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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미/여행정보

호수 저편에는 동화 속 주인공이 살고 있을까? (조선닷컴 2010.01.30)

호수 저편에는 동화 속 주인공이 살고 있을까?

'거인의 땅'파타고니아
남위 39도 이하 남미 땅 연푸르게 빛나는 빙하… 겁없이 다가오는 펭귄들

"천국을 본 줄 알았어요."

한 외교관이 말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남부에 출장을 갔다 오면서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본 광경을 잊지 못했다. "수많은 호수가 보석처럼 박혀 있고 주변으로 온갖 색깔의 꽃이 피어 있었어요. 그곳이 파타고니아였어요."

안데스 산맥 위를 끝없이 달리는 만년설과 빙하가 만든 옥색의 호수, 금방이라도 사람에게 말을 걸 것 같은 펭귄이 살고 있는 곳, 바로 세상의 끝 파타고니아다.

뉴욕타임스가 '2010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2위로 파타고니아의 포도밭을 꼽은 것은 실수 같다. 신(神)이 빚은 땅에서 인간이 만든 포도밭을 보라는 것은 고려 청자를 새겨진 문양만으로 평가하란 것과 같다.

파타고니아는 '거인(patagon)의 땅'이란 뜻이다. 처음으로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 일행이 1520년 대서양에서 태평양을 잇는 마젤란 해협에 도달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평균신장 180㎝의 '거인' 원주민들이었다.

당시 평균신장이 155㎝ 안팎이었던 스페인 사람들은 겁부터 먹고 만다.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 파타고니아, 지금은 남위 39도 이하의 남미대륙을 가리키는 이름이 됐다.

상상력의 귀재 월트 디즈니는 여기 바릴로체 호숫가에 와서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파타고니아에는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동화 같은 풍경이 도처에 깔려 있다. / 조의준 특파원

새침데기 펭귄에게 도착 인사를=파타고니아의 남쪽 끝 도시 칠레의 푼타아레나스 사람들은 스스로를 '펭귄'이라고 부른다. 남극에서 불어오는 시속 130㎞의 강풍과 6개월에 달하는 겨울, 그 속에서 이곳 사람들은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것이 일상화됐다. 도시의 가로수는 거센 바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솜사탕처럼 동글동글하다.

푼타아레나스에서 1시간 반쯤 떨어진 '오트웨이'에는 매년 11월부터 3월까지 1만5000마리의 '마젤란 펭귄'이 짝짓기와 산란을 위해 몰려든다. 펭귄들은 만화 캐릭터 '뽀로로'를 닮았다. 평균 70㎝의 키의 아담한 체구, 새끼들은 온몸이 보송보송한 회색털로 덮여 있어 상점에 진열된 인형모습 그대로다.

움직일 때도 줄을 맞춰 가고 사람들이 펭귄 서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쳐 놓은 철조망을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숙여 통과한다. 혹시라도 사람이 다가가면 "힉" 하며 거센 콧방귀를 뀌고 새침한 소녀가 마지막 여운을 남기듯 살짝 돌아본다. 이 정도 펭귄으로 만족 못한다면 배를 타고 마그달레나섬으로 가면 된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선 펭귄이 사람을 둘러싸고 관찰한다.

빙하의 얼음을 섞어 마시는 위스키 파티.

쥬라기 공원에 들어오다=이제 빙하의 땅으로 간다. 푼타아레나스에서 버스로 3시간쯤 떨어진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칠레).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빙산들이 호수 곳곳을 떠다닌다. 햇빛에 반사된 얼음 덩어리는 사파이어 색깔을 내 신비롭다.

인간이 손대지 않아 원시 그대로 보존된 빽빽한 삼림을 헤치고 들어가면 빙하가 끌고 내려온 칼슘이 섞여 옥색(玉色)을 띠는 호수들이 나타난다.

하늘 위로 수십m나 곧게 솟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끼이익' 문지방 열리는 소리를 낼 때면 영화 쥬라기 공원처럼 곧 익룡이 날아오고 티라노사우루스가 나무 뒤에서 뛰쳐나올 것 같다. 빙하는 중국 계림의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른 높이만 2000~3000m의 봉우리 3개를 대지의 수호신처럼 공원에 세워놓았다.

3박4일 혹은 4박5일 동안 텐트를 들고 다니며 이 국립공원 주변의 90㎞를 걷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면 전 세계에서 몰려 온 배낭족들과 텐트에서 함께 자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길 수 있다.

파타고니아 야생동물들은 사람을 친구로 안다. 사자·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이 거의 서식하지 않아 경계심이 없기 때문이다. 깡마른 낙타 같은 과나코(야마의 일종)는 관광객 수를 세듯 언덕 위에서 무심히 바라보다 갑자기 겅충겅충 뛰어 사라진다.

타조의 사촌격인 '난두'는 양 떼가 있는 농장으로 들어가려 퍼득거리다 철조망 때문에 못 들어가자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돌아봤다. 부엉이는 관광센터 옆 바위에서 눈을 꿈뻑였고 콘도르는 까마득한 하늘에서 수시로 빙글빙글 돌며 나타났다.

관광객 산책로 옆에 숨어 있는 펭귄.

안데스를 가로질러 만나는 빙하=유명한 빙하도시 아르헨티나의 칼라파테는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버스로 8시간 거리다. 이 정도면 남미에선 '이웃' 도시다. 가는 길은 그 자체로 볼거리다. 수백 m의 절벽 아래로 거대한 평원이 펼쳐지고 다시 만년설의 고봉(高峯)들이 천사의 날개처럼 대륙을 가로지른다.

칼라파테에선 지구 온난화에도 성장하는 '모레노 빙하' 위를 트레킹할 수 있다. 폭 5㎞, 높이 60m, 길이 30㎞에 달하는 거대한 모레노 빙하가 가파른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하늘이 열리고 흰 옷을 입은 천군(天軍)이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 같다. 얼음이 갈라지며 "쿵" 하고 나는 굉음은 거대한 말발굽 소리처럼 대지를 울린다. 압도적인 규모에 숨이 막힌다.

트레킹은 한 여행사가 '독점'을 하고 있어 가장 싼 것이 우리 돈으로 약 14만원이다. 그나마 달러 부족으로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가 최근 폭락했기 때문에 이 정도다. 그래도 트레킹 후 빙하의 얼음을 섞어 주는 위스키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다.


동화의 땅 바릴로체=파타고니아 남쪽 관문이 푼타아레나스라면 북쪽 관문은 바릴로체(아르헨티나)다. 호수 넘어 호수가, 호수 옆에 호수가 있다. 그 사이를 만년설을 품은 안데스 산맥이 조심스럽게 가로지르고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이 눈처럼 수면에 쌓인다. 이 풍경을 월트 디즈니는 고전 만화영화 '밤비'의 배경으로 사용했다.

스위스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라 곳곳에 그림 같은 샬레(Chalet· 스위스의 나무로 된 오두막)가 세워져 있다. 1934년 일찌감치 아르헨티나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특히나 초콜릿이 유명하다. 여름엔 호수 위에서 수상스포츠를 즐기고 겨울엔 유명한 스키관광지로 변신한다.

그러나 진정 잊을 수 없는 것은 노랑·보라 등 갖가지 색깔로 지천에 핀 들꽃과 호수의 주변으로 이어지는 산책코스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볼 수도 있지만 귀찮다면 시내버스를 타고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다. 돌아오는 길에 현지 맥주공장에 들러 톡 쏘는 파타고니아 특유의 맥주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