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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과 남종화의 원조 소치 허련(上) (화순군민신문 2010. 06.28. 13:34)

운림산방과 남종화의 원조 소치 허련(上)

한반도 남쪽 그 척박한 곳에서 솟은 화가집안
입력시간 : 2010. 06.28. 13:34


진도에 자리 잡은 운림산방
인공 연못인 운림지 한켠 조그마한 섬에 소치 선생이 직접 심은 백일홍이 보인다.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유행어의 근원지인 운림산방. 내리 5대째 유명화가를 배출한 이 산방의 비밀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인가.

조부대에 하던 일을 손자 대에서까지 계속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한국의 근세 100년처럼 자신들의 전통과 민속이 단절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겪었던 나라에서 선대에 하던 일을 손자대가 계승하는 경우는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진도에 자리 잡은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하여 5대째 화가를 배출한 집안의 내력을 알아보려 멀지 않은 길을 운전해 가다보니 머릿속이 길 따라 구불거린다. 흠~. 5대째 예술가를 배출하는 집안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져본들 과연 있을까.

1대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8∼1893), 2대는 미산 허형(米山 許瀅:1861∼1938), 3대는 남농 허건(南農 許楗:1908∼1987)과 그 동생인 임인 허림(林人 許林:1917∼1942), 4대는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林田 許文:1941∼현재), 5대는 남농의 손자인 허진(許塡:1962∼현재)으로 이어지고 있다. 허진 이외에도 같은 5대 항렬로는 허재, 허청규, 허은이 화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등산 춘설헌(春雪軒)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도 진도에서 태어난 양천 허씨로 같은 집안이다.

예맥의 뿌리와 줄기를 찾아
허씨는 원래 경기도에서 살다가 진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진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입도조(入島祖) 허대(許垈)는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이 역모로 몰리면서 임해군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진도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허대의 장남 득생은 용, 순, 방 세 아들을 두었는데 순의 후손이 소치, 미산, 남농이고 막내 방의 후손이 의재 허백련이다. 의재는 혈연으로 따지면 소치의 종고손(從高孫)이 되고 법연으로 보면 소치의 아들인 미산으로부터 직접 그림수업을 받은 제자다.

의재 집안에서도 화가가 상당수 배출되었다. 의재의 넷째 동생인 목재 허행면(木齋 許行冕:1906∼1966)은 근대 회화사에 비중이 큰 화가였고, 목재의 아들인 허대득(작고), 목재의 조카인 허의득(작고), 의재의 장손자인 직헌 허달재(直軒 許達哉:1952∼현재), 목재의 손자인 허달용(36세), 허의득의 아들인 허달종(35세)이 모두가 화가이다.

묵매도(종이에 먹, 50x183㎝). 소치의 후반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줄기는 거칠고 강렬한 필치로 표현하면서 꽃잎은 경쾌하게 묘사해 대비를 이뤘다.

후손들이 미대를 졸업하고 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예비화가까지 포함하면 허씨 집안에서 배출된 화가는 30명이 넘는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는 美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인간이고, 돈과 권력이 아닌 자유를 갈망할 정도의 인식 수준에 도달하려면 먼저 돈과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충분히 향유한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다.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작품에 ‘붓덴부르그 일가(一家)’라는 소설이 있는데, 3대에 걸친 가족 변천사가 주제다. 할아버지대는 소위 ‘개같이 돈을 번’ 세대이며, 아버지대는 이 돈을 밑천으로 삼아 권력집단에 진입한다. 국회의원, 시장과 같이 사진액자에 들어갈 만큼 출세한 인물들이 배출된다. 그런 다음 손자대에 가서야 비로소 예술가가 나타난다는 줄거리다.

한반도 남쪽 구석진 곳, 그것도 돈·권력과는 거리가 먼 진도라는 섬에서 예술혼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열악한 여건에서 5대째 예맥(藝脈)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진도라는 섬은 서울로부터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여러 유배지 중의 하나였다.

진도는 붓, 완도는 칼의 유배지
전라도 유배지로 유명한 섬이 진도와 완도라고 한다. 진도는 주로 붓을 다루던 문인(文人)들의 유배지였고, 완도는 칼을 다루던 무인(武人)들의 유배지였다. 진도는 완도에 비해 농토가 많기 때문에 책만 읽던 문인들이 유배 와서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게 했고, 완도는 산과 바다뿐인 척박한 지형이라서 상대적으로 힘 센 무인들을 보내서 개척하게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배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일반 잡범이 아닌 정치범이 많았다. 그런데 능력과 자질이 있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출세할 길이 막혔을 때 선택하는 탈출구는 통상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는 예술가의 길이고, 둘째는 종교인의 길이다. 두 길 가운데 진도 사람들은 예술 쪽으로 많이 간 것 같다. 이 부분은 ‘토마스 만’이 제기한 예술가의 길을 가는 수순과는 다르다.

지금에도 진도 출신 화가는 16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수는 국전이나 도전에 입상한 경력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입상하지 않고 활동하는 화가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고 한다. 인구 5만 명이 안 되는 섬에서 이 정도의 화가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하여 한 집안에서 5대째 화가가 배출되었다.

해남 녹우당과 소치 허련의 인연
진도 남자들은 대체로 노래나 그림을 잘 그리는 한량이 많고, 여자들은 한량 대신에 생계를 책임지느라 생활력이 유독 강하다는 평이 났다. 진도 여자 치고 외지에 나가서 못 사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허씨 집안이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것은 1대 화가인 소치의 특출한 능력과 명성이었다. 소치의 일생을 살펴보면 소치 허련은 순조 8년(1808) 진도 향반(鄕班)이던 허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향반이니만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서화에 취미가 있어서 틈이 나는 대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어느 집에 좋은 화첩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베껴 그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해남 연동의 녹우당(綠雨堂)에 고화가 많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소치는 울돌목을 건너 녹우당을 찾아간다.

녹우당은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 윤선도의 집이자, ‘자화상’을 남긴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1668∼1715)의 장원이고,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젖줄이면서 실제 외가이고, ‘동국진체’라는 필법을 창시한 옥동 이서(玉洞 李:1662∼1723)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와 시인 묵객이 찾아와 음풍명월 하던 곳이었다.

소치는 연동 윤진사댁(녹우당) 사랑채를 드나들며 공재 윤두서, 그리고 공재의 아들인 연옹 윤덕희(蓮翁 尹德熙:1685∼1766), 손자인 청고 윤용(靑皐 尹溶:1708∼1740)으로 이어지는 윤씨 집안 3대 화가들의 필적과 그림들을 눈으로 접할 수 있었다. 녹우당에 가전(家傳)되는 화풍을 직접 감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 소치는 이 집에 있던 중국의 유명한 화보집인 ‘고씨화보’를 보고 크게 감흥을 받아 이를 연마하기도 하였다. 이 화보는 명나라 신종(神宗)대에 활약한 화가 고병(顧炳)이 제작한 것으로 남종화 화보집이다. 소치는 공재 이후로 녹우당에 가전되는 윤씨들의 화풍과 ‘고씨화보’의 남종화풍을 접하면서 그림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이때 소치의 나이가 대략 20대 중반이었다. 그러니까 소치 그림의 뿌리는 해남의 녹우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운림산방과 남종화의 원조 소치 허련(中)

한반도 남쪽 그 척박한 곳에서 솟은 화가집안
입력시간 : 2010. 07.06. 12:39



남종화 '묵모란' (위) / ‘선면산수도’. 특유의 마른 붓으로 호방하게 그려낸 일종의 은거도 계열의 그림으로서 허련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866년 작(아래)

초의선사와 추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소치는 녹우당을 출입하며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에 대한 소문을 접한다. 초의선사가 주석하던 대둔사(大屯寺 대흥사)는 녹우당에서 걸어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향기 나는 사람끼리는 때가 되면 만날 수밖에 없는 법. 마침내 소치의 나이 27세에 이르러 초의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초의선사는 승려였으나 그 학식과 인품으로 인해 사대부들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일찍이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고,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위당 신관호 등 당대의 거물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릴 만큼 차에도 조예가 깊어서 ‘다삼매(茶三昧)’의 경지에 든 인물로 전해진다.

인연은 인연을 낳는 법이다. 초의를 통해서 소치는 추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번은 초의선사가 추사를 만나러 서울에 갔을 때 소치가 모사한 윤공재 화첩과 시구를 보여주었더니 추사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 후 초의선사가 해남에 돌아올 때 추사의 답신을 가지고 왔다. 소치더러 서울로 올라오라는 전갈이었다. 이 전갈을 받고 소치가 추사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간 때가 소치의 나이 32세였다.

소치는 서울 추사가택에서 머물면서 지도를 받았다. 추사의 둘째 형인 김명희, 막내인 김상희를 비롯하여 추사와 안면이 있는 당시의 명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했음은 물론이다. 소치(小痴)라는 호는 이 시기에 추사에게 받은 호다.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황공망(黃公望:1269∼1358)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의 호가 대치(大痴)였다. 추사는 평소에 대치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여, 대치에 비할 만한 인물이 되라는 의미에서 소치라는 호를 주었던 것이다.

소치의 후원자, 헌종 임금
소치는 서울 추사 집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더 머무를 수 없었던 이유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소치는 유배중인 스승을 찾아뵙기 위하여 당시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바닷길인 제주도에 세 번이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치의 일생을 보면 그는 참으로 인연복(因緣福)이 많다. 호남의 대장원인 녹우당에서 서화와 인연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소치의 인연복은 스승 잘 만나는 인연에서 끝나지 않고 좋은 패트런(patron; 후원자)을 만나는 데까지 이어진다. 아무리 실력 있는 예술가라도 좋은 후원자를 만나지 못하면 고생만 하다 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닌가. 소치의 후원자가 임금 헌종(憲宗)이다.

헌종이 허련에게 직접 하사한 [시법입문]과 헌종의 도장. 임금이 일개 신하에게 이런 책을 준다는 사실 자체가 전례가 없다.(왼) / 소치실록(오른)

당시 서민들은 임금이 있는 왕궁에 출입할 수 없었다. 소치는 헌종의 특별한 배려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고 왕궁에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소치는 42세에 헌종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어떤 때는 왕으로부터 과객비로 300금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며, 어느 날 입궁했을 때는 ‘필홍(筆紅)’ ‘어장(御章)’ ‘시법입문(詩法入門)’과 같은 서적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오동나무 상자에 헌종이 직접 시법입문이라는 글씨를 쓰고, 그 상자 안에 전체 4권이 담긴 ‘시법입문’은 현재 허씨문중의 가보(家寶)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자연일체를 추구하는 남종화
남종화는 북종화와 대척점에 서는 화풍을 일컫는다. 정치의 중심지인 북경과 경제의 중심지인 상해로 나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는 몇 가지 남과 북이 있다. 불교를 보면 남종禪과 북종禪이 있고 도교에도 역시 남파와 북파가 있다. 남북은 차(茶)의 성향도 다르다. 북쪽 지역에서 생산되는 북茶는 잎이 작은 소엽종(小葉種)이 많고, 남쪽 지역에서 나는 남茶는 잎이 큰 대엽종(大葉種)이 많다. 소엽종은 주로 녹차를 만들고 대엽종은 발효차를 많이 만든다.

그림에서 남종화는 문인적인 화풍이라면 북종화는 다분히 무인적인 화풍이 아닌가 싶다. 단적으로 남종화에서는 바위를 그릴 때 피마준(披麻:마 여러 개를 죽 벌여놓은 부드러운 준법)을 쓴다면 북종화는 부벽준(斧劈:도끼로 중간을 탁탁 끊어놓은 듯한 준법)을 많이 쓴다고 한다.

북종화도 그렇겠지만 남종화에서 강조하는 일관된 주제는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인 자연의 합일(orgasm)이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자기가 떠나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데 있다.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귀하는 데 행복이 있고 이때 회귀의 대상은 대자연이다.

녹우당과 비슷한 운림산방
운림산방은 소치가 50세 때인 1857년에 고향인 진도에 돌아와서 지은 집이다. 이 해는 스승인 추사가 타계한 다음해로 소치가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해다. 그 후 1893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오랜 시간을 여기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던 운림산방은 소치의 예술정혼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운림산방 입구에 들어서면서 그 전체적인 분위기가 해남의 녹우당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장중하고 호방하면서도 평화롭다고나 할까. 운림산방의 뒷산인 첨찰산(尖察山)은 녹우당의 뒷산인 덕음산과 사뭇 비슷하게 다가오는데 해발 485m로 진도에서는 가장 높은 중심산이다.

보통 집터의 뒷산이 이렇게 장중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운림산방 쪽에서 본 첨찰산은 기암괴석이나 바위가 별로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위압감 대신 단정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이 중후하면서도 단아한 첨찰산의 기운으로 인해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발복이 유지되는 터라고 여겨진다.

토종 백일홍과 동백나무… 그리고 미산
운림지 한가운데는 조그마한 섬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백일홍을 심어두었다. 소치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하니 줄잡아 150년은 된 백일홍이다. 그냥 백일홍이 아니고 토종 백일홍이란다. 운림산방은 백일홍 등 꽃과 나무가 지천으로 뒤덮혀 있어 별천지의 산방(山房)임을 실감케 한다.

소치의 뒤를 이은 2대 화가는 넷째 아들인 미산 허형이다. 원래 米山은 소치의 장남인 허은의 호였으나, 재질이 뛰어났던 장남이 19세로 죽자 넷째인 허형이 형의 호인 미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미산은 구한말을 지나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역사적 격동기를 맞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만큼 활동하지는 못하였다.

제2회 선전에 63세의 나이로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늦게나마 작품세계를 인정받았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화필을 들고 이곳저곳 부잣집 사랑에 기거하면서 그림이나 병풍을 그려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어야 했다.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개척할 여유는 없었다. 미산은 아버지 소치와 같이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인연복이 없었다.

그러나 자손과 제자에 대한 인연복은 달랐다. 남농 허건과 의재 허백련이 미산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남농은 미산의 넷째 아들이고 의재는 유년시절에 미산의 그림지도를 받은 제자다. 후일 아들인 남농은 목포 유달산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고, 의재는 광주 무등산에 터를 잡고 활동하면서 남도가 ‘예향’으로 자리 잡는데 영향을 주었다.

덕음산 녹우당에서 첨찰산 운림산방까지 오는 길은 소치가 맡았지만, 운림산방에서 다시 무등산과 유달산의 양대 맥으로 확산되는 중간 연결고리 역할은 미산이 맡았다. 이렇게 보면 미산 자신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 혈손인 남농과 법손인 의재를 통해 크게 빛을 본 셈이다.

운림산방과 남종화의 원조 소치 허련(下)

한반도 남쪽 그 척박한 곳에서 솟은 화가집안
입력시간 : 2010. 07.16. 11:45


전남 목포시에 위치한 남농 기념관
불우한 천재, 남농 허건
남농(南農)은 조부 소치의 예술혼이 뭉쳐 있는 운림산방에서 태어나서 강진 병영을 거쳐 목포 유달산 밑의 죽동에 정착하여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남농 기념관에서 보냈다. 남농은 37세 때인 1944년 ‘목포의 일우’로 선전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려던 무렵, 골습병에 걸려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신세가 되었다.

화가로서 한창 기세가 오를 만할 시점에 어이없게도 불구가 돼버린 것이다. 남농은 43세에 ‘남종회화사’를 집필하면서 그 말미에 당시의 괴로웠던 심정과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인생 칠십 고래희라 하였는데 내가 70세를 산다 하면 반세는 빈고에 시달렸고 반세는 불구자의 신세가 되겠는데, 예술가는 자극이 있어야 한다지만 나와 같이 기쁨과 슬픔, 고통과 가난의 기구한 숙명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자극제에 시달려야만 삶의 진수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만일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낙오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농 허건 <금강산 보덕굴> 151×128㎝ / 1940년 作
모든 예술은 사람을 고무하고 감동과 기쁨을 주어야 하는 것인즉, 그렇지 않으면 예술의 진가가 없는 것이다. 예술은 자연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고 진실한 감동에서 우러나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남화의 표현양식도 이와 같다. 또 예술은 민족성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나라의 고유성을 버리고 어느 나라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외도이고 그것은 허위의 예술이고 가장의 예술이다. 남화는 조선 남화를 그릴 것이며, 유화는 조선의 유화를 그려야 한다.”

남농은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지니는 특유의 인정과 소탈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찾아와 그림을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한 데서 그러한 인정과 소탈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다작을 했다는 비판도 들었다. 남에게 베풀 수 있는 한 베풀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런 비판을 피할 수 없지 않았나 싶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넉넉히 받고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그려주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작업실을 찾아오는 외판원들에게도 박절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대 허문, 5대 허진… 운림산방의 맥을 잇다
목포 사람들은 남농을 목포의 어른으로 생각하였다. 남농으로부터 나오는 그림을 가지고 줄잡아 200명이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남농이 죽은 후 목포시내 화랑경기가 현저하게 위축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남농은 그 자신이 평생 수집한 수석 2000점을 향토문화회관에 기증하였고, 자신의 그림은 남농미술문화재단에, 그리고 쇠락한 운림산방을 복원한 다음에 진도군에 기증하였다. 죽기 전에 모두 사회에 주고 간 것이다.

남농에게는 그림에 재질이 뛰어난 막내 동생이 있었다. 바로 임인 허림(林人 許林)이다. 허림은 1941년 ‘가전’(家田), 1942년 ‘6월 무렵’으로 일본 문전에 연속으로 입선하였다. 조선인 화가로 연속 입선한 사람은 이당 김은호와 임인 허림뿐이었으니 그의 천부적 재질을 알 만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인은 25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더 이상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임인은 아들을 하나 남기고 갔다. 임전 허문이다. 7세 때부터 백부 남농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홍익대 미대를 나왔다. 가문에 내려오는 갈필법에 자기 특유의 안목을 접합시켜 ‘운무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였다. 수묵의 농담을 절묘하게 구성하여 화면 전체를 동적으로 전개하는 화풍이 운무산수화인데, 구름과 안개의 작가로 불린다. 이 사람이 운림산방의 제4대다.
운림산방 화계도

5대는 전남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허진 교수다. 29세에 이미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미술전문지에서 분류하는 주목받는 소장 작가군에 빠지지 않는 화가다. 체격이 당당하고 선이 굵어 분위기를 풍기는 게 영락없이 조부 남농이다.

허진은 허씨 가문에 내려오는 동양화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온 화가다. 낭만적인 산수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탐욕, 혼란을 그림에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가 몸담은 광주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무등산 춘설헌과 의재 허백련
마지막으로 의재 허백련은 혈연으로는 진도의 양천 허씨로 소치의 방손이자, 소치와 미산의 운림산방으로부터 학문과 그림을 전승한 법손이다. 의재는 전통적인 남종화의 문기(文氣) 어린 화풍을 고수한 인물이다.

그는 운림산방의 미산 문하에서 처음 그림을 접했으며, 20대에는 6년 동안 일본에 머물며 우에노 공원 아래 있는 일본남화의 대가 고무로(小室翠雲)의 화숙에서 남화를 연마하였다. 귀국하여 무등산 마루턱에 ‘춘설헌(春雪軒)’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시·서·화 삼절에 모두 능한 전통적인 문사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진로를 걱정하는 지사(志士)이기도 하였다.

그가 무등산 춘설헌에 살면서 추진했던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농업기술학교를 세워서 농업인재를 양성한 일이고 둘째는 차를 널리 보급한 일이다. 무등산 춘설차가 그것인데 이는 다산에서 초의선사로, 초의에서 소치, 그리고 미산으로 이어진 다맥(茶脈)을 계승한 것이다. 광복 이후 그가 보급해온 춘설차는 그러한 전통 다맥의 산물이다. 이 또한 첨찰산 운림산방에서 무등산 춘설헌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온 정신의 맥(脈)임에 틀림없다.

셋째는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갈라진 남북이 화합해서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한 일이다. 이 때문에 빨갱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어야 했다. 춘설헌에는 많은 명사들이 의재를 만나러 왔다. 광주에 온 사람들은 의재를 만나는 것이 정석일 정도였다. 육당 최남선, 효당 최범술, 노산 이은상, 미당 서정주도 춘설헌의 단골 방문객이었다.
광주 운림동에 위치한 의재 미술관

남농 기념관과 의재 미술관
의재의 유업을 계승한 사람은 장손자인 직헌 허달재다. 홍익대 미대를 나온 동양화가로, 뉴욕 주립대에서 객원교수로 있다가 현재는 의재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허씨들은 모두 인물이 좋다. 허달재씨 역시 호남형 미남이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조부인 의재의 훈도를 받았다. 허달재씨는 그 훈도를 이렇게 표현한다. “조부님은 항상 강조하셨어요. ‘내 그림이 최고로 보일 때는 손이 앞서간 것이고, 내 그림이 적게 보일 때는 눈이 앞서간 것이라고.”

의재는 서울의 유명인사가 춘설헌을 방문했을 때는 제자들로 하여금 손님 시중을 들도록 하고 시골 무명인사가 방문했을 때는 손자인 허달재씨를 불러 그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차별이 불만이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왔을 때 손자를 불러서 시중을 들게 하면 인연을 맺을 기회가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꼭 유명한 사람만 오면 손자인 저는 빼고 제자들을 부르는 겁니다.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니 이제야 조부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조부님은 일생을 공인으로서 사시다 간 겁니다.”고 허달재씨는 말한다.

춘설헌 앞 옛 농업학교 자리에 의재미술관이 개축되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이 추사에 대한 개관 강의가 있었다. 허달재는 의재미술관을 단순한 미술관이 아닌 학교 개념으로 운영하려는 포부다. 차 교육의 중심지로, 그리고 전통문화와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문화의 다양성으로 시민과 가까이 하려는 것이다.

멀리 운림산방에서 시작된 맥이 하나는 목포 유달산으로 뻗어나 남농 기념관으로 결국(結局)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광주 무등산으로 뻗어나서 의재 미술관으로 결국을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