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편입학 학원 시장' 평정한 김영 '아이비김영' 회장
입력 : 2010.02.02 15:35 / 수정 : 2010.02.15 16:39
- ▲ photo 정복남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네 번이나 쫄딱 망했지만 재기했다 성공 위해 남 짓밟은 적 없어"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92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딱딱한 숫자부터 나열해보자. 2008년 매출 500억원. 학원 수 전국 36개(직영 21개), 대학 편입학 시장점유율 70% 이상 유지. 13만여명의 편입학 합격자 배출. 직원 수 213명.
1977년 서울 동대문에서 ‘편입학 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한 이후 지금까지 대학 편입학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해온 ㈜아이비김영의 현주소다. ‘김영편입학원’으로 출발해 현재는 미대 편입, 의·치·약학 전문대학원 대비학원(PMS), 이얼싼중국문화원, PIS어학원·유학원, 온라인강좌(IB 김영), 주니어어학원, 출판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 교육전문기업.
아이비김영의 설립자 김영택(金榮澤·59) 회장은 입지전적이다. 제주 출신으로 고려대 교육학과 재학 시절부터 편입 강의를 시작해 이름을 날렸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편입 강사에 재미를 붙여 20대 중반부터 목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더 좋은 학교로 옮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밀려들었다. 4년여 거칠 게 없었다. 1981년 9월, 졸업정원제 실시 이후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가 대학 편입학 불허 방침을 밝히기 전까지 말이다. 당시 김영 선생에게 편입학 강의를 들어 고려대 법대에 합격한 학생 중에는 훗날 변호사를 거쳐 서울시장이 되는 오세훈(한국외국어대에서 옮겨감)이 있었다.
서울 서초동 김영빌딩에서 만난 김영택 회장은 기자에게 ‘김영의 일생, 1951년 12월 13일~’이라는 제목이 붙은 네 장짜리 문건을 건넸다. 첫 장은 태동기, 두 번째 장은 격동기, 세 번째 장은 성장기, 그리고 마지막 장은 비상기였다.
문건의 세로축에는 1957년부터 2007년까지 연도를 표기해놓고 가로축에는 시대 상황, 존재 위치, 학교·학원·활동무대, 사업·사회활동, 의식의 변화·슬로건, 주요사건 1(인생 영향), 주요사건 2(추억·이벤트), 주변 인물 혹은 증인, 특기 사항 등을 적어 놓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연도별로 색(色)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검은색과 회색도 있고 붉은색과 주황색으로 표시된 부분도 보였다. 검은색과 회색 부분은 자칭 ‘인생의 암흑기’였다. 인터뷰는 암흑기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3시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제까지 수많은 취재원을 만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었지만 김영택 같은 사람은 없었다.
첫 번째 시련, 아버지의 죽음
그는 네 번씩이나 처참하게 쫄딱 망했다. 첫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 들이닥친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폐결핵 치료차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집안에선 서울 유학 학비를 대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영택은 서울행을 결심했다. “경기고에 합격하면 누구라도 도와주지 않겠나?”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서귀중학교 때 공부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입학시험 1교시를 마치고 그는 시험장을 뛰쳐나왔다. 확연한 실력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암울한 청소년기의 유전(流轉)이 시작된다.
“전차 타고 가다 종로1가쯤에서 내렸는데 전봇대에 검정고시라고 붙어있는 게 보였다. 고등학교를 건너뛰는 방법으로 학원에 등록했고 독서실 기도 생활을 하며 다음해 경기공전 기계과에 전교 3등으로 붙었다. 경기공전을 1년 다닌 뒤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열아홉 살 때였다. 청계천에서 무협소설 대본업을 시작했다. 한 권당 100원을 받고 빌려줬다. 하루 평균 2000원을 벌었다. 6개월 만에 권리금 20만원을 받고 팔아 장사 밑천을 마련했다. 이른 아침 우연히 셔터가 열리지 않는 것을 기술자가 열어주는 것을 보고 셔터회사를 차렸다. 사무실 마련할 돈이 없었기에 종로5가 오성여관 101호에 숙소 겸 사무실을 두었다. 조바 아줌마(여관 카운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전화가 오면 ‘오성입니다’라고 말하게 부탁했다. 전화가 오면 택시로 이동했다. 출장비만 1500원을 받았는데 그때 첫달 매출이 80만원이었다.”
영택은 셔터수리에서 셔터제작까지 손을 댔고, 큰돈을 벌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군입대를 앞두고 있어 셔터 제작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보병 1사단 시절 영택은 뼈저린 깨달음을 얻는다.
“우연히 인사과에 배정됐다. 기획 일은 분명 내가 고졸이나 대학생 출신보다 더 잘했다. 그런데 내가 중졸이라고 사람 취급을 안해줬다. 학력사회라는 엄중한 현실을 깨달았다. 대학을 안 나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라고 느꼈다.”
그는 군복무 3년간을 ‘상상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1976년 2월 22일 전역 후 종로 2가 은석학원에 등록한다. 영택은 학원에서 가장 나이든 학생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택보다 5~6살이 어렸다. 은석학원에 다니며 검정고시와 예비고사를 통과했고 1977년 고려대 교육학과에 합격했다. 은석학원 시절 알게 된 재수생 중에 심재곤은 현재 아이비김영 상무로 있다.
늦깎이 대학생, 명강사로 명성
고려대 77학번. 공부에 한이 맺힌 그는 ‘타임(Time)반’에 들어가 미친 듯이 공부했다. ‘타임반’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어느날 영문학과 조교가 그를 찾았다. 편입학원에서 교양영어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엉겁결에 강단에 섰다. 여학생 10명에 남학생 1명이었다.
- ▲ 집무실에서 서류를 점검하는 김영 회장.
“여학생들이 쳐다보는 데서 영어를 강의하려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 다음날 학원에 갔더니 수강생 중 달랑 1명만 나왔다. 대실패였다. 한편으론 오기가 생겼다. 혼자서 왜 실패했을까를 생각했다. 강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때 내가 TV 드라마에 빠져있었는데 강의가 드라마 식으로 전달되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그러려면 강의 대본과 콘티가 있어야 하고 연습과 연기가 필요했다.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혼자서 대본을 만들어 콘티를 짜고 연습했다. 그런데 다음달에 다시 연락이 왔다.”
학원 측은 고려대 편입 준비생 40명을 뽑아놨는데 테스트한 대학강사들이 이미 다 실패했다고 했다. 영택이 마지막으로 테스트를 받는 강사 후보였다. 학원 측은 이번마저도 학생들의 반응이 없으면 폐강할 생각이었다. 영택은 ‘드라마틱 강의’를 쏟아부었고 학생들이 기립 박수를 쳤다. 학원장도 박수를 쳤다. 영택은 학생들에게 고백했다.
“늦깎이 대학생이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여러분들 앞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여러분들보다 조금 실력이 나은 상태다. 그러자 학생들이 ‘학원강사가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됐지 박사가 무슨 소용 있느냐’라고 말했다. 그후 계속 가르치게 되었다.”
1978년 1월 기적이 일어났다. 40명 수강생 중 34명이 고려대 편입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대운동장에서 합격자 발표를 보던 학원 수강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리곤 옆에 서있던 ‘대학생 선생님’을 헹가래쳤다. 합격자 발표를 보러 왔던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입소문은 발보다 빨랐다. 김영택이 ‘편입학원 명강사’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8년 그는 동대문에 ‘김영편입학원’을 열었다. 이름의 끝글자 택(澤)을 떼내고 ‘김영’으로 한 것이다. 학원 이름을 지으면서 이름을 연예인 예명처럼 바꿔 ‘김영’으로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발상이다. ‘김영택학원’과 ‘김영학원’, 어떤 이름이 대중에게 어필할까.
두 번째 시련, 전 재산 날리다
어떻게 세련된 이름인 ‘김영학원’으로 지을 생각을 했나. “나는 어려서부터 물과의 악연이 있었다. 여덟 살 때 잠시 부산에 살았는데 그때 사라호 태풍(1959년)을 만났다. 죽을 뻔하다 살았다. 서귀중학교 2학년 때도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제주 출신이지만 나는 지금도 수영을 못한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택자가 ‘못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름에 물과 관련이 있는 택자가 붙어있는 게 무지 싫었다. 택자를 버리면 외우기 쉬울 것 같아 ‘김영’으로 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엉뚱했다. ‘김영학원’은 히트를 쳤다. 김영학원에 등록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선 사진이 신문 사회 면에 실릴 정도였다. 당시 입시 단과반의 수강료는 과목당 1만원. 강사와 학원이 반반을 나눠갖는 구조였다.
“김영학원은 수강료로 1만8000원을 받았다. 내가 1만원을 가져갔다. 4년 동안 한 달 평균 1000만원을 집에 가져갔다. 당시 압구정동의 30평대 아파트가 1500만원 할 때였다.”
1980년 말 5공화국은 졸업정원제를 발표한다. 1981년 서울대 입시에서 사상 최초의 미달 사태가 발생했다. 문교부는 편입으로 미달 인원을 충당하겠다고 발표했다. 영택은 쾌재를 불렀다. 서울대 편입을 준비하려는 학생들이 학원으로 밀어닥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4년간 번 돈을 전부 투자해 학원을 퇴계로 부근에 확장했다. 그해 9월 문교부는 돌연 서울대 편입시험 방침을 철회했다. 동시에 모든 대학의 편입학 시험도 금지시켰다. 영택에게는 날벼락이었다. 한 순간에 모든 재산이 날아갔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5년은 그의 인생에서 회색과 검정색이 교차하는 시기다.
“교육 정책에 너무 실망해 다시는 학원 근처에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명성콘도 영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금방 콘도를 잘 파는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때 친구를 소장으로 앉혀 그의 명의로 모든 자금을 맡겼다. 그러다 1983년 명성사건이 터졌다. 소장인 친구는 모른 체했다. 콘도를 계약한 고객들의 소송이 들어왔고 영택의 전세금과 가재도구 등에 차압이 들어왔다. 그때 둘째 아이를 가진 아내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병원에 갈 돈이 없었다. 아내는 결국 보건소의 ‘구호 출산’ 대상자로 지정받았다. 그날 역삼동 셋집에 가보니 세간살이가 길거리에 나와있었고 주인이 비닐로 덮어놓은 상태였다. 그때 전 재산은 1000원뿐이었다. 병원 갈 때 쓸 택시 비용으로 남겨놓았다. 둘째 아이를 받은 병원장이 내 딱한 사정을 듣고 선뜻 50만원을 줬다. 그 돈으로 거여동에 50만원짜리 셋집을 얻었다.”
목구멍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었다. ‘일당 만원’이라는 전봇대에 붙은 직원 모집 광고를 보고 영택은 약수동에 있는 우산수출회사를 찾아갔다. 이력서에는 국졸이라고 썼다. 샘플 관리 업무가 맡겨졌다. 영택은 ‘김씨아저씨’로 불리는 가운데 묵묵히 일했다. 일당으로 가족을 먹여살린다는 작은 기쁨에 만족하고 있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던가. 어느 토요일 독일인 바이어가 코트라(Kotra)의 소개를 받아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영어가 안되는 여직원이 쩔쩔매고 있었다. 영택이 도저히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영택은 독일인 바이어와 상담을 했고, 최고 금액을 요구했다. 그리고 김포공항까지 택시로 직접 배웅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사장이 불렀다. 사장의 첫마디는 “당신 위장 취업이지?”였다. 영택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1주일 후에 독일인 바이어는 우산 3만개를 주문했다.
사장이 그에게 영업부장직을 제의했다. 영업부장을 맡은 영택은 ‘겨울에 우산을 팔자’는 아이디어로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측과 접촉했다. 갖은 노력끝에 판로를 뚫었다. 연간 3만개의 우산 수주. 겨울철에 우산 공장이 가동되자 회사에 희색이 돌았다.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집중력과 추진력이 탁월한 그는 발군의 영업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른 쪽에 문제를 야기시켰다. 사장은 거래처만 관리하는 다른 영업부 직원들이 못마땅해졌다. 영택은 사장이 자신 때문에 다른 영업부 직원들을 내보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사표를 던졌다. 3개월 만에 또다시 실업자가 됐다. 그때 영택은 “내가 사장이 되면 저렇게는 하지 말자”고 속으로 결심했다.
- ▲ 1977년 4월, 대학 1년 시절 교정에서. 왼쪽이 김영.
영택은 월 30만원을 보장받고 펌프부속회사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영업사원으로 인천공단을 드나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규 거래처 30곳을 만들었다. 그런데 회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새로 온 사장은 또다시 영택만 끼고 돌았다. 자신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 영택은 다시 사표를 쓴다. 전 사장이 다시 회사를 만들어 영택을 불렀다. 이번에는 청주공단을 무대로 영업을 했다.
1986년 아이템플학원 운영을 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다시는 학원 근처도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였지만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학원 운영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많은 오너 일가의 횡포에 실망해 5개월 만에 손을 뗐다. 또다시 실업자 신세. 1987년 졸업정원제가 폐지되고 입학정원제가 부활했다. 영택은 대학편입 시장이 다시 열릴 것으로 확신하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사회생활 경험은 할 만큼 했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동안 영어를 다 잊었으니 영어 감각을 회복하려면 석 달은 걸릴 것이다. 아내는 호구지책으로 신문배달과 화장품 외판을 하면서 몇 개월을 버텨주었다. 투자유치 계획서를 만들어 투자자를 끌어들여 종로5가에 김영대학편입정보센터를 차렸다.”
세 번째 시련, 가슴에 묻은 아들
1987년 첫 해는 고려대가 편입 방침을 취소하면서 위기를 겪었다. 지분에 얽힌 내분을 수습한 뒤 1988년부터 김영편입학원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공채 직원도 새로 뽑았다. 그러나 1989년 또다시 시련이 들이닥쳤다. 구호출산으로 태어난 둘째 아들(명우)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다시 일어섰다.
1990년 김영편입학원 출신들이 전국 대학 편입시험에 560명이나 합격했다. 이후 18년간 사업은 승승장구였다. 1994년 고려대에 복학해 졸업장도 받았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발생한 수익이 200억원에 이르렀다. 이후 김영의 일생은 ‘붉은 색’ 일색. 사업의 영역은 대학편입학원에서 10여개의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그의 활동 범위도 학원을 넘어섰다.
“내 인생은 끝없는 도전이었다. 도전의 역사이고, 꿈의 역사다. 나는 후배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전하라고 말한다. 도전을 못하는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 사는 것과 같다. 내가 텝스(TEPS)와 ‘이얼싼’에 도전한 것이 그런 예다. 내가 도전해야만 조직에 신진대사가 일어난다. 현재 공채 직원을 23기까지 뽑았는데 그들이 성공에 대한 꿈을 갖게 하려면 내가 도전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2년 항목에 ‘재물에 대한 한풀이 의식’이라고 적어놓았다. 한풀이 의식이 뭘까. “1992년 은행에 입금 못 시킨 현금 다발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내방에서 소주를 마신 뒤 현금 다발을 벽에다 던지며 혼자 울부짖었다. ‘돈의 노예가 안되겠다’ ‘너로 인해 다시는 눈물 흘리지 않겠다’ 등을 다짐했다.”
제주도 출신으로 성공한 교육사업가 김영택. 아이비김영이 안정궤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그는 회사를 자신이 뽑아 키운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겼다. 대신 자신은 사회사업과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제주도 개발 프로젝트 입안에 관여하며 대정부 로비책임을 맡기도 했다. 중국 진출과 카지노사업과 항만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이번엔 내부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매출이 500억원이었는데 영업이익을 6% 냈다. 보통 영업이익이 30% 수준인데. 알고 보니 직원들이 회사를 차지하려고 계획적으로 일을 꾸몄던 것이다.”
네 번째 시련, 직원들의 배신
외부 활동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직원들이 다른 생각을 품은 것 아니냐. “솔직히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 직원들에게 공짜 지분을 30%나 줬는데도. 그들은 회사를 뺏으려고 사조직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사람을 너무 믿었다.”
김영택은 2009년 7월에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현재는 모든 게 다 수습된 상태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뭘 느꼈나. “인생을 살다보면 반드시 막힐 때가 있다. 그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골프가 안 맞으면 그립과 스탠스부터 다시 점검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해 영업실적으로 말해줘야 한다. 지금 인생 5막이 시작됐다. 클라이맥스를 향한 5막이다. 재미있게 해주려고 이번 일이 주어진 것 같다.(웃음)”
한국 현대사에서 1910~195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다른 체제 속에서 혼돈과 전란과 가난을 몸소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영택 회장은 가장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산 사람에 속할 것 같다.
“나는 성공하면서 한번도 남을 밟고 일어서본 일이 없다. 수많은 부침(浮沈)을 거듭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내가 상처를 받으면 받았지. 남을 짓밟지 않고 살아온 것은 축복이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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