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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뉴스/정이 있는 삶 안타까운 이야기

공룡 두고 떠난 소년 (조선닷컴 2010.02.01)

공룡 두고 떠난 소년
  • 배종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전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실장

입력 : 2010.02.01 23:08

배종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전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실장

오래 있던 직장을 그만둔다는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떠나고 공룡은
혼자 남아 외롭게 지냈다"라는 흘러간 팝송…
인생 후반전이 다가오고 있다.
겨울이 지나면 꽃피는 날이 또 온다.

며칠 전 둘도 없는 친구로부터 오래 있던 직장을 그만둔다는 전화를 받았다. 요즘 세상에 50대에 직장을 그만두는 건 밤하늘의 별처럼, 바닷가 모래알처럼 흔한 일이다. 섭섭해한다면 오히려 욕심이 지나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친구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했다.

몇 달 전 얼핏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믿었었다.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은 그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전화기를 잡고 무슨 말을 하기는 했는데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그날 저녁 다른 약속 자리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전혀 끼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는 온통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흔히 우리 또래들은 누구나 농담 삼아 "할 만큼 했으니 그만둬야지"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해보는 말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다른 날보다 술을 좀 과하게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젯밤 12시 넘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무슨 뜻이냐"고.

내가 언제 문자 메시지를 보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전화기를 열고 '보낸 메시지'를 찾아보니 정말 문자를 보내긴 보냈다. 옛날 자주 부르고 즐겨 들었던 어느 팝송의 가사 한 구절을. 술 취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또박또박 철자도 틀리지 않았고 대문자 소문자도 정확하게 썼다.

내가 왜 그 밤에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왜 느닷없이 바닷가에 살던 마법의 공룡 퍼프(Puff, the Magic Dragon) 얘기가 담긴 흘러간 팝송이 떠올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사는 이런 내용이었다. "옛날에 한 바닷가에 마법의 공룡과 소년이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소년이 떠나고 공룡은 혼자 남아 외롭게 지냈습니다." 친구가 직장을 그만둔다는 소식이 내 가슴 속에서는 마치 내가 혼자 남은 공룡이 되는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그 친구와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같은 학교를 다니고, 대학교 때는 같은 하숙방에서 뒹굴기도 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서 애들도 동갑이다. 대학 시절 여름방학 때 기차 타고 집에 내려가면서 역 이름을 모조리 외우기도 했고, 수업 빼먹고 용돈 털어 아침부터 지금은 없어진 서울 동대문 야구장에 가서 야구와 관련된 온갖 통계와 기록을 들먹이며 하루 종일 야구 구경을 하기도 했다. 남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치기를 부릴 때에는 서로 오기 싸움을 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약혼식에 갔다가 생각지도 않은 축가를 부르라고 해서 얼떨결에 덜덜 떨며 약혼식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노래를 불렀던 일, 정말 생각하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추억도 있다.

그 친구가 30년 가까이 가던 길을 바꾼다니 도저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들과 헤어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것들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이 들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탄력을 잃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다. 이 나이에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친구는 젊어서 꿈을 가지고 택한 길, 힘들고 괴로운 때도 많았지만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왔던 그 길을 그만두려고 한다. 나도 그 힘든 과정을 한 번 겪어 보았다. 그래서 친구의 소식은 더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 친구도 나처럼 막상 결정을 내리는 순간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까. 나처럼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이틀 후 우리는 소주잔을 두고 마주 앉았다. 먼 길을 떠나기 앞서 조촐한 위로연을 한 셈이다. 우리는 바닷가에 살았던 마법의 공룡 퍼프(Puff)와 그를 사랑한 작은 소년(Little Jackie Paper)처럼 즐거웠다. 여느때처럼 기분 좋게 애들 얘기, 마누라 얘기, 친구들 소식, 앞으로 살아갈 일 등을 열심히 떠들었다. 술이 한잔 돌고나자 머리가 많이 빠져버린 친구는 가발을 쓸까 생각 중이라고 중얼거리고, 나는 눈이 침침해지고 가까운 글은 도저히 안 보여 아무래도 다초점 렌즈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고 투덜댔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들은 가슴 속에 묻어두었지만 굳이 말로 메아리치지 않아도 우리의 대화는 충분했다.

만나고 떠나는 일은 늘 있는 일이다. 이젠 한번쯤 막을 내리고 새로운 막을 준비할 때가 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어차피 인생 전반전은 지나가버렸다. 후반전이 다가오고 있다. 즐겁게 살아갈 설계를 해야 한다.

집으로 향하는데 겨울바람이 매섭다. 이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지나면 또 꽃피고 새 우는 날이 온다. 감사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이유가 없어도 행복해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