한 사람들이 ‘양키 고 홈!’을 외치는 바람에 형이 운영하던 유진벨재단이 축소돼 안타까움이 크지요.” 3년 전 이윤구 박사를 주축으로 ‘(사)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가
생겼는데 현재 인 소장은 부회장을 맡고 있다. 유진벨재단은 북한의 결핵을 남한 사람들이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이 정신은 ‘세계 결핵제로운동본부’에서 이어가고 있다. 그의 설명을 빌리자면, 북한은 소모품 사기가 벅차기 때문에 엑스레이 필름, 시약 등을 한 번 갖다 주고 마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주에 중국을 다녀왔어요. 차세대 검진차를 받기 위해서지요.
중국산 미니 버스에 엑스레이 기기를 설치하고, 그것을 바로 노트북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현상실이나 발전실이 필요 없지요. 소모품도 따로 들지 않고, 엑스레이를 찍으면 바로 볼 수 있어요. 이것을 북한에 기증하면 의료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북한의 결핵 인구는 통계를 수집하기 힘들만큼 많다. 대략 우리나라 1965년쯤과 비교해 어림짐작할 뿐이다. 인구의 5%를 결핵 감염 환자로 예상하는데 북한 인구로 치자면 100만명 가량이 된다. 남한은 이제 더 이상 전염병으로 죽지 않는다. 암이나 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이 1, 2위를 다툰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의료계를 돕는 인 소장은
가장 시급한 4가지 과제를 강조한다. 첫 번째는 예방접종으로 막을 수 있는 질병들을 모조리 예방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시행해야 하는 것은 진단 기구들의 현대화이다. 현재 2백43개 군 인민병원이 있고, 9개 도 인민병원이 있는데 군·도 단위의 인민병원의 진단 기구들을 전부 현대화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 번째는 수술실의 업그레이드다. 수술실의 현대화도 진단 기구들의 현대화에 발맞춰야 하며, 네 번째, 남한 의사들의 기술 이전을 목표로 한다. 기술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 됐다면, 사람이 와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북한은 변화를 앞두고 있어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왜 이렇게 빨리 변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 보다는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정작 변해야 할 것은 우리예요. 통일이 된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얼만큼 있나요.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은 대부분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미 외국이나 다름 없을 만큼 우리와 다릅니다. 외국처럼 변한 우리 민족을 대하기 위해 예행 연습이 필요합니다.” 오월의 항쟁에 그가 있었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서양사람이지만 더 가슴 아픈 한이 서려 있고, 또 한국의 역사를 대면한 산 증인이다. 인 소장은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만큼이나 억울한 분노를 자아냈던
1980년 광주 민주 항쟁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내 고향 사람들이 죽어가는 역사의 현장 안에 그가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순천에 있다가 광주로 가서 끔찍한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그는 전남도청에서 열린 시민군과 외신 기자들 간의 기자 회견을 통역하게 됐다. 뜨거운 피가 끓는 스무 살 전라도 사나이에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한국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하기 때문에 왜곡된 보도가 아닌 사실 그대로를 전하는 데 적임자라고 본인 스스로 생각했고, 그 역할에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에 직접 가서 알려야 한다는 아버지를 모시고 대사관 직원들에게 인 소장이 본 광주를 설명했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왜곡된 보도만 나올 뿐 자신이 전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관의 호출이 왔고, 외신 기자를 통역한 인요한을 광주 사태의 주동자로 취급해 추방 명령이 떨어졌다. “총알이 당신 몸은 못 뚫을 거 같아?”
이것이 스무 살 청년을 겁주는 대사관 직원의 한마디였고,
그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추방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국 땅을 떠나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라고 여겼고, 오히려 다시 고향 순천에 내려가 유배 생활을 선택한다. ‘불순분자’ ‘빨갱이’라는 취급을 받으면서 치밀한 감시를 받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광주민주항쟁은 참으로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입니다.
게다가 저에게 떨어진 추방 명령은, 죄 없는 사람에게 감옥형을 살라는 것이나 다름 없었어요. 그 분노에 눈물이 날만큼 억울했어요. 그러나 지금 보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튼튼해지는 데 광주항쟁이 한 몫을 했고, 그것을 목도한 저로서는 우리가 그대로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재야 세력이나 운동권, 진보 세력할 것 없이 광주민주항쟁으로 피 흘린 사람들의 명예를 되새기며 우리 민주주의의 기본을 지켜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그는 스스로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자원했다.
다른 의대생들은 안 하겠다고 농성을 하는 마당에, 인 소장은 교련 교과목의 일부였던 9박 10일 간의 문무대 입소를 자원, 그야말로 고생을 사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 소장은 일상의 안락함에 머물지 않는 삶, 그것을 자신의
숙명이자 소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역경이 닥칠 때마다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주저 없이 꼽는 것이 있다. “온돌방! 시골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람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TV도 나오지 않는 촌구석에서 어른들이 아랫목에 저희를 앉혀놓고 가르친 교육의 힘, 바로 시골 문화의 아랫목 교육 때문에 제가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그가 오히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이라고 해야 할까.
한국 역사의 소용돌이를 모른 채 커버린 신세대 기자로서는 오히려 부끄러워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국의 어른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히려 북한에는 남한 같은 신세대들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아직도 여전히 먹고 사는 것, 전염병에 싸우는 그들이 항시 그의 가슴 한 켠을 짠하게 만드는 듯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신앙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디다.
기독교의 원칙은 사랑이에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종교가 또 어디 있나요.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아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손양원 목사님이 있었기에 우주의 중심은 바로 순천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분이 활동한 곳은 여수와 순천지역이었는데, 인류를 통틀어 이렇게 기독교 원리대로 사신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둥병이라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과 살기로 작정하시고, 피난 길이 열렸는데도 떠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셨지요. 인천상륙작전 대 공산당한테 처형당했지만 그분의 죽음을 통해 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손양원이즘’으로 사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빛과 소금으로 사신 제 인생의 롤모델이시자, 멘토이십니다.” 상대를 감동시키는 끼를 발휘하라 인 소장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진정한 리더십의 덕목으로 ‘겸손’을 꼽는다.
“리더십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다른 사람의 비판을 들었을 때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내공이 아닌가 싶어요. 밥 퍼주는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가 유진벨재단에 1억5천만 원을 기증하시기도 하는 등 지금 저와 친분이 참 깊은데요, 11년 전이었을 겁니다. 우리 집에서 밤새워가며 세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청량리가 별거냐, 미국의 매춘녀나 노숙자들에게서는 총,칼이 나오고 에이즈가 무분별하게 퍼져가는데, 그 게 무슨 대수냐며 제가 신랄하게 비판했죠. 근데 오히려 호탕하게 웃더라고요. 제 말이 맞다며 다 듣고, 끄덕이며 함께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최일도 목사 팬이 되부렀어요. 막 비판을 하는데 ‘네 말이 맞아’라고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리더가 되어야겠지요. 또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한 미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의 책상에는 ‘Restraint(자제)’라고 적혀 있습니다.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아주 급한 일이 터져도 자제하며 판단하는 것이라는 그의 삶의 철학이 잘 베어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겸손, 비판 수용, 자제력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기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 소장은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들도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현답이 돌아온다. “내 그림자가 혹여나 부담이 되진 않을까 싶어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저의 자녀들에게는 제 몸에 흐르는 스코틀랜드의 피, 인디언의 피,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특별히 어떻게 살라고 주문을 하거나 도와주지 않아도 각자의 인생을 잘 살아낼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오히려 저는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IQ보다 EQ를 기르라는 것이죠. 제가 정의하는 EQ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감동시키는 끼’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리더가 되겠습니까. 북한 구호에 보면 ‘가는 길은 험난해도 웃으면서 가자’라고 있어요. 험난해도 웃으면서 가는 민족이 바로 한국 사람이에요. 삶이 힘들다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거나, 나만 아는 이기주의 사고는 비겁한 겁니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호탕하고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인요한 소장의 매일은 참 바쁘다.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랴, 환자들 진료하랴, 북한 의료 사업을 재정비하랴, 그밖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도우랴.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한 달에 한 번 지리산을 찾을 만큼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놀고, 힘들고 지치거나 마음을 다잡을 일이 있을 때마다 지리산에 오른다. 그리고 내일을 살기 위해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어제의 가르침을 새겨 넣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쁘지만 기쁘게 살아가고 유쾌함이 넘친다.
또 유쾌하지만 자신의 험난한 삶의 여정과 국가를 위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는 앞으로도 ‘우리가 가는 길이 험해도 웃으면서 가자’고 우리 손을 힘껏 잡아 이끌어 주고 밀어줄 역할을 할 든든한 한국의 어른이자, 리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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