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두 DJ 이야기_DJ 되려고 공대 간 男 DJ가 좋아 일본 간 女
입력 : 2010.04.10 03:11 / 수정 : 2010.04.10 10:43
"DJ는 고고학자와 패션 MD의 중간쯤 돼요. 사람들이 지나칠 법한 음악 레코드를 모아서 의미를 찾고 새 음악으로 만들어 그걸 유행시킵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디제이(Disc Jockey)가 없어지는 줄 알았다. 장발(長髮)의 다방 DJ는 언제부턴가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 아니면 '추억의 성인가요' '7080' 등의 수식어를 달고 '옛것'으로 남아있었다. DJ는 댄스 그룹이나 가수 이름 앞에 붙어 명맥을 가늘게 이어갔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 새로운 DJ들이 대거 나타났다. '7080'에 태어난 아이들이 2세대 DJ로 자란 것이다. 음악을 선곡해 틀어주고 꼭 필요한 순간 적절한 멘트를 날리면 됐던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DJ 되려고 공대 간 '소울스케이프'
박민준(31)은 'DJ 소울스케이프'다. 보이지 않는 것(soul)을 그려낸다는 뜻이다.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 태어나자마자 홍콩으로 가 5살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민준은 "홍콩은 서구와 아시아를 결합시킨 음악과 영화가 많았다"고 했다.
그에게 음악을 들려준 이는 작곡을 전공한 어머니다. 집에선 늘 진공관 오디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에서부터 최인희·양희은·송창식의 포크송까지 나왔다. 카세트테이프에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하는 게 취미였다.
박민준은 중학생 땐 힙합 음악에 빠져들었다. 기웃거리던 서울고 근처 음반가게엔 힙합 음악을 녹음한 불법 복제 테이프가 널려 있었다. 그곳엔 서초고·서울고·상문고에서 '힙합 좀 듣는다'는 고등학생들이 드나들었다.
그는 1995년 그 가게에서 'DJ 레슨 비디오'를 샀다. 비디오를 틀자 화면에서 헐렁한 옷을 입은 미국인이 나왔다. 턴테이블과 믹서를 이용해 힙합 음악을 빠르게 틀었다가 느리게 틀고 판을 바꿔가며 일종의 '메들리 곡'을 만들어냈다.
손가락으로 LP판을 짚는 듯싶더니 '삐비빅''지지직' 하는 잡음을 넣고 가랑이 사이로 판을 돌리는 기교(技巧)까지 선보였다. 화면 속 젊은이들은 같은 음악을 틀더라도 기술과 취향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
디제잉에 열중하다 난데없이 감자칩을 먹는 식의 위트와 반항기까지 갖췄다. 당시 미국은 이미 동부와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힙합 DJ 크루 X-men·ISP가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박민준은 참을 수가 없었다.
DJ 턴테이블과 믹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DJ 턴테이블은 일반 음악감상용과는 내부가 다르다. 박민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다. 종로 세운상가를 뒤져 1996년 고물 턴테이블을 샀다.
이상하게도 부모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제가 이걸 만지작거려도 '음악 하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이진 않으셨어요. 기타를 연주하거나 노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상문고 DJ 박민준은 방 안에서 독학에 나섰다. 판을 어떻게 짚어야 소리가 나는지, 녹음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버튼 가득한 믹서가 음향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가 배워야 할 기술에는 끝이 없었다.
박민준은 아예 공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변환, 스튜디오 엔지니어링의 원리가 뭔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는 1998년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캠퍼스에선 조용히 수업만 듣고 빠져나왔다.
당시 홍대의 힙합클럽 마스터플랜에선 공연이 끝나면 관객 아무나 올라가 턴테이블을 만지고 랩을 할 기회가 있었다. 박민준은 "5~6명 정도가 턴테이블을 쓸 줄 알았다"며 "그들이 2세대 DJ의 시초"라고 했다.
그는 2000년 9월 180g Beats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4장의 앨범을 냈다. 그는 아날로그 레코드에서 음원을 뽑아내 새로운 곡을 만든다. "DJ는 고고학자와 패션 MD의 중간쯤 돼요. 사람들이 지나칠 법한 음악 레코드를 모아서 의미를 찾아내고 새 음악으로 만들어 그걸 유행시킵니다."
그가 지금까지 모은 LP판은 1만장이나 된다. 회현지하상가 레코드 가게에서 샀다. 제일 아끼는 레코드는 한국 사이키델릭 록 그룹 히식스의 '히식스와 함께 고고를' 앨범이다. 요즘엔 1960~7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빠져 있다.
"해외에서 제3세계 음악이 주목받고 있어요. 아프리칸 록, 에티오피아 재즈 같은 장르처럼 아시아의 60~70년대 록도 관심사죠. 특히 한국음악은 미군기지 영향을 받아 더 독특해요. 발굴되지 않은 것들도 많고요." 박민준은 "신성락 선생님의 아코디언 연주에서 '유치뽕짝'이 아닌 재즈·소울·펑크의 진수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작년 가을에는 대선배 옥희와의 인연으로 예우회를 찾아갔다.
신중현·김희갑·히식스·키브라더스 등 쟁쟁한 음악인의 친목모임이다. 박민준은 그때 그 음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겠다고 나섰다. 시켜만 주면 홍보와 잡일도 맡겠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귀여워 해주세요. 제가 모은 앨범들을 꺼내 보이면 자기 음반인데도 '이런 게 있었느냐'고 묻는 경우도 많아요. 주옥같은 문화유산이 묻혀버리고 일본 등지의 해외 컬렉터들이 싹쓸이해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DJ 되려고 공대 간 '소울스케이프'
박민준(31)은 'DJ 소울스케이프'다. 보이지 않는 것(soul)을 그려낸다는 뜻이다.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 태어나자마자 홍콩으로 가 5살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민준은 "홍콩은 서구와 아시아를 결합시킨 음악과 영화가 많았다"고 했다.
그에게 음악을 들려준 이는 작곡을 전공한 어머니다. 집에선 늘 진공관 오디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에서부터 최인희·양희은·송창식의 포크송까지 나왔다. 카세트테이프에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하는 게 취미였다.
박민준은 중학생 땐 힙합 음악에 빠져들었다. 기웃거리던 서울고 근처 음반가게엔 힙합 음악을 녹음한 불법 복제 테이프가 널려 있었다. 그곳엔 서초고·서울고·상문고에서 '힙합 좀 듣는다'는 고등학생들이 드나들었다.
그는 1995년 그 가게에서 'DJ 레슨 비디오'를 샀다. 비디오를 틀자 화면에서 헐렁한 옷을 입은 미국인이 나왔다. 턴테이블과 믹서를 이용해 힙합 음악을 빠르게 틀었다가 느리게 틀고 판을 바꿔가며 일종의 '메들리 곡'을 만들어냈다.
손가락으로 LP판을 짚는 듯싶더니 '삐비빅''지지직' 하는 잡음을 넣고 가랑이 사이로 판을 돌리는 기교(技巧)까지 선보였다. 화면 속 젊은이들은 같은 음악을 틀더라도 기술과 취향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
디제잉에 열중하다 난데없이 감자칩을 먹는 식의 위트와 반항기까지 갖췄다. 당시 미국은 이미 동부와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힙합 DJ 크루 X-men·ISP가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박민준은 참을 수가 없었다.
DJ 턴테이블과 믹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DJ 턴테이블은 일반 음악감상용과는 내부가 다르다. 박민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다. 종로 세운상가를 뒤져 1996년 고물 턴테이블을 샀다.
이상하게도 부모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제가 이걸 만지작거려도 '음악 하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이진 않으셨어요. 기타를 연주하거나 노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상문고 DJ 박민준은 방 안에서 독학에 나섰다. 판을 어떻게 짚어야 소리가 나는지, 녹음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버튼 가득한 믹서가 음향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가 배워야 할 기술에는 끝이 없었다.
박민준은 아예 공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변환, 스튜디오 엔지니어링의 원리가 뭔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는 1998년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캠퍼스에선 조용히 수업만 듣고 빠져나왔다.
당시 홍대의 힙합클럽 마스터플랜에선 공연이 끝나면 관객 아무나 올라가 턴테이블을 만지고 랩을 할 기회가 있었다. 박민준은 "5~6명 정도가 턴테이블을 쓸 줄 알았다"며 "그들이 2세대 DJ의 시초"라고 했다.
그는 2000년 9월 180g Beats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4장의 앨범을 냈다. 그는 아날로그 레코드에서 음원을 뽑아내 새로운 곡을 만든다. "DJ는 고고학자와 패션 MD의 중간쯤 돼요. 사람들이 지나칠 법한 음악 레코드를 모아서 의미를 찾아내고 새 음악으로 만들어 그걸 유행시킵니다."
그가 지금까지 모은 LP판은 1만장이나 된다. 회현지하상가 레코드 가게에서 샀다. 제일 아끼는 레코드는 한국 사이키델릭 록 그룹 히식스의 '히식스와 함께 고고를' 앨범이다. 요즘엔 1960~7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빠져 있다.
"해외에서 제3세계 음악이 주목받고 있어요. 아프리칸 록, 에티오피아 재즈 같은 장르처럼 아시아의 60~70년대 록도 관심사죠. 특히 한국음악은 미군기지 영향을 받아 더 독특해요. 발굴되지 않은 것들도 많고요." 박민준은 "신성락 선생님의 아코디언 연주에서 '유치뽕짝'이 아닌 재즈·소울·펑크의 진수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작년 가을에는 대선배 옥희와의 인연으로 예우회를 찾아갔다.
신중현·김희갑·히식스·키브라더스 등 쟁쟁한 음악인의 친목모임이다. 박민준은 그때 그 음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겠다고 나섰다. 시켜만 주면 홍보와 잡일도 맡겠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귀여워 해주세요. 제가 모은 앨범들을 꺼내 보이면 자기 음반인데도 '이런 게 있었느냐'고 묻는 경우도 많아요. 주옥같은 문화유산이 묻혀버리고 일본 등지의 해외 컬렉터들이 싹쓸이해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 ▲ 요즘 DJ들 역시 아날로그에 대한 애정으로 넘쳤다. DJ 소울스케이프는 서울 방배동의 작업실에서 지금까지 모은 1만장의 비닐 레코드를 꺼내 보였다(오른쪽). DJ 네오네시는“비닐 레코드로 디제잉하는 턴테이블은 손때를 타는 정직한 기계인데, 요즘 한국 대형 클럽은 다루기 편한‘CDJ’일색이라 아쉽다”고 했다(왼쪽).
◆일본·유럽에서 활동한 여자 DJ, 네오네시
강인혜(25)는 'DJ 네오네시(neonethy)'다. 부르기 편하라고 이름을 '네네'라고 지었다가 최근에는 뜻을 풀어쓰고 있다. 네시(nethy)는 스코틀랜드 호수에 사는 괴물 네시(Nessie)에서 따왔다.
DJ계의 '새로운 괴물'이란 뜻이다. 그는 "평소 남자 DJ들보다 센 음악을 많이 틀기 때문에 괴물"이라고 했다. 강인혜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신도시에서 자랐다. 일산과 가까운 서울 은평구의 선정고를 졸업했다.
학창시절엔 시력이 나빠 늘 안경을 쓰고 다녔다. 공부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내성적인 탓에 비밀을 주고받을 친한 친구마저 없었다. 강인혜는 "나는 '학교에서 아무런 존재감 없는 안경 낀 여자애'였다"고 했다.
대신 잘하는 게 두 가지 있었다. 미술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영어 대신 배운 일본어였다. 미대 진학을 준비했지만 가고 싶었던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두 번이나 떨어졌다. 강인혜는 재수 기간에 변신했다. 홍대 앞 미술학원에 다니다가 홍대 특유의 자유로움에 빠져버린 것이다. 강인혜는 그 뒤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고3 겨울방학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일주일 동안 버티기로 했다.
돌아와선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가 밴드 보컬을 하기도 했고 '예술한다는 언니'를 통해 홍대앞 전시장 '쌈지 스페이스'에서 2005년 개인전도 열었다. 2005년 여름 한예종 시험에 두 번째 낙방하자 강인혜는 일본으로 떠났다.
"부모님은 평소에 '대학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편이어서 승낙을 해주셨어요. 대신 가서 절대 나쁜 짓은 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강인혜는 삿포로에서 반년을 놀다 이듬해 도쿄로 옮겼다.
시부야 클럽들은 홍대 클럽보다 화려하고 규모도 컸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큰 클럽 '아게하'는 강남 대형 클럽의 10배 크기다. 강인혜는 클럽에서 음악도 듣고 일본인 친구도 사귀었다. '홈 파티'가 열리면 집에 모여 밤새도록 예술 영화를 보거나 맥주·와인을 마셨다. DJ용 턴테이블도 그때 처음 봤다.
'비트 매칭(Beat Matching)'은 디제잉의 한 기술이다. 곡을 연결할 때 박자가 서로 다른 음악 두 곡을 속도를 맞춰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강인혜는 턴테이블을 만져본 지 한 시간 만에 이 기술에 성공했다.
"힙합 음악은 그 자체로 리듬감이 있잖아요. 속도를 맞추지 않고 곡을 빨리 넘겨줘도 어색하지 않아요. 대신 전자 음악은 바로 곡을 넘기는 게 아니라 흐름을 잘 섞어서 틀다가 넘겨줘야 해요."
강인혜는 한국어 과외로 번 돈을 털어 중고 DJ 장비를 사들였다. 턴테이블 두 대, 믹서 한 대, 스피커를 합쳐 8만엔을 줬다. 방 안 DJ 강인혜는 그해 가을 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시부야의 작은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을 받지 않았다. 1년 후부터 '네네'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8년 일본 최대 연예기획사 에이벡스(AVEX) 관계자가 비로소 연락을 해왔다. 이 기획사에서 1년에 3~4번씩 내는 클럽용 음반인 '하우스네이션'의 전속 DJ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 빨간 벽돌 건물로 걸어 들어가면서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나요. 하우스네이션은 이쪽에선 세계적인 '브랜드'예요."
강인혜는 그 해 3월부터 2009년 2월까지 11개월간 전속 DJ 생활을 했다. 하우스네이션 음반이 발매되면 기획사가 일본 전역의 굵직한 클럽에서 홍보 목적의 파티를 여는데, 전속 DJ들이 그 음반을 가지고 제각각의 스타일로 공연했다. 전속 DJ는 네네를 포함해 4명이었고 모두 여자였다.
강인혜는 하우스네이션 음반이 CD로만 발매되기 때문에 'CDJ'장비 다루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LP판을 쓰는 턴테이블처럼, CD로 디제잉 할 수 있게 만든 장비다. LP판을 쓰는 턴테이블은 미세한 진동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주변에 벽돌을 쌓아둬야 하지만 CDJ는 다루기도 쉽고 간편하다.
그는 음악 스타일도 바꿨다. "평소에는 어둡고 비트가 강하고 음역의 높낮이 차이가 큰, 말 그대로 센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기획사에서는 예쁘고 귀여운 느낌의 하우스 음악을 원했어요. 프로듀서가 원하는 수준이 될 때까지 처음 3개월 동안은 연습만 죽어라 했지요."
강인혜는 처음으로 밥벌이의 고충을 알았다. "이전에는 내가 원하는 음악만 틀고 반응이 없으면 '관객들이 못 놀아서 그런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좋은 DJ는 자기 멋에 취하기보다는 나를 초청한 오너(owner)나 주최 측의 콘셉트·분위기를 충분히 맞춰서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낼 줄 알죠."
강인혜는 지난해 영국으로 갔다. "얼굴이 예쁘다고 실력도 안 되는 여자 DJ가 메인 플로어에 서는 걸 보고 좌절감을 이기지 못했다"고 했다. 런던의 골드스미스 예술대학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보류하고 올해 초 한국으로 왔다.
"영국·이탈리아 등지에서도 DJ 생활을 계속했지만, 몸과 마음이 지쳤어요. 영국에선 몸무게가 37㎏까지 떨어졌어요." 그는 당분간 한국에서 의류 브랜드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알려지고 나서 한국 클럽에서 초청해 공연을 하러 오면 엄마가 새벽 4~5시에 데리러 오셨어요. 아버지는 무관심한 척했지만 재작년 집에 갔더니 어떤 DJ 인터뷰 기사를 오려서 책상 위에 올려두셨더라고요." 강인혜는 올해 굵직한 파티를 5차례나 했다. 가장 최근에는 아디다스 오리지널 라인 디자이너인 제레미 스캇 내한 파티에서 공연했다.
강인혜(25)는 'DJ 네오네시(neonethy)'다. 부르기 편하라고 이름을 '네네'라고 지었다가 최근에는 뜻을 풀어쓰고 있다. 네시(nethy)는 스코틀랜드 호수에 사는 괴물 네시(Nessie)에서 따왔다.
DJ계의 '새로운 괴물'이란 뜻이다. 그는 "평소 남자 DJ들보다 센 음악을 많이 틀기 때문에 괴물"이라고 했다. 강인혜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신도시에서 자랐다. 일산과 가까운 서울 은평구의 선정고를 졸업했다.
학창시절엔 시력이 나빠 늘 안경을 쓰고 다녔다. 공부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내성적인 탓에 비밀을 주고받을 친한 친구마저 없었다. 강인혜는 "나는 '학교에서 아무런 존재감 없는 안경 낀 여자애'였다"고 했다.
대신 잘하는 게 두 가지 있었다. 미술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영어 대신 배운 일본어였다. 미대 진학을 준비했지만 가고 싶었던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두 번이나 떨어졌다. 강인혜는 재수 기간에 변신했다. 홍대 앞 미술학원에 다니다가 홍대 특유의 자유로움에 빠져버린 것이다. 강인혜는 그 뒤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고3 겨울방학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일주일 동안 버티기로 했다.
돌아와선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가 밴드 보컬을 하기도 했고 '예술한다는 언니'를 통해 홍대앞 전시장 '쌈지 스페이스'에서 2005년 개인전도 열었다. 2005년 여름 한예종 시험에 두 번째 낙방하자 강인혜는 일본으로 떠났다.
"부모님은 평소에 '대학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편이어서 승낙을 해주셨어요. 대신 가서 절대 나쁜 짓은 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강인혜는 삿포로에서 반년을 놀다 이듬해 도쿄로 옮겼다.
시부야 클럽들은 홍대 클럽보다 화려하고 규모도 컸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큰 클럽 '아게하'는 강남 대형 클럽의 10배 크기다. 강인혜는 클럽에서 음악도 듣고 일본인 친구도 사귀었다. '홈 파티'가 열리면 집에 모여 밤새도록 예술 영화를 보거나 맥주·와인을 마셨다. DJ용 턴테이블도 그때 처음 봤다.
'비트 매칭(Beat Matching)'은 디제잉의 한 기술이다. 곡을 연결할 때 박자가 서로 다른 음악 두 곡을 속도를 맞춰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강인혜는 턴테이블을 만져본 지 한 시간 만에 이 기술에 성공했다.
"힙합 음악은 그 자체로 리듬감이 있잖아요. 속도를 맞추지 않고 곡을 빨리 넘겨줘도 어색하지 않아요. 대신 전자 음악은 바로 곡을 넘기는 게 아니라 흐름을 잘 섞어서 틀다가 넘겨줘야 해요."
강인혜는 한국어 과외로 번 돈을 털어 중고 DJ 장비를 사들였다. 턴테이블 두 대, 믹서 한 대, 스피커를 합쳐 8만엔을 줬다. 방 안 DJ 강인혜는 그해 가을 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시부야의 작은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을 받지 않았다. 1년 후부터 '네네'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8년 일본 최대 연예기획사 에이벡스(AVEX) 관계자가 비로소 연락을 해왔다. 이 기획사에서 1년에 3~4번씩 내는 클럽용 음반인 '하우스네이션'의 전속 DJ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 빨간 벽돌 건물로 걸어 들어가면서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나요. 하우스네이션은 이쪽에선 세계적인 '브랜드'예요."
강인혜는 그 해 3월부터 2009년 2월까지 11개월간 전속 DJ 생활을 했다. 하우스네이션 음반이 발매되면 기획사가 일본 전역의 굵직한 클럽에서 홍보 목적의 파티를 여는데, 전속 DJ들이 그 음반을 가지고 제각각의 스타일로 공연했다. 전속 DJ는 네네를 포함해 4명이었고 모두 여자였다.
강인혜는 하우스네이션 음반이 CD로만 발매되기 때문에 'CDJ'장비 다루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LP판을 쓰는 턴테이블처럼, CD로 디제잉 할 수 있게 만든 장비다. LP판을 쓰는 턴테이블은 미세한 진동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주변에 벽돌을 쌓아둬야 하지만 CDJ는 다루기도 쉽고 간편하다.
그는 음악 스타일도 바꿨다. "평소에는 어둡고 비트가 강하고 음역의 높낮이 차이가 큰, 말 그대로 센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기획사에서는 예쁘고 귀여운 느낌의 하우스 음악을 원했어요. 프로듀서가 원하는 수준이 될 때까지 처음 3개월 동안은 연습만 죽어라 했지요."
강인혜는 처음으로 밥벌이의 고충을 알았다. "이전에는 내가 원하는 음악만 틀고 반응이 없으면 '관객들이 못 놀아서 그런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좋은 DJ는 자기 멋에 취하기보다는 나를 초청한 오너(owner)나 주최 측의 콘셉트·분위기를 충분히 맞춰서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낼 줄 알죠."
강인혜는 지난해 영국으로 갔다. "얼굴이 예쁘다고 실력도 안 되는 여자 DJ가 메인 플로어에 서는 걸 보고 좌절감을 이기지 못했다"고 했다. 런던의 골드스미스 예술대학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보류하고 올해 초 한국으로 왔다.
"영국·이탈리아 등지에서도 DJ 생활을 계속했지만, 몸과 마음이 지쳤어요. 영국에선 몸무게가 37㎏까지 떨어졌어요." 그는 당분간 한국에서 의류 브랜드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알려지고 나서 한국 클럽에서 초청해 공연을 하러 오면 엄마가 새벽 4~5시에 데리러 오셨어요. 아버지는 무관심한 척했지만 재작년 집에 갔더니 어떤 DJ 인터뷰 기사를 오려서 책상 위에 올려두셨더라고요." 강인혜는 올해 굵직한 파티를 5차례나 했다. 가장 최근에는 아디다스 오리지널 라인 디자이너인 제레미 스캇 내한 파티에서 공연했다.
- ▲ 잘나가는 여성DJ 네오네시(본명 강인혜)가 여성DJ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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