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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조선스포츠 2010-05-03 15:14)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05-03 15:14
이준익, 스크린에서 길을 잃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작은 바람에 흩어지는 몇 조각 구름. 지상의 우리는 그 구름을 만질 수 없다. 구름은 실체는 있지만, 내용은 없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감독 이준익)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과 같다. 혼신을 다해 내리쳤으나 끝내 허공을 가른 검객의 칼날이 그러할 것이다. 구름은, 허공만 가른 저 칼날은, 이제 어디에 정박할 것인가. 구름은 돌아갈 집이 없고, 칼날은 표적을 잃어버렸다.

 '구르믈 버서난...'은 시종일관 갈피없이 흔들린다. 다만 아득하고 어지러울 뿐이다. 감독의 출사표는 크고 무겁다. 밑바닥에 이른 절망과 안타까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는 "(젊은이들이) 허황된, 세속적인 목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목표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찍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감독의 뜻은 드높고 숭고하지만, 영화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다.

 '구르믈 버서난...'의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 직전이다.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나온다. 혁명을 꿈꾸는 대동계 수장 이몽학(차승원), 그 이몽학을 죽이기 위해 뒤를 쫓는 황정학(황정민), 양반 서자인 견자(백성현)다. 그들 중에서 절망한 것은 누구인가. 세 명 모두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에 절망한 것일까. 무슨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이들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뒤엉키는 길항관계를 그린다.

 이몽학의 목표는 명확하다. 부패한 세상을 뒤집어 엎고 왕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는 대동(大同)의 깃발을 높이 든다. 리더 정여립을 살해하고, 지방 관아를 접수하고, 마침내 궁궐로 진격한다. 그의 내면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쟁에만 몰두하는 동인과 서인, 갈팡질팡하는 왕에게 절망했다. 반란에 미온적인 정여립에게도 그랬다. 그는 스스로 역적의 수장이 된다. 그런데 영화는 이 지점에서 휘청거린다. 이몽학의 진정한 꿈은 왕이 되는 것인가, 왜구와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키는 것인가.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양반이 아니면서도 갓 쓰고, 도포 입고, 게다가 칼싸움에도 능한 이몽학의 캐릭터만큼 혼란스럽다. 또 하나. 이몽학의 꿈은 혹시 허황되거나 세속적인 것은 아닌가?

 황정학의 내면도 구름에 덮여 있다. 그의 지론은 확실하다. "칼 쓰는 자는 칼 뒤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 앞에 있고 싶다"는 이몽학과 대립관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황정학의 칼은 왕이나 사대부를 겨누지 않는다. 그는 이몽학에게 비장하게 말한다. "한양으로 가지 말라." 그는 이몽학의 헛된 야망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여립의 복수를 꿈꾼다.

 이몽학과 황정학의 갈등은 영화의 중심축이다. 그런데 이 구도는 어딘가 이상하다. 이몽학은 반란을 꿈꾸고, 황정학은 그런 이몽학의 제거를 꿈꾼다. 하지만 왕이 되려는 자를 제거하는 것은, 왕이나 사대부의 몫이다. 그가 이몽학을 제거해 얻는 것은 복수 밖에 없다. 그래도 갈등 관계가 유지되려면, 이몽학과 황정학은 좀 더 치열하게 부딪쳐야 한다.

 견자는 더 이상하다. 양반집 서자로서 신분차별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나는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 왕도 서자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했던 아버지가 이몽학의 칼에 죽자, 견자는 원수를 갚겠다고 나선다. 황정학과 한 패가 된다. 목표가 같기 때문이다. 견자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몽학과 진검승부를 벌인다(초보 검객과 당대 최고 검객의 대결 결과는 비상식적이다). 왜구에 쫓겨 도망친 왕이 앉았던 옥좌에 앉는다. 그럼 견자가 주인공인가?

 이몽학이 도착한 궁궐은 텅 비어있다. 모두 도망갔다. 화살을 쏘았으나 과녁이 없어진 것이다. 졸개들은 왜구의 화승총 앞에서 낙엽처럼 쓰러진다. 여기서 견자가 등장해 맹활약한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영화는 애매하고 또 모호하다. 인물의 성격, 갈등, 서사 전개 등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다. "네 꿈 안에는 내가 없지만, 내 꿈 안에는 네가 있다"는 기생 백지(한지혜)의 고백은 느닷없고, 극도로 희화화된 왕과 신하들의 언행은 영화의 톤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그래서 관객은 혼란스럽다.

 감독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관객은 영화에서 어떠한 절망이나 희망, 세속적이지 않은 목표도 발견할 수 없다. 감독은 '님은 먼 곳에'의 실수를 되풀이한다. 제작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다. 그가 거대 서사를 담아내는데 숨차지는 않을 것이다. 강호의 검객들은 최소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이준익도 그들처럼 영화를 간결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영화가 구름을 벗어나지 못한 달이 되지 않도록.

이몽학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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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정유재란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하여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목차

배경 [편집]

그 당시 농민들은 임진왜란 등으로 몹시 가난해져 있었다. 이때 본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이몽학은 전주 이씨로서 서얼이긴 서얼이었지만 조선 왕족의 피가 그 몸에 흐르고 있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1]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1596년(선조 29) 한현은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부여) 무량사에서 이몽학과 만나 역모를 모의하고 도천사(道泉寺)의 승려들과 인근 가난한 농민 6~7백 명을 규합했다.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김경창, 임억명, 이구, 장준재, 사노, 김팽종, 승려 능운을 거느리고 자신이 선봉장이 되었다.

과정 [편집]

반란 초기 [편집]

수년을 끈 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데다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악해진 때이므로 “왜적의 침입을 바로 잡겠다”는 반도들의 선동이 크게 호응을 얻었다.

1596년 음력 7월 6일 이몽학군은 홍산현에 쳐들어가 현감 윤영현을 홍산동헌에서 생포하였다. 임천군으로 쳐들어가서는 군수 박진국을 포박했다.[2] 이어 7일정산현을 함락시켰다. 전산현감 정천경은 도주했다. 8일청양을, 9일대흥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농민들까지 합세해 반란군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이몽학군은 10일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관속 이희수를 시켜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이몽학을 속이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이 틈을 이용해 홍가신은 인근 수령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任得義)와 더불어 성을 지켰으며, 인근의 순찰사 신경행, 최호, 박동선, 황응선 등이 와서 홍주성에서 이몽학군과 전투를 벌였다. [3]

반란 진압 [편집]

그 사이 도원수 권율, 충청병사 이시언, 장군 이간 등이 홍주 주위로 향했다. 이때 홍가신은 민병을 동원하여 반격하였고, 판관아병 윤계가 총포를 쏘면 이몽학군 모두 살아남지 못하고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오면 큰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또한 홍주에 살던 무장 임득의, 박명현, 전 병사 신경행 등은 홍주성에 들어가 홍가신을 도왔다. 남포현감 박동선도 충청수사 최호와 상의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였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반란군은 밤에 청양까지 도망하였고,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 임억명(林億明), 태척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고 머리를 베었고, 이몽학이 죽자 이몽학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고 움직이지 않던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하다 잡혔다. 한현을 비롯한 이 난에 가담한 자들 중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중에 따라 처벌되니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 신경행과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의병장들의 누명 [편집]

한현의 친국 과정에서 의병장 김덕령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고언백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이 잡혀갔다. 이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ㆍ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선전했고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므로 난이 평정되어 선조가 친국을 할 때에 이들의 죄를 물었다. 그 뒤 홍계남곽재우는 풀려났으나 김덕령선조의 친국 과정에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사망하였고 최담령은 결국 처형되었다.[3]

선조의 정권에 끼친 영향 [편집]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이 덕에 본의 아니게 원균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선조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이다

주석 [편집]

  1. 최근묵, 임진왜란때의 호서지방 민간반란, 백제연구, Vol.5 1974
  2. 송영대, 충남 관아건물의 대표 홍산동헌, 그리고 이몽학의 난 오마이뉴스
  3. 이몽학의 난 사이버정변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