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인물열전
[심층분석] 부산갈매기의 비밀과 컬처코드 (주간조선 2010.05.03)
수퍼보이
2010. 5. 9. 16:21
- 야구 없이는 못살아! 못 말리는 부산갈매기들
代 이어 자이언츠 응원 지역주의를 문화코드로 부산은 야구마케팅 메카
‘대형 노래방’ 사직 야구장 ‘갈매기 타임스’ 잡지 창간
-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서울 목동야구장. 삼성 라이온즈와 막판 4위 경쟁을 벌이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이날 우리 히어로즈와 대결을 벌였다. 이날 경기에서 이기면 롯데 자이언츠는 자력으로 4위를 확정짓는 중요한 경기였다. 자이언츠 야구 팬인 부산갈매기들은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구름처럼 목동야구장을 채웠다. 결과는 1 대 5로 패배.
기자 역시 롯데 자이언츠의 4강 진출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어 야구장에 갔다. 이날 기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3루석(롯데 자이언츠 응원석)을 바라보는 자리가 아닌 3루석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3시간여 동안 자이언츠 응원석 한복판에서 부산갈매기의 외침과 몸짓을 체험하며, 충남 출신인 기자는 어떤 말할 수 없는 이질감 같은 것을 맛보았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수첩에 이런 메모를 해놓았다.
-
- ▲ 부산갈매기는 고유의 응원문화를 만들어 확산시키고 있다. 사진은 4월 17일 잠실구장의 두산전에서 ‘봉다리’를 쓰고 응원하는 모습.
- “그들의 눈빛에는 갯내음이 난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헤쳐온 뱃사람의 야성이 뿜어져 나온다. 그들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 길들여질 수 없는 원초적인 격정이 있었다.”
자이언츠 평균 관중 2만명 넘어
한국프로야구는 2008년 525만6332명에 이어 2009년 592만5285명의 관중을 야구장에 불러모아 2년 연속 신기록을 세웠다. 관중 수가 2007년 410만4429명이었던 것과 견주면 폭발적인 증가 추세다. 그 중심에 한국 프로야구 최대의 히트상품 롯데 자이언츠가 있다. 자이언츠는 2008년 137만9735명(평균 2만1901명), 2009년 138만18명(평균 2만597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자이언츠는 포브스코리아 선정 구단가치 2008년 1위(1102억원)에 이어 2009년에도 1300억원으로 2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도표 참조>
-
- 이미 야구팬 사이에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자이언츠의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시즌 성적은 8-8-8-5-7-7(시즌 성적 5~8위)이었다. 2008년과 2009년 롯데 자이언츠는 각각 3위와 4위를 했다. 지금 롯데 자이언츠를 제외한 7개 구단과 KBO는 롯데가 2008~2009년만큼 성적을 올려주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관중이 밀려들고 프로야구가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이언츠는 지난 4월 16∼18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두산과 3연전을 치렀다. 4월 17일 오후 4시10분쯤. 지하철 서초역에서 잠실종합운동장 방향으로 가는 2호선을 탔다. 발디딜 틈이 없는 만원인 가운데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어린 소년이 보였다. 소년의 유니폼 등판에는 ‘이대호’라고 새겨져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이주호(7). 아빠의 손을 잡고 야구장에 가는 길이었다. 아빠 이승환(40)씨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자이언츠 경기를 보셨는지. “1982년부터 자이언츠 팬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언제 처음 야구장에 데리고 가셨는지. “다섯 살 때부터 야구장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서울에는 언제 올라왔나요. “1990년 상경했습니다. 자이언츠 야구를 보는 게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지요.”
어느 선수가 가장 자이언츠 색깔과 맞다고 봅니까. “이대호입니다. 얼굴도 착하게 생겼고 방망이도 화끈하게 칩니다.”
외국인 선수로는 자이언츠적인 선수가 누가 있나요. “호세와 가르시아입니다.”
선생님에게 야구는 무엇입니까. “세습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모태신앙이지요.”
이날 잠실야구장은 올해 첫 매진을 기록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차려 입은 젊은 부부가 3루 측 지정석 입구에 허겁지겁 들어섰다. 남자는 아이를 안고, 여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들어왔다. 부산 토박이로 동갑내기 부부인 조봉조·천현주씨였다. 부산에서 결혼했고 서울에 온 지 2년6개월이 지났다. 남매 조가연(4)·조이준(2) 역시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조봉조씨의 말을 들어보자. “애가 너무 어려서 그동안은 야구장에 못 데리고 왔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를 데리고 다녔었다. 가연이와 이준이에게는 야구장이 오늘이 처음이다.”
조봉조씨의 유니폼 등판에는 ‘김주찬’, 천현주씨 등판에는 ‘강민호’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천현주씨는 “이준이가 처음인데도 야구장 분위기를 너무 좋아하네요”라며 시종 웃었다.
KBO 사무총장을 지낸 야구해설가 하일성씨는 서울 출신이다. 하일성씨를 비롯한 야구해설가들은 부산이 야구에 열광하는 첫 번째 이유를 ‘가족주의’에서 찾는다. 잠실이든 사직이든 장소에 관계없이 부산갈매기들을 잡고 물어보라. 언제부터 야구를 좋아하게 됐느냐고. 대부분은 “어려서 아버지 손잡고 야구장에 왔다”고 대답한다.
자녀 데리고 야구장 가는 게 낙
자이언츠는 잠실 3연전 뒤 부산으로 내려가 4월 20~22일 사직구장에서 기아와 3연전을 펼쳤다. 4월 20일(화요일) 기자는 사직야구장을 처음 찾았다. 경기 30분 전 1루석은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1루석을 둘러보면서 든 소감은 부산 시민들이 야구장으로 야유회를 나왔다는 느낌이었다. 부모 손잡고 온 어린 아이부터 휠체어를 탄 70대 남자까지 정말 다양한 연령층이 관중석을 메웠다.
김기웅·김혜정 부부는 초등학교 2학년 딸(김서영)을 이날 처음으로 야구장에 데리고 왔다. 부부는 마치 소풍을 나온 것처럼 여러 가지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해왔다. 김혜정(37)씨는 “1992년 자이언츠가 우승했을 때 해운대여고 3학년이었는데, 모든 학생들이 자율학습 시간에 야구중계를 이어폰으로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혜정씨는 “자이언츠는 부산이고, 부산갈매기는 열정·정열”이라고 규정했다.
-
- ▲ 1 오른쪽부터 최영희·최정인 자매와 동서인 김동숙씨. 2 조봉조·천현주씨 가족. 3 왼쪽부터 박산은·박성귀·박신복 자매. 4 상대팀이 견제구를 던질 때마다 부산 갈매기는 “마”라고 외친다. 5 재치 넘치는 피켓을 들고 나온 부산갈매기들.
- 직장인 여성 김현정(30)씨는 5년 전부터 부산갈매기가 되었다. 김씨는 “음식이나 술이나 야외에서 먹고 마시는 게 더 맛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자이언츠는 (부산 시민에게) 기쁨조이며 부산갈매기는 (자이언츠에) 부모 같은 존재”라고 정의했다.
남녀 대학생 8명이 1만원짜리 지정석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 중 3명과 인터뷰를 했다. 윤보람(20)씨는 아빠가 TV로 야구중계를 봐서 관심을 갖다가 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처음 사직야구장을 찾았다. 박순호(20)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와 함께 처음 사직야구장에 왔고, 현재까지 30번 이상 자이언츠 경기를 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 손잡고 야구장에 왔다는 배강수(20)씨는 “사직야구장만 10번 왔다”고 했다.
사직야구장에는 휠체어 전용 관람석이 1루쪽과 3루쪽에 하나씩 있다. 1루쪽에서 만난 정현열(70)씨는 1994년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다. 휠체어 장애인은 무료로 경기장에 입장한다. 정씨의 야구 역사는 195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대 초반일 때인데 구덕운동장에서 경남고가 선린상고와 붙었다. 그때는 우리를 ‘항도 야구팬’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도 항도 야구팬은 열광적이었다. 집에서는 TV로 일본 야구를 시청했다. 모든 스포츠 중 야구를 가장 좋아한다. 이제까지 홈경기를 한 경기도 빠트리지 않고 다 봤다.”
롯데의 젖줄 경남고·부산고 야구팀
부산 사람들이 야구에 미친 이유는 고교야구에 그 뿌리가 있다. 경남고는 경북고와 함께 한국 고교야구의 양대 명문으로 군림했다. 역사와 전통의 고교야구대회 청룡기 우승 횟수를 보자. 경남고는 청룡기에서 14번 결승에 진출해 통산 8회 우승했다. 경북고는 9번 결승에 진출해 7회 우승기를 거머쥐었다. 부산고는 이제까지 청룡기에서 3회 우승했다.
야구 명문 경남고의 질주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경남고는 2006~2007 청룡기를 2연패했으나 2008년 결승에서 대구고에 져 3연패에 실패했다. 부산의 양대 명문인 경남고와 부산고는 지금도 대학입시 성적보다 야구 성적에 더 신경을 쓴다는 얘기가 있다.
현재 야구장을 찾는 부산갈매기들의 아버지 세대는 경남고가 한국 고교야구를 호령하던 시대에 부산에서 야구를 즐겼던 사람들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이들은 자녀들을 야구장으로 이끌었고, 그 자녀들이 가정을 꾸리고 나서 다시 아이들을 야구장으로 데리고 나온다. ‘야구세습’ ‘모태야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복잡한 야구 규칙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야구장 가는 횟수를 거듭하다 보면 야구장의 분위기와 부산갈매기의 열정이 서서히 무의식에 자리잡게 된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해석을 빌리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어떤 상품이 장수 브랜드로 자리잡으려면 새로운 소비자층이 꾸준히 편입되어야 한다. 이처럼 부산갈매기는 새로운 세대가 줄을 잇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고교야구의 명문 하면 대구(경북고)와 광주(제일고)도 있는데, 왜 부산에서만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같은 야구명문고를 갖고 있어도 부산이 대구나 광주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부산은 한국 제1의 항구도시라는 점이다. 한반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태평양으로 난 창(窓)이 부산이다. 바다와 항구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해양문화가 부산갈매기의 야성과 자이언츠의 개방성으로 투영됐다. 부산은 그 창을 통해 선진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개방된 게 1990년대의 일이다. 하지만 부산은 1960~1970년대에 이미 일본TV를 마음대로 시청할 수 있었다. 부산 사람들은 일본 TV방송을 통해 선진적인 일본야구를 가장 먼저 보면서 야구를 보는 수준과 그 저변을 확장시켰다. 부산은 사회인 야구가 가장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대도시에 조기축구가 있는 것처럼 부산에는 조기야구가 있다. 부산사회인 야구리그(PS연맹)에는 126개 팀이 참여한다. 자이언츠의 개방성은 2008년 프로야구 최초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Jerry Royster)를 영입한 데서 증명된다.
한국일보 체육부 최경호 기자는 프로야구만 9년째 담당하고 있다. 4월 20일 사직야구장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최경호 기자는 “부산 사람에게 야구는 기호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기자는 ‘쿵’ 하는 느낌이었다. 기자가 부산갈매기 틈바구니에서 이질감을 느낀 까닭은 야구를 기호의 대상으로 본 결과였던 것이다. 최경호 기자는 경험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2007년도였다. 동료 야구기자와 해운대에서 점심을 먹은 후 택시를 타고 야구장으로 향했다. 택시기사가 ‘야구장에 와 빨리 갑니까. 야구 관계자입니꺼’하고 물었다. 스포츠신문 기자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택시기사가 이렇게 말했다. ‘우린 1등을 바라지도 않는다. 4등을 할 수 있다는 희망만 줘도 매경기 2만명을 채워줄 수 있다.’ 그날 택시비가 1만1700원이 나왔다. 택시비를 내려하니 그 기사가 1만원만 받더라. 그리곤 롯데 기사 잘 써달라고 부탁하더라. 한번은 롯데가 이긴 날 기자석에서 기사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유리창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었더니 ‘오늘 이겼으니 기사 잘써주이소’라고 했다.”
'인간관계/인물열전'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