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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뉴스/세기의 사건사고

힌두쿠시 산맥 땅굴에서 (조선일보 2010.01.08)

힌두쿠시 산맥 땅굴에서

입력 : 2010.01.08 23:31

김광일 국제부장

지금도 힌두쿠시 산맥 등성이에는 짙푸른 눈이 쌓여 있을 것이다. 어린 소년의 눈빛을 한 탈레반은 땅굴에서 언 손을 녹이고 있겠지. 지난 7일 언론에 공개된 CIA 기지 테러범 알 발라위의 눈빛을 보았다. 그도 한때는 그런 소년이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 필자가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 확 끼쳐왔다. 전쟁통에 지붕이 날아가 버린 도요타 지프를 타고 비자도 없이 잠입한 취재였다. 소련군이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수도 카불은 하루가 멀다하고 주인이 바뀌고 있었다. 인근에서 세력을 키운 부족들은 호시탐탐 입성을 노렸다.

풍광은 아름다웠다. 파미르 고원에서 흘러나온 힌두쿠시 산맥은 파키스탄에서 급경사를 이루다가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편편하게 몸을 누이고 있었다. 산등성이 땅굴 속에서 어린 전사들은 새까맣게 때에 전 모포를 천장 선반에서 끌어내렸다. 멍석처럼 말린 모포는 원래 무슨 색깔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침침한 호롱불 밑에 펼친 모포에서는 하얀 빵떡이 굴러 나왔다.

예멘에서, 파키스탄에서, 소말리아에서, 요르단에서, 아프가니스탄 땅굴에서 선발된 어린 전사들은 이 시간에도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굵직한 일은 그들보다는 원래 유복한 출신들이 맡았다.

얼마 전 체포된 알 카에다의 중요 연락책 무하마드 나임 누르 칸은 파키스탄 카라치 대학을 나왔다. 지난 크리스마스날 노스웨스트 항공기 폭파 기도범 압둘무탈라브는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출신이고, 엊그제 아프가니스탄 미군 기지에서 CIA 요원 7명을 숨지게 한 알 발라위는 터키에서 의대를 다녔다. 그들 같은 테러 지원병 300여명이 예멘에 대기 중이란 말도 들린다.

땅굴 속은 밤낮이 구별 안 됐다. 중앙에 난로 1개가 있었지만 개미굴처럼 퍼져 있는 굴 전체를 덥히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음식 찌꺼기 냄새, 총신을 닦았을 기름냄새, 발냄새 따위가 퀴퀴한 모포를 코에 대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옆에 누운 소년과 더듬거리는 몇 마디 영어가 오갔다. 공포와 적개심, 그리고 어린 여동생과 고향에 대한 얘기가 두서없이 섞였다.

그가 나중에 테러범이 됐다면 조끼 속 폭탄을 품고 온몸을 날리기 직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탈레반들은 지하드에서 죽으면 77명의 아리따운 처녀들이 보필하는 천국에서 살게 된다고 교육을 받고 있다. 동물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푸른 강물이 흐르는 천국 그림을 보기도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7일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는 전쟁 중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 자폭 테러범 알 발라위의 터키인 부인 데프네 바이락은 "남편이 자랑스럽다. 신께서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응수하고 있었다.

나토군 정보통으로 잔뼈가 굵은 마이클 플린 소장은 이번 주 보고서를 냈다. "미군 지휘관들은 서방 보호구역 내의 주민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미군은 아프간 지역경제, 전통적 지주(地主)들, 각 부족의 막후 실력자들 같은 지역 사회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간 동부 잘랄라바드시 인근 땅굴 입구에는 무릎까지 푹푹 잠기는 눈이 쌓여 있을 것이다. 파키스탄 쪽 국경 도시 페샤와르에는 지금도 지뢰 때문에 한쪽 발을 잘라낸 소년이 구걸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순교이고 테러인지 구별 못하는 어린 전사들은 북부 산악지역에 있다는 비밀 훈련기지로 뽑혀갈 날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배불리 먹고, 여동생 가르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꼬임을 구별하기엔 바깥세상은 너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