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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주간조선] 김태호, 보통 IQ(98)였지만 고교 3년 우등생 (2010.08.16 16:31)

[주간조선] 김태호, 보통 IQ(98)였지만 고교 3년 우등생

입력 : 2010.08.16 16:31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 / 연합뉴스

高2 때 바뀐 인생행로
장래희망 ‘농업공무원’에서 ‘서울대 진학’으로

김태호(48) 국무총리 내정자의 고향인 경남 거창군 가조면 부산마을은 가야산과 비계산이 사방을 빙 둘러싸고 있는 분지에 있었다. 낙동강의 지류가 인근에 있고 논과 밭이 넓게 자리잡은 농촌 마을이다. 한때 400호가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70여호만이 남아 있었다.

가조면 일부리 부산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김 내정자에 대해 “다른 형제들과 달리 태호는 아버지 농사일을 돕는 데 아주 적극적이었던 아들”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즐비하게 내걸린 ‘축하’ 현수막은 모두 김 내정자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마을 주민과 동창들이 제작한 것이었다.

지난 8월 10일 김 내정자의 생가이자 노부모가 살고 있는 부산마을의 한옥에서 그의 부친 김규성(77)씨를 만났다. 66㎡(20여평) 됨직한 마당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본채 뒤편에는 고추, 마늘, 파 등을 심은 텃밭이 있었다. 살림살이를 넣어두는 전통적인 공간인 광에는 정갈하게 놓인 장독대가 보였고 낡았지만 깔끔한 안채 마루에선 어머니 정연조(76)씨의 부지런한 손놀림이 느껴졌다. 이 한옥은 김규성씨가 자신의 백부(큰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날 김씨는 축하전화를 받느라 휴대폰 배터리를 두 번이나 교체했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2~3년 터울의 4남매 중에서 셋째인 태호가 가장 공부를 못했어요. 태호가 중학생이던 때 평소 반에서 16등 정도를 하던 녀석이 시험을 잘 봤다면서 8등의 성적표를 내놓더군요. 대견스럽기는 했지만 1~2등을 하던 그의 형과 동생에 비하면 부족했죠. 그래서 태호를 농업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 곁에 두려고 했던 겁니다. 첫째, 둘째가 이미 대학생이 된 뒤라 사실 태호를 대학에 보낼 형편도 못됐습니다.”

"농고 졸업 후 곁에 두려 했다"

김 내정자는 우직한 노력형 인간이다. 서울대 진학부터 경남지사에 당선될 때까지 이른바 인생의 전환점을 통과할 때마다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며 스스로 삶을 개척했다는 평가다.

유년 시절 김 내정자는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시골 소년이었다. 주변에 친구가 많았던 그는 꼴(소 먹이로 쓰는 풀)베기와 돼지우리를 청소하는 시간 외에는 주로 누에를 치던 사랑방으로 친구들을 불러 놀곤 했다. 3남1녀 중 셋째였던 그는 형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업 성적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부친은 그에게 농업계 고교 진학을 권유하며 농사일을 거들 자식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김 내정자도 어릴 때부터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돕고 효도하는 아들이 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1977년 가조중학교를 졸업한 김 내정자는 그해 거창농림고등학교(현 아림고등학교)에 진학해 농경, 퇴비, 축산 등 농사일에 필요한 교과목을 이수했다. 하지만 그의 학업성적은 평범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과 달리 전교 최상위로 뛰어올랐다. 농업 관련 필수과목보다 국민윤리, 영어, 일어 등의 과목에서 특히 좋은 성적을 받았다.

거창농고 재학 시절 김 내정자는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았다. 경북대 등에 진학한 형과 누나를 동경해오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에게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농업계 고교에서 동일계 진학 시 우대를 받을 수 있는 특별전형을 통해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학(서울대)에 진학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거창농고 진학 후부터 대학진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직하게 성적관리를 하며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준비해 온 것이다. 그의 부친은 “어느날 태호가 ‘서울대에 합격을 하면 보내주실랍니까’하고 물어왔다. 힘에 부치긴 했지만 ‘그래’ 하고 답했다. 애비 입장에서 아들이 대학에 떨어지기를 바라야 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거창농고에서 대학을 가겠다고 한 시기부터 태호의 운이 좋은 방향으로 풀리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아림고에 남아 있는 생활기록부를 확인한 결과 김 지사는 3년 내내 전체 175명 가운데 5등 안에 들 정도로 우등생이었다. 1977년 4월 거창농고 입학 후 실시한 지능검사에서 IQ 98(보통지능)을 받았지만 김 내정자는 3년 내내 학업 우등상을 단 한 차례도 놓친 적이 없다. 담임 교사가 작성하는 종합평가 항목에는 ‘사려깊고 근면하다’ ‘착실하다’ ‘성실하고 타의 모범이 된다’고 기록돼 있었다. 학창시절 김 내정자는 근면과 성실성을 인정받은 전형적인 노력형 인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학지도란을 보면 그는 1학년 때까지 농업직 공무원을 희망했으나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동일계 진학’으로 바뀌었다.

아림고등학교 한광수 교장은 “내가 직접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를 가르친 적은 없다. 하지만 당시 담임 선생님들을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학창시절 김 내정자는 매사에 꼼꼼하고 최선을 다하는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한 교장은 또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생년월이 같다. 그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정치인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4남매 힘 모아 논 22마지기 마련

그러나 김 내정자의 대학 진학은 경제력이 여의치 않았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 또 한 차례 고비를 맞았다. 당시 김 내정자의 형과 누나가 모두 대학을 다니던 시기라서 부친 김규성씨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태호는 매사에 얼굴을 찌푸리는 적이 없는 아이였다. 형과 동생이 바둑을 둘 때면 혼자 밖으로 나가 소 꼴을 베어오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 아들 녀석이 대학진학을 하겠다고 말을 하는데 보내자니 돈이 없고 안 보내자니 마음이 아팠다. 결국 당시에 유력 정치인이 돼 있던 친구 동영이(고 김동영 의원)에게 태호를 맡기기로 결심했다.”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김 내정자의 집안 형편은 실제 넉넉하지 않았다. 김규성씨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논 6마지기(4000㎡·약 1200평)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조금씩 팔다보니, 4남매가 대학을 졸업할 시점에는 가진 전답이 하나도 없었다. 김씨는 4남매의 대학교육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장사를 시작했고 헛간을 개조해 돼지우리를 만들어 암퇘지도 여러 마리 키웠다. 김 내정자의 모친인 정연조씨도 누에를 키우는 한편 인근 밭을 빌려 고추, 마늘 등의 농사일을 하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씨는 “한번은 돼지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때가 있었다. 그때 운이 좋게도 우리집 암퇘지 2마리가 10마리씩 20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값이 좋아서 목돈을 손에 쥔 적이 있다. 당시 새끼돼지를 1마리당 6만5000원 정도에 팔았다. 20마리를 다 파니까, 애들 3명의 대학 등록금 정도의 돈이 모였다. 이렇게 높은 값을 받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맛에 소와 돼지를 계속 키웠다”고 말했다.

김 내정자의 부모는 아이들이 모두 성장해 분가를 한 1990년대 초반까지 자택에서 소와 돼지를 키웠다. 김규성씨는 “4남매가 모두 성장하고 나서 집 근처 논 22마지기를 사들고 내게 왔다. 아버지 소유의 논을 되찾아 주겠다던 약속을 자식들이 지킨 것이다. 나이가 많아 직접 경작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은 임대를 주고 매년 여기서 나는 쌀의 일부를 도지세로 받고 있다”고 말했다.

YS와 등산하며 배낭 대신 메기도

1980년 김 내정자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친의 중·고등학교 동창생인 고 김동영 전 의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남 거창 출신인 김 전 의원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최형우 전 의원과 함께 YS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김규성씨는 김 내정자가 서울대학교 합격증을 가져온 며칠 뒤 김 전 의원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내가 동영이한테 태호를 부탁했다. 태호가 서울대에 입학을 했는데 학비를 댈 여력이 안 되니 자네가 좀 데리고 있어 달라고. 그러자 김 의원이 ‘호적상으로는 자네 아들이지만 내가 공부를 시키는 동안에는 내 자식처럼 데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너무 고마워 눈물을 왈칵 쏟았다.”

당대 최고의 정치인 중 한 명인 김동영 전 의원과의 만남은 김 내정자의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됐다. 김 내정자는 김 전 의원의 도움을 받아 서울대 농업교육학 학사를 받은 뒤 내친김에 교육학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한편으론 김 전 의원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정치에 대한 꿈도 키웠다. 최형우 전 장관,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 등 당대의 걸출한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고 그들의 정치스타일을 몸으로 체득했다. 김동영 전 의원의 선거를 도우며 현실정치에 대한 감각도 익혔다.

김동영 전 의원은 대학을 다니던 김 내정자를 데리고 가끔 상도동 YS의 자택을 찾았다. YS가 등산을 하는 날에는 김 내정자가 배낭을 대신 메고 함께 산에 오르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의 ‘죽마고우’였던 김규성씨도 김 전 의원의 소개로 YS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김규성씨는 고졸 학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학을 중퇴했다고 한다. 동아대 법학과에 다니던 김씨는 20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는 바람에 20대부터 가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됐다. 대학을 다닐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결국 대학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 김씨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김동영 의원의 지역구인 거창·함양·산청 지구당 부위원장을 맡는 등 친구의 정치적 우군으로 ‘의리’를 지켰다.
왼쪽부터 육군 병장 시절. 고향 마을 입구에 걸린 축하 현수막. 김 내정자 생가에서 만난 아버지 김규성씨와 어머니 정연조씨 / photo 허재성 영상미디어 기자

군수시절 마을 어른 모두가 형님·아버지

김 내정자의 친화력은 촌뜨기였던 그를 오늘의 총리로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다. 김 내정자는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거창을 떠났지만 방학과 명절 때 고향에 내려오면 논바닥에 들어가 친구의 일을 도왔고 밭일을 하는 마을 어른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가방을 길바닥에 내려놓고 팔을 걷어붙인 그는 일이 다 끝난 뒤에야 집으로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는 붙임성도 남달랐다. 어렵게 대학생활을 하던 시기에 그는 공부에 매진했다. 한때 체중이 5㎏ 이상 줄어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책값이 부족할 때면 스스럼없이 김동영 전 의원이나 역시 고향 선배인 이강두 전 의원 등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던 중 김 내정자는 거창을 지역구로 둔 이강두 전 의원의 보좌관으로 여의도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과정에서 그는 10년 동안 김동영 전 장관을 통해 어깨너머로 배운 정치를 현실과 접목시킬 수 있었다. 특히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한 이 전 의원이 ‘돈 살포’ 혐의로 구속되자 옥중출마를 도와 그를 당선시키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특유의 친화력과 뚝심으로 YS의 지원을 받은 당시 여당(민자당) 후보를 따돌리고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 이 전 의원을 지켜냈던 것이다.

김 내정자의 고향집 이웃 주민 홍순기씨는 “어릴 적에 태호는 그저 그런 농민의 자식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서울에서 내려와 선거를 치른 적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말도 잘하고 얼마나 싹싹하게 사람을 대하던지 인기가 많았다. 거창에도 인물이 났구나 하는 생각에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김 내정자는 1995년 국회의원 보좌관을 그만두고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사회정책실장을 맡아 1997년 대선을 겨냥한 각종 정책을 만드는 일을 했다.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한 뒤 그는 지방의 일꾼으로 직접 정치에 나서겠다고 결심한다. 1998년 지방선거 도전은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세 번째 전환점이었다.

당시 이강두 전 의원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당 안팎에서 쌓은 그의 친화력은 또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 30대 중반의 젊은 정치 지망생이던 김 내정자는 한나라당에 경남도의원 후보 공천을 위한 경선을 요구해 관철시키며 공천을 따냈고 첫 선거에서 승리하며 도의원이 됐다. 2002년 지방선거 때는 ‘젊은 일꾼론’을 들고 나와 거창군수까지 거머줬다. 당시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강세지역이던 거창에서는 본선보다 당내 경선의 문턱이 더 높았다. 이때도 그는 공개 경선 방식으로 현실의 벽을 넘어섰다. 건장한 체격과 세련된 말솜씨로 이미 군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김 내정자의 전략은 주효했다. 경선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던 현직 군수조차 경선을 포기했다. 김동영 전 장관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거창군수 김태호가 서부 경남의 정치 샛별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거창군청 기획감사실의 한 관계자는 “김 내정자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군수로 재직했지만 인기는 대단했다. 나이가 많으면 누구든 형님, 아버님으로 부를 정도로 거부감이 없는 군수였다”고 말했다.

김 내정자는 2년간 거창군수로 재직하면서 도시녹화사업과 생활편의시설 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민의 평균연령이 높은 농촌의 특수성을 감안해 노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늘리는 데 예산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임기간이 짧아 거창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젊은 인력의 외부 유출을 막는 정책을 마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경남지사 때 ‘남해안 플랜’으로 주목받아

김 내정자가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 것은 2004년 6월 5일 치러진 경남지사 재보궐 선거 때다. 지방 도의원과 절반의 임기만 채운 거창군수를 거쳐 단숨에 경남지사까지 꿰차고 나자 한나라당 내에서는 ‘젊은 주자’로서 김 내정자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취임 첫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남해안 시대 플랜’을 들고 나와 정책에 있어서도 ‘내공’을 인정받았다. 경남은 물론 부산과 전남을 잇는 남해안을 재정비해 남해를 한국의 경제 거점으로 육성하자는 내용이었다. 초기에는 김 내정자의 플랜을 ‘뜬구름 잡기식’으로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부산·전남과 연계해 남해안공동발전협의회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고 2007년 11월 24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동·서·남해안권 발전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는 지방자치단체가 상향식으로 입법을 주도한 헌정 사상 최초 사례로 꼽힌다. 특히 남해안 특별법은 영남과 호남을 모두 포괄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상징성도 갖고 있었다. 주간조선은 당시 42세로 최연소 단체장이 된 김태호 지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고 한나라당 차기 기대주로서 그의 정치적 견해를 들은 바 있다. 당시 김 내정자는 “이젠 제대로 검증받은 대통령이 필요하다”면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패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겨냥해 쓴소리를 던지기도 했다.

경남도 도시기획과장을 지낸 이홍기 현 거창군수는 지난 8월 11일 기자와 만나 “남해안특별법은 남해를 지중해식으로 개발해 문화와 관광 등의 산업을 육성한다는 거대 플랜이다. 김태호 내정자는 남해안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남해안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곤 했다. 부산과 전남을 잇는 거대 프로젝트의 성공에는 김 내정자의 끈질긴 노력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김 내정자는 경남지사 시절 대북사업과 환경보존에도 애정을 쏟았다. 그는 2005년 경남통일농업협력회와 함께 북한에 벼농사 농기계 지원, 통일딸기 파종 등 식량증산 및 기술교류에 앞장섰고 2007년 4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측 민항기를 타고 방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람사르환경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도백’ 재임 시절 늪을 살리는 ‘녹색행정’에도 적극적이었다. 작년 9월에는 공무원노조의 민노총 가입을 강력하게 비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당시 김 내정자는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 노조가 민노총에 가입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며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고 정치를 하겠다는 공개선언과 다름없다”면서 전공노와 정면대결도 피하지 않았다.

이홍기 거창군수는 “김 내정자는 의사결정을 큰 틀에서 바라보고 결정하는 안목을 가진 분이다. 담당 국장에게 권한을 대폭 이임하고 책임있는 행정을 유도했다. 언론과 대중연설에서 늘 원고 없이 말을 하곤 하시는데, 그건 그만큼 철저한 준비와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군수는 거창 출신으로 김 내정자가 지사로 재직할 당시 지근거리에서 그를 지켜봐 왔다.

부친과 선산 가려다 총리지명 연락 받아

하지만 김 내정자는 도백 3선 도전을 포기했다. 지난 1월 김 내정자는 돌연 6·2 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중앙정치로 눈을 돌렸다. 당시 지역 민심으로 보면 재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는 “올바른 길을 찾아 의미있는 삶을 살겠다”면서 출마를 포기했다. 자리에 연연하기보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 어린 관측도 분분했다. 그러나 자리에 연연하는 구태의연함보다 언제라도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는 ‘신선한 젊은 정치인’의 이미지가 더 부각됐다. YS 최측근으로부터 정치를 배운 그가 과감한 결단과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에 있어 ‘스승’을 능가하는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번 총리 지명은 그의 불출마 선언 단계에서부터 짜여진 각본이 아니었다. 총리로 지명되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총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총리 지명자로 발표가 된 8월 8일 아침 그는 부친과 함께 고향 거창의 선산으로 성묘를 가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그날 아침 총리 내정 발표 소식을 전해 들은 김 내정자는 부랴부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했다고 한다.

‘김태호 총리 카드’는 이명박 대통령이 젊고 패기있는 인재를 영입해 집권 하반기 권력누수를 차단하고 4대강 등 주요 정책을 마무리하겠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이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김태호 지사는 크게 쓸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한편에선 김 내정자가 총리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국무위원들을 통솔하는 문제에서부터 중앙정치의 경험 부족으로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행보가 예상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연차 사건 연루 의혹으로 청문회의 가시밭길도 예상된다. 최기봉 전 경남도 비서실장은 이와 관련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은 사안이기 때문에 재론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번 청문회에서는 아니면 말고식의 의혹 던지기가 재연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한나라당 주류 측에서는 김 내정자가 영국 보수당의 40대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처럼 여권 전반에 걸친 세대교체의 주역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김 내정자의 친구인 옹경수(거창 현대자동차 영업소 운영)씨는 “친구가 10년 전에 풀뿌리 민주주의를 해보겠다고 고향에 내려와 함께 논두렁 밭두렁을 누비고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총리가 됐다.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거창군이 배출한 정치인

경남 거창군에서 처음으로 국무총리가 배출되자 최근 풍수지리전문가들의 발길이 거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김태호 총리 내정자의 등장이 거창의 지세를 새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 내정자의 부친 김규성씨는 “아들이 국무총리로 지명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풍수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몇 명 찾아와 선산의 조부묘를 보여달라고 요청을 해 왔다. 정중히 거절하고 보냈다”고 말했다.

경남 거창군은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고자 마음을 먹었을 정도로 터가 좋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크고 작은 산이 에워싼 분지 형태다. 닭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한 비계산(飛鷄山)과 가야산의 의상봉, 장군봉, 미녀봉 등이 거창군을 내려다보고 있다. 거창은 산세만 좋은 게 아니라 물도 좋다. 김 내정자가 태어난 가조면은 특히 알칼리수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가조(加祚)면의 명칭도 ‘복이 깃들다’라는 뜻이다. 일부 풍수전문가들은 “현장을 직접 가봐야 알겠지만 주변 산세 등을 놓고 볼 때 가조면 일대에 명당지세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거창군은 유력 정치인들을 여럿 배출했고 현역 정치인도 상당수 있다. 대표적으로 YS의 측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곰’ 김동영 전 의원과 4선을 지낸 이강두 전 의원이 모두 거창 출신이다. 여성 국회의원으로 4선에 오른 김영선 한나라당 의원과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도 거창에서 태어났다. 한나라당 초선인 이종혁 의원과 박민식 의원은 지역구가 부산이지만 모두 거창 출신 정치인들이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도 선산이 거창군에 있으며 그의 부친이 이곳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