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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의 출신은 무엇이었을까? (한국학자료세터)

희빈 장씨의 출신은 무엇이었을까?조회수 : 2830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박정수 분)는 희빈 장씨(이소연 분)를 노골적으로 싫어한다. 숙종(지진희 분)과의 대화에서 그녀는 희빈 장씨가 자신과는 다른 남인 집안 출신일 뿐만 아니라 천첩 소생이기 때문에 도저히 궁에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희빈 장씨의 출신은 어땠을까?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할아버지 장응인(張應仁, 1594-1660) 이후로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20여명의 역관(譯官, 오늘날의 통역관)이 나왔는데, 그 중 역과(譯科)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7명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아버지 장경(張烱, 1623-1669)사역원(司譯院) 부봉사를 지냈는데, 부인으로 고성립(高誠立)의 딸 고씨(高氏, 1625-1645)와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 윤씨(尹氏, 1626-1698)이다. 희빈 장씨는 첩 윤씨의 소생이다.

장수(張壽) ┳ 장경인(張敬仁) ┳ 장현(張炫) ━ 장천익(張天翼)
     │         ┕ 장찬(張燦)
     │
     ┕ 장응인(張應仁) ━ 장경(張烱) = 고씨(高氏) ━ 장식재(張栻載)
                    = 윤씨(尹氏) ┲ 장희재(張希載)
                          ┝ 딸(女)
                          ┕ 희빈 장씨(禧嬪 張氏)

생모 윤씨는 조사석(趙師錫, 1632-1693)의 처갓집 종이었다. 조사석이 젊었을 때

사사로이 통했었고, 장경에게 시집간 뒤에도 때때로 조사석의 집을 오갔었다고

한다. 조사석은 남인으로서 벼슬이 판서를 거쳐 정승에 이르렀는데, 이는 조카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1688)

후원에 힘입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숙종실록 13년 6월 16일)

그리고 희빈 장씨의 종백부 장현(張炫, 1613-1695)은 역관으로서 인조 15년(1637)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하여 심양(瀋陽)에도 갔었고, 효종 3년(1652) 인

평대군(麟坪大君)을 배종하여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등 여러 차례 사신

행차에 나섰었다. 이 때 장현은 다른 역관들과 함께 사사로이 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역관들의 사무역을 벌할 때 장현 역시 처벌

대상에 포함되었으나, 딸이 궁인이라는 이유로 곧 사면되었다.

(『효종실록』 4년 윤7월 2일)

이후 장현은 인평대군의 아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1641-1680)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1647-1680)이나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 1610-1680)

이 청나라로 사실 갈 때 따라가면서 이들과 친분을 돈독히 하였다.

그러다 경신환국 때 남인과 함께 형벌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다.

(『숙종실록』 6년 5월 7일)

앞서 살펴본 사료에 따르면, 희빈 장씨는 생모 윤씨와 종백부 장현을 통해 당대

남인의 실세였던 조사석과 허적 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 : 지두환(국민대학교 역사과교수)

■ 참고문헌
지두환, 『장희빈』, 역사문화, 2002.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김아네스, 「장희빈, 악녀의 누명을 쓴 정치의 희생양」, 『내일을 여는 역사』23, 내일을 여는 역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