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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매일경제 2010.05.03 13:03:41)

[Movie]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꿈인가…
감독 이준익 / 주연 황정민 차승원 한지혜 백성현

2005년 ‘왕의 남자’는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조선 최고의 폭군인 연산군을 동성애적 시각으로 다루되 극의 주인공은 사당패, 즉 민초라는 점이 중장년층에 어필하면서 사극 영화는 흥행이 안된다는 통념을 뒤집어 엎었다. 이준익 감독은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예쁜 남자 이준기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2010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태생적으로 ‘왕의 남자’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그동안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 등 현대극에 전념해온 이준익 감독이 5년 만에 내놓은 사극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임박한 선조 치하의 조선. 동인과 서인의 정쟁이 극에 달하고 관군을 대신해 뜻있는 이들이 모여 대동계를 결성하고 왜구를 물리친다. 그러나 조정은 오히려 이들을 역모로 몰아 해산하고 수장인 정여립을 부관참시한다.

이후 대동계의 매파였던 이몽학(차승원)은 조정대신 한신균 일가의 척살을 시작으로 세상을 뒤집겠다며 반란에 나서고 역시 대동계의 일원이었던 앞 못보는 무림고수 황정학(황정민)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한 한신균의 서자 견자(백성현)와 함께 이몽학을 막으려 한다. 여기에 이몽학의 애인이자 당대의 기생인 백지(한지혜)가 동행하게 된다.

박흥용 원작의 만화이긴 하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여러모로 ‘왕의 남자’와 닮았다. 우선 황정학은 ‘왕의 남자’의 감우성, 황정학에게 무술을 사사받으며 성장하는 견자는 이준기의 관계와 흡사하다. 정쟁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신경질을 일삼는 왕은 우리가 익히 알던 선조의 모습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동성애자로 묘사된 ‘왕의 남자’의 연산군과 같은 낯선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그 역할이 다르긴 하지만 기생인 백지의 역할 또한 연산의 연인이었던 장녹수를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줄거리도 세상을 바꾸고 싶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던 민초들의 이야기고 정지 화면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 역시 허무와 냉소로 귀결된다는 것 역시 그대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전작에 비해 뛰어난 점은 영상미. 차승원과 황정민, 차승원과 백성현의 대결을 물론이고 황정민에게 사사받는 백성현의 모습까지 훨씬 세련되고 역동적이다. 그런가 하면 기인 봉사를 연기한 황정민의 연기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와 코믹한 육담에서부터 눈 뜬 사람을 능가하는 절정의 무술, 그리고 이따금 내뱉는 허무주의적인 냉소에 이르기까지 상대역인 차승원을 압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작의 감우성과 유해진을 합쳐놓은 것보다도 나을 정도다. 황정민의 비중이 큰 탓에 영화 전반적으로 ‘왕의 남자’보다 덜 심각하다.

반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왕의 남자’의 최대 장점이었던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심리 묘사는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연산에서 거리의 사당패에 이르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사연을 지니고 삶의 무게를 견뎌야 했던 전작과 달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황정학을 제외하면 반란을 꿈꾸는 이몽학과 서자의 한을 묻고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는 한견자, 자신을 버린 연인을 끝까지 사모하는 기생 백지까지 지극히 전형적인 설정이며 그 묘사 또한 표피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주요 등장인물은 고작 1명 늘었을 뿐이지만 확실한 무게 중심 없이 관계가 얽히고 설키면서 극 전체가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만화 원작대로 견자를 확실한 화자로 삼았더라면, 백성현의 부박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왕의 남자’ 같은 안정감을 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한바탕 꿈일 테지만, 그래도 세상을 바꾸겠다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그들의 삶은 물론 죽음에서 일말의 처절함은 느껴져야 하지 않았을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고 나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전 막 내린 드라마 ‘추노’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