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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주모 맞은 마지막 주막…경북 예천 `삼강주막` (조선닷컴 2008.02.29 11:34)

조선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의 정취
(조선닷컴 2007.03.03 13:31)

100년 풍상 버텨온 예천 ‘삼강주막’
주모는 갔어도 취흥(醉興)은 남아…
숫자 못 읽는 주모, 벽에 금 그어 외상 표시…
경상북도가 민속자료로 지정해 복원키로
<이 기사는 주간조선 [1944호] 에 게재되었습니다>

벌써 100여년이 흘렀구려. 세월은 참말 무상한 것 같으이. 이곳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이라오.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들 불렀지. 주막이 생긴 것은 1900년대 초반.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오. 그저 학자들이 “낙동강 700리 길을 통틀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전통 주막”이라며 그렇게 추정할 뿐이라오.

주막 한 켠엔 멋들어지게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있소. 사람들이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냈던 이 나무 수령이 200년이라니까, 그간 주막이 겪은 풍상을 어림할 수 있을 거요

조선의 마지막 주막’을 지켜온 이는 유옥련(兪玉蓮) 할매라오. 1917년에 태어난 할매는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에 주모로 들어앉아 2005년 10월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약 70년간 이 주막을 지켜왔소. 마을 노인은 “할매의 고향은 옆 동네 우망리”라면서 “원래 남의 집 일을 봐 주다가 네 살 위인 뱃사공 배소봉(裵小鳳)씨와 1932년 혼인해 주막을 맡았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이 주막은 할매가 맡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라오.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벽에 그어 놓은 외상 금

옛날엔 정말 좋았다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삼강리’는 상인이 흥청대는 요충지였소. 이곳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단거리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오. 마을과 주막은 상인, 뱃사람, 나들이객, 시인묵객으로 늘 붐비곤 했지. 한창일 땐 소 6마리가 들어가는 커다란 배가 오가곤 했다니까,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요.

할매는 글도, 숫자도 알지 못했다오. 그래서 한 잔을 외상하면 담벼락에 짧은 금을 긋고, 한 주전자를 외상하면 긴 금을 세로로 그어 놓았다오. 그러다 외상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외상을 지웠지. 말 그대로 외상을 ‘그은’ 거라오. 주막 주방 옆 담벼락엔 할매가 그어둔 외상 금이 여전히 남아 있다오.

비록 술장사를 했지만 할매는 단아하고 정직했다오. 마을 노인은 “인정 있고 인심 후했던 주모”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할매는 옆 동네 술도가에서 탁주를 받아다 팔았소. 당시엔 안주래봐야 어쩌다 멸치나 콩자반이 곁들여질 뿐, 평소엔 소금이 대부분이었다오. 동네 노인 정수흠(69)씨는 “돈이 없을 땐 쌀 같은 곡물을 들고 와서 술을 받아먹곤 했다”며 “어쩌다 돈이 생겨 외상을 그으면 한두 잔 더 주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외상을 먹기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군. 20~3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대여섯 달에 한 번, 어떤 땐 1년에 한 번 꼴로 외상을 갚았다오. 그러다 보니 미처 못 갚은 외상도 많았는지, 주막 흙벽엔 채 지워지지 않은 수십 개의 금이 남아 있다오.

할매의 삶은 고단했다오. 강변에 있긴 했지만 주막엔 의외로 먹을 물이 귀했소. 그래서 할매는 매일 마을로 가서, 동이에 우물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왔소. 5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매일을 그렇게 5남매를 키웠으니, 고단할 만도 했을 거요. 할매는 10여년 전부터 막걸리 대신 소주나 과자를 주로 팔았는데, 소주 한 병에 1000원을 받았다니 수입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오. 전국의 대폿집을 순례해 ‘사람아 바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란 책을 쓴 화가 사석원씨는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주모”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사씨는 할매가 작고하기 2년 전인 2003년 11월 ‘삼강주막’을 찾았는데, 그게 그만 마지막이 되고 말았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옛날 같은 정취를 느끼기 힘들다오. 마을을 가로질러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고, 현대식 다리인 삼강교가 마을과 주막 사이를 가로막고 들어선 바람에, 강 따라 소담하게 자리잡은 동네 모습이 훼손되고 말았소.

동네 노인은 “다리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봉당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는 모습을 봤다”고 하더이다. 주막을 감돌며 시원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허리를, 다리가 동강 막아버렸으니…. 도로가 생기면서 인적도 끊겨, 주막을 찾는 사람도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았다오.

주막은 원래 짚단에 진흙을 섞어 지었는데, 1934년 ‘갑술홍수’ 때 물에 잠기면서 한 번 보수를 했다오. 짚단을 얹어 놓은 원래 지붕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슬레이트로 바뀌어 버렸소. 하지만 옛 모습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라오. 진흙을 바른 담장, 구들장, 아궁이도 여전하고 할매가 쓰던 토끼굴 같은 부엌도 여전하니 말이오.

경상북도는 이 주막이 가진 지역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005년 12월 26일, 이곳을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했소. 무려 12억원을 들여 이곳을 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니, 옛 정취가 살아나길 기대해 봄직할 거요.

하지만 아쉬운 건 있소. 자식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할매가 쓰던 그릇이니 반짇고리, 옷가지, 이불 등을 죄다 태워버렸다오. 하지만 너무 무상해 하진 마시라오. 삶이란 게 우리 같은 질그릇의 삶이건 사람의 삶이건, 세상에 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말이오. 누가 또 알겠수? 문화공원이 조성되면 누군가 흙을 빚어 할매가 쓰던 우리네 그릇들을 다시 복원해줄지 말이오.


새로운 주모 맞은 마지막 주막…경북 예천 '삼강주막'
바쁜 걸음 멈추고 여기서 목이나 축이고 가이소

주모로 뽑힌 비결? 이 술상에 담겨있지
경북 상주에 사는 한민광(57)씨가 지난 22일 오후 친구들과 '삼강주막(三江酒幕)'을 찾았다. "주막이 아직 있다고 해서 구경 왔어요. 진짜 그대로네요. 옛날에 여기 나루터에서 배도 타고 했거든요." 함께 온 친구들도 신이 났다. "옛날 서까래 그대로네. 불 때는 아궁이도 다 있어. 솥도 걸렸고. 잘 왔다, 야!"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낙동강이 내성천, 금천과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 삼강 나루터가 있다. 일제 때만해도 과거 물자와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던 교통 요지였다. 부산에서 올라온 소금배, 쌀을 실은 미곡선 상인들의 물물교환으로 분주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장사치와 물자로 북적거렸다. 장이 서는 날이면 하루에도 나룻배가 30여 차례 강 이쪽과 저쪽을 오갔다.


▲ 하루 일과를 마친 삼강주막 툇마루에 마을 주민들이 앉아 맛걸리를 마신다. 주막 뒤로 강물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삼강리 주민들은 그 시절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사람들이 전부 일루 건너가. 소들도 전부 이리로 넘어갔지. 소장수들이 소를 댓 마리씩 사가지고 여기서 물을 건너 서울로 올라갔어요. 소마다 지가 신을 짚신을 한 짐씩 짊어지고 강을 건네. 그래 문경새재 넘어가지고 소한테 짚신 갈아 신겨가면서 서울까지 가는 거요. 과거 보는 사람들도 그래 다니고. 여기 주막도 손님이 그랬기 많았고. 소 일곱 마리를 실을 수 있는 나룻배와 사람 20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 그렇게 두 척이 항상 왔다갔다 했지."

삼강주막은 1900년쯤부터 삼강 나루터, 거대한 회나무 아래 자리 잡았다. 지난 2005년 90세로 사망한 '마지막 주모(酒母)' 유옥연 할머니가 삼강주막을 꾸리기 시작한 건 1930년대였다. 70년 가까이 손님을 받았다. 유 할머니 이전에도 주모가 둘쯤 더 있었다지만, 주민들은 "주모라고 하면 유 할머니만 떠오른다"고 했다.

삼강리 정재윤 이장은 "유 할머니는 글도 숫자도 몰랐지만 머리가 비상했다"고 했다. "외상을 주면 부엌 흙벽에 칼로 금을 그었어요. 세로로 짧은 금은 '막걸리 한 잔'이고, 긴 금은 '막걸리 한 되'란 뜻이에요. 외상값 다 갚으면 가로로 긴 금을 그었지요." 부엌 흙벽에는 길고 짧은 금이 무수히 남아있다. 가로 긴 금이 없는 것도 많은 걸 보면, 주모의 인심이 그렇게 야박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번성하던 나루터와 주막은 1970년대부터 쇠락했다. 나루터 아래로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끊겼다. 건설 붐으로 강 바닥에서 골재를 파내면서 그렇잖아도 줄어든 물이 더 말랐다. 회나무 뒤통수까지 차 오르던 강물은 이제 나루터 저 아래에서 골골 흐를 뿐이다.

손님은 끊겼지만 유 할머니는 주막을 유지했다. "그 할마시 아니면 벌써 없어졌지. 젊은 사람 같으면 접었을텐데. 마을 사람 오면 소주 한 병 팔고, 두 병 팔고 했지. 배 없어지고는 할마시 혼자 세월을 보냈어요."



▲ 새 주모 권태순씨와 그녀의 솜씨.

유옥연 할머니는 2005년 세상을 떠났다. 돌볼 주모가 없어진 삼강주막은 허물어져갔다. "우리나라에 주막은 이것뿐인데, 없어져야 되겠느냐"며 삼강리 주민들이 주막 살리기에 나섰다.

2005년 12월 경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정재윤 이장은 "저 부엌 덕분에 문화재로 지정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일반 가정집 부엌과 다르게 문이 네 개나 있죠? 몸만 움직이면 사방 팔방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주막집은 작지만 옹골차다.

"여자가 작아도 아는 낳는다고, 있을 건 다 있다"는 이장 말마따나, 16평에 불과하지만 부엌, 방 둘, 툇마루에 다락까지 있다.

경북도에서 1억5000만원을 지원 받아 훼손된 목재와 지붕을 걷어내고 초가집을 복원했다. 유 할머니가 금을 새긴 흙벽은 그대로 뜯어냈다가 고스란히 살렸다.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원두막 두 채도 세웠다. 1934년 '갑술년 대홍수'로 무너진 흙집 두 채도 주막 앞에 다시 들어선다. 한 채는 사공이, 다른 한 채는 보부상들이 숙소로 사용했다.

지난해에는 새 주모를 '공모'했다. 그래 봤자 삼강리 마을 주민 대상이었지만. 선발 조건은 딱 세 가지였다. '술을 직접 담가야 한다' '손님에게 친절해야 한다' '주막을 비우면 안된다'. 주민 셋이 주모 선발경쟁에 나섰고, 권태순(70)씨가 유 할머니의 뒤를 이을 주모로 선발됐다. 나이도 적당하고, 친절하고, 무엇보다 술을 잘 빚어서 남보다 높은 점수를 땄다.

'마지막 주막이 복원됐다'고 소문이 나면서 요즘 삼강주막에는 다시 손님이 몰린다. 예전 같지야 않겠지만 평일 70여 명, 주말이면 200여 명이 삼강주막을 찾는다. 나이 좀 있는 분들은 옛 주막이 남아있다는 게 반갑고, 젊은 사람들은 신기하다. 주막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맛도 꽤 근사하다. 권태순 주모가 스물한 살에 시집와서부터 빚은 막걸리는 옛날 맛 그대로다. 많이 마셔도 머리가 아프지 않다. 두부와 묵도 공장에서 만든 것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안주 중에서 으뜸은 배추전. 물에다 밀가루 푼 묽은 반죽에 배춧잎을 잠깐 담갔다가 아무런 고명도 없이 그냥 프라이팬에 지져낸다. 심심하지만, 먹다 보면 희미한 단맛과 감칠맛이 배 나온다. 꾸밈 없고 투박한, 그야말로 '경상도스런' 음식이다. 막걸리 한 주전자(1되) 5000원, 배추전 3000원, 두부 2000원, 묵 2000원. 1만2000원짜리 '세트'로 시키면 막걸리부터 배추전, 두부, 묵, 김치가 한꺼번에 나온다.

권태순씨는 주모가 된 것이 영 탐탁잖은 척한다. "사람 꼬라지 안 되고 이게 뭐꼬?" 권 주모는 막걸리 자국이 확연한 바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삼강리 노인회장인 남편 정수영(71)씨가 주막 살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 중 하나니, 주모도 남편이 하자 해서 나섰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는 한다.

주모 일을 시작한 뒤부터 권씨는 새벽 두 시는 돼야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손님에게 낼 막걸리를 빚고, 묵을 쑤고, 두부를 만들다 보면 시간이 휙휙 지나간다. 그래도 자기가 만든 술이며 안주를 손님들이 잘 먹으니 기분 좋다. 여기저기 신문이나 방송 인터뷰에서 "유 할머니를 생각하며 삼강주막을 오래 보존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진짜로 싫지는 않은 것 같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리다 점촌·함창IC에서 빠져나온다. 문경시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 방면으로 가다 보면 산양면 소재지에서 59번 지방도를 만난다. 풍양 방면으로 10분쯤 가면 삼강교다. 다리를 건너면 삼강주막 이정표가 보인다. 주막은 다리 바로 옆에 있다.

예천군 문화관광과 (054)650-6394

주모가 물러난 예천 '삼강주막'

  • 연합뉴스 (2009.04.23 09:46)

▲ 작년 1월 옛 모습에 가까이 복원돼 화제가 됐던 이 시대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경북 예천군 풍양면)의 주모(酒母)가 최근에 그만 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다.

예천 '삼강주막' 주모 1년만에 하차..왜?

  • 연합뉴스 (2009.04.23 09:17)

작년 1월 옛 모습에 가까이 복원돼 화제가 됐던 이 시대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경북 예천군 풍양면)의 주모(酒母)가 최근...

작년 1월 옛 모습에 가까이 복원돼 화제가 됐던 이 시대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경북 예천)의 주모(酒母)가 최근에 그만 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삼강주막은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 전인 1900년 무렵에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 등 세 물길이 만나는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나루터에 세워져 소금과 쌀을 싣고 온 상인과 보부상은 물론 시인, 묵객들의 허기진 배와 마음을 채워주던 곳으로 유명하다.

1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이 주막은 2대 주인이자 ’낙동강 마지막 주모’로 불렸던 유옥연 할머니가 지난 2005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거의 발길이 끊겼다가 작년 1월 어렵사리 복원되면서 옛 것을 기리려는 길손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이 주막은 관광 성수기에 평일 하루 60~70명, 주말에는 하루 300~400명이 찾을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고 최근에는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이 곳에서 4.29 재보선 불출마를 결심했다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년 1월 이 주막의 제3대 주모로 뽑힌 사람은 이 마을에 사는 권모(71) 할머니.

주막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손님을 치렀던 권 할머니는 그러나 주모 생활 1년여가 지난 지금 주막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다.

두어 달 전부터 마을 부녀회가 주막 운영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부녀회측이 내세우는 이유는 ’권 할머니가 몸이 편찮기 때문’.

그러나 권 할머니의 설명은 딴판이다.

권 할머니는 “2년 동안 주막을 맡기로 마을 대표와 약속했는데 1년도 안 돼 그만 두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라며 “별 수 없이 지난 설 이후부터 주막에 나가지 않고 있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권 할머니는 이어 “언제부턴가 주모가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결국 이런 일을 겪게 된 것 같다”라며 “농사일 제쳐놓고 나름대로 열심히 주막 일을 해 왔는데 정말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마을 관계자는 “삼강주막은 예천군의 위탁을 받아 마을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최근들어 개인보다는 마을 전체가 주막을 꾸려나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군청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을 부녀회가 운영을 맡게 됐다”라고 해명했다.

예천군 관계자는 “주막 운영은 삼강마을에 위탁한 만큼 마을사람들이 알아서 해 왔다”라며 “권 할머니와 관련해서는 손님이 많이 몰리면서 서비스가 부실하다는 등 민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천군청 홈페이지에는 삼강주막과 관련해 작년 가을에 ’음식맛이 유원지 수준이다’라는 정도의 의견이 1건 올라온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어 군청 관계자의 설명에 다소간 의구심을 갖게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모가 사라진 삼강주막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나오고 있다.

예천에 사는 한 60대 주민은 “주막에 갔더니 할머니 주모가 그만 뒀다고 해서 마음이 착잡했다”라며 “주막에서 술과 밥을 내오는 주모는 장사꾼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옛 것을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의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푸근한 아랫목같은 존재인데 못 보게 돼 안타깝다”라고 아쉬워했다.

안동에 사는 직장인 김모(43)씨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삼강주막에서 뺑덕어미같은 주모가 버티고 서서 손님을 맞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