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라이프] 바보 아버지_고정일
왜 그땐 미처 몰랐을까 '아버지의 자리'
당신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그래야만 했습니다. 항상 뒤돌아선 곳, 안 보이는 곳에서 우셨습니다. 자식이 밤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야 보고 싶고, 그 분의 말씀은 불가능한 곳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지난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였고, 지금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내 인생을 묵묵히 이끌고 지탱해 준 우리들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 ▲ 1954년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고희성), 새어머니(정이순)와 함꼐 사진관을 찾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출판인 고정일
사람들은 아버지를 등신이라고 불렀다. 몸집이 작고 안경도 쓸 수 없을 만큼 약시인 데다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누구든 대차게 나오면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리 억울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
일제 때 아버지는 수레에 된장을 싣고 팔러 다녔고 해방이 되자 군고구마 장사를 했는데, 때때로 못된 사람을 만나 된장통이 엎어지거나 군고구마 항아리가 박살나기도 했다. 만만해 보인 아버지는 이런 행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5살짜리 어린 내 가슴에는 그때마다 분노가 치밀었고, 사람들 말대로 아버지는 정말 등신인가보다 생각하며 슬퍼 울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노부모를 두고 어찌 피란가느냐며 어머니에게 애들을 데리고 먼저 떠나라 했다. 이틀 뒤 반나절거리 외가를 눈앞에 두고 우리 가족은 중공군과 미군 사이에 꼼짝 못하게 갇히고 말았다.
어느 날 밤, 한 차례의 섬광이 엄청난 폭발 굉음과 함께 우리가족을 순식간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포연 속에서 나는 참혹하게 조각난 두 동생과 짓이겨진 어머니의 몸을 보았다. 나는 전쟁 고아가 되어 한겨울 눈보라 벌판을 헤맸다. 그때 나는, 이 모든 불행이 사람들 말대로 등신 같은 아버지 때문이라고 원망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종로5가 적산가옥 지하 단칸방을 빌려 아버지는 동대문 시장에서 꽁치장사를 하시고, 나는 영창서관 사동으로 일했다. 동네아이들에게 내 별명은 언제나 ‘꽁치’였다.
그 시절 아버지는 지나가는 엿장수에게서 고물 빅타유성기, LP판 ‘슈베르트 가곡집’, 달력에서 떼어낸 ‘밀레의 만종’, 일어판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을 사들였다. 아버지는 비가 와 장사를 공치는 날이면 온종일 그것들을 즐겼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 짓곤 한다. 소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등신이라 불린 아버지에게 그렇듯 숨겨진 감성이 있었다니….
아버지 회갑 때였다. 후취로 와서 무던하게 살아온 새어머니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시라고 나는 적잖은 돈을 마련해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가 곤경에 빠졌다는 거짓 사정에 속아넘어가 그 돈을 몽땅 줘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전에도 수없이 있었다.
그즈음 사무실로 찾아온 아버지께 나는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등신이라고 하지요!”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않다가 “나, 간다” 한마디를 던지고는 곧장 발길을 돌리셨다. 몹시 쇠약해진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그날따라 무척 힘없어 보였다.
그 얼마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해왔다. 아들이 아버지를 힐책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었다. “아버지, 잘하셨어요.” 그때 왜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했을까. 아버지는 조그만 바람에도 고개를 숙이는 여린 들풀이셨다. 사람들에게 멸시당할 때마다 아버지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였을까.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당신보다 더 어려운 이를 도우려 애쓴 아버지, 그 선한 아버지가 그립다. 내 가슴에 고인 아버지의 눈물이 오늘도 내 마음에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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