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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푸지엔성의 토루(土樓) (스포츠조선 2009-10-20 09:23)

(18) 푸지엔성의 토루(土樓)

희종(僖宗)이 권좌에 앉아 있던 건부(乾符) 연간에는 중국 대륙에 극심한 기근까지 겹쳤다. 백성들은 살 길이 막막한데도 관료들은 세금을 더 걷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급기야 소금세를 인상하고 강제 징수하려 했다.

 참다 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소금장수의 우두머리 왕선지(王仙之)가 지금의 하남(河南) 지방인 복주에서 난을 일으켜 관군을 물리쳤다. 비슷한 시기, 산동(山東)에서도 소금장수였던 황소(黃巢)가 봉기하더니 왕선지와 합류해 강서(江西)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호남(湖南) 호북(湖北)으로 이동하면서 60만 대군으로 세력을 키웠다.

 백성들과 뜻을 같이 한 왕선지와 황소의 군대는 승승장구하며 낙양(洛陽)을 차지한데 이어 도읍인 장안(長安)까지 함락시켰다. 겁에 질린 희종은 사천까지 쫓겨 갔다. 중도에 왕선지가 죽고, 대장군이 된 황소는 국호를 '대제(大齊)'라 붙인 새로운 정권까지 세운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황소의 난'이라 기록했고, 당나라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황소를 따라 남방으로 이동했던 중원의 '객가족(客家族)'들이 그대로 남아 삶의 터전을 일궈 나간다. 복건성에도 그 후예들이 살고 있고, 그들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과 생활 습관을 이어간다.

◇ 하늘에서 본 원형 토루


 2008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토루(土樓)'가 바로 그것이다.

 토루는 오늘날 아파트 같은 공동 주택이다. 복층 구조이기에 '토옥(土屋)'이 아닌 토루가 됐다. 네모난
모양도 있고, 둥근 모양도 있다. 낮게는 3층에서 높게는 6층 규모다.

 푸지엔성 용딩(永定)현에만 무려 2만3000여채의 토루가 있고, 그 중 원형 토루는 약 3600채에 이른다. 둥근 모양의 흙집은 하늘에서 내려앉은 '비행접시(飛?)' 같기도 하고, 땅 속에서 솟아오른 '버섯(??)' 같기도 하다. 어떤 이는 '지상의 UFO'라 부를 정도다.

 원루 외에도 방루(方樓), 오봉루(五鳳樓)과 요(凹)자형,
반원형, 팔괘형 등도 있다.

◇ 용딩현의 산기슭과 계곡에 들어찬 방형과 원형 토루.
◇ 용딩현의 산기슭과 계곡에 들어찬 방형과 원형 토루.


 당나라 말부터 남송과 명말, 청초에 이르기까지 대규모로 이동한 뒤 깊은 산속에 정착한 객가족들은 적의 침입을 막고, 야생 동물들로부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이런 형태의 취락 구조를 선택했다. 유교 사상에 따라 대가족 공동 생활의 이상을 구현한 것이다.

 토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한다. 일반적으로 직경이 약 50m인 원루에는 모두 100여개의 방이 있고, 30~40가구가 지내며, 최대 200~300명까지 함께 살 수 있다. 대대손손 일가족이 독립된 사회를 구성해 공존공영(共存共榮)과 공망공욕(共亡共辱) 하는 것이다. 밖으로 외적을 막고, 안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니는데 가장 적합한 취락
구조인 셈이다.

◇ 객가족들은 토루 안에선 모든 일상 생활을 처리할 수 있다. 1층 앞 광장에서 취사를 하고 있는 주민들.



 겉모습은 거대한 토성이나 다름없는 토루의 안은 어떤 모습일까.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할까.

 원루는 두세 겹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바깥쪽은 거대한 흙벽을 10여m 높이의 4층으로 쌓았다. 두터운 저층부의 두께만 약 1.5m. 토루의 벽은 단단하다. 태풍이나 총알에도 끄떡없다. 단열 기능도 우수하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잘 계산된, 아주 과학적인
건축물임이 하나하나 증명되고 있다.

 1층은 주방과 식당, 2층은 창고, 3층과 4층이 침실이다. 밖에서 보면 1~2층에는 창문이 없다. 주거
공간이 아닌 만큼 방어에 유리하도록 설계했다. 각 층은 4~5개의 공동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며, 방들은 주랑(走廊)으로 이어져 있다.

 2층 높이의 가운데 원형에는 30~50개 정도의 객방(客房)이고, 중심부에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이곳에선 100여명이 동시에 혼례나 상례,
경사스런 일 등을 공동으로 치룰 수 있다. 토루 안에는 우물과 욕실, 방앗간 등이 있어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

◇ 세 겹으로 된 원형 토루
◇ 세 겹으로 된 원형 토루


 용딩현 까오터우(高頭)진에 있는 사환원루(四環圓樓)인 '승계루(承啓樓)'는 중국에서 가장 큰 팔괘토루로서 '토루지왕(土樓之王)'이라 불린다.

 현재 강(江)씨 성을 지닌 57가구 300여명이 살고 있는 승계루는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중심부에서 작은 사당을 만난다. 민국 31년 임삼수(林森手)가 '필화로(筆花盧)'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을 끼고 4환에 해당하는 회랑이 빙 둘러 서있다.

 3환은 1층 높이로
도서관으로 쓰이는 32칸의 방이 있고, 2환은 2층 높이로 각 층 40칸씩 80칸의 방이 있다.

 가장 바깥쪽 외환은 4층 높이로 직경이 62.6m, 전체
둘레가 229m로 각 층마다 72칸씩 총 288칸의 방이 들어차 있고, 2층부터 4층까지 회랑의 지붕도 안에서 바깥쪽으로 기울기를 만들어 빗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했다.

◇ 필화로와 승계루의 환원
◇ 필화로와 승계루의 환원


 용딩현의 동남쪽 후캉(湖坑)진의 임(林)씨 집성촌인 홍캉(洪坑)촌에는 숭유루(崇裕樓)와 남창루(南昌樓) 등 서로 다른 방형토루 36채와 '흙집의 왕자'라 불리는 원루인 진성루(振成樓)가 유명하다.

 유경루(遺經樓)는 대표적인 방형토루다. 외벽의 동서너비는 136m, 남북길이 76m인데 주
건물은 5층으로 되어 있다. 주 건물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4층 건물이 수직으로 연결되어 커다란 입구(口)자를 형성한다. 입구(口)자형의 건물 안에는 또 작은 입구(口)자의 건물이 들어 있어 돌아올 회(回)자를 이룬다. 문안에 문이 있고, 건물 안에 건물이 겹겹이다.

 전라갱(田螺坑) 토루는 5개의 흙집이 모여 있다. 바깥쪽은 원형이고, 가운데 방형이 자리 잡았다. 산 기슭에 층층 만들어진 다락밭과 조화를 이룬다. 600여년 전, 오리를 키우면서 이 곳에 눌러 살던 이들은 어미오리가 산기슭의 우렁이를 잡아 먹더니 알을 많이 낳은 덕에 아주 잘 살았다고 한다. 근사한 집까지 짓게 되자 동네 이름을 '전라갱'이라 붙였다.

◇ 전라갱 토루 군락
◇ 전라갱 토루 군락


 까오터우진과 후캉진 뿐 아니라 해발 400~500m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추시(初溪), 현존하는 방형토루 중 가장 오래된 필산루(弼山樓)가 있는 후(胡)씨 마을인 중촨(中川), 청석로와 어우러져 세외도원의 풍광을 연출하는 난시(南溪) 등에도 토루가 산재돼 있다.

 난징(南靖)현에는 현존하는 토루 중 가장 오래된 유창루(裕昌樓)와
메이린(梅林)진의 화귀루(和貴樓) 등이 남아 있다. 유창루는 1350년 건립돼 600여년을 지내면서 1972년 지진의 영향으로 약 8도 정도 기울어져 '동도서왜루(東倒西歪樓)'란 별칭을 얻었다.

 중국 대륙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 앞에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뭉쳤다. 종족 보존을 위해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공동 주택을 지었다. 이들의 삶의 흔적은 지금 대륙의 남쪽에 남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객원기자
www.chinain.co.kr


(17) 죽림칠현의 은둔지 운대산

깊은 골, 높은 봉마다 사연이 가득하다.

 온통 원시림에 덮여 있고, 계곡마다 맑은 물이다. 덩달아 여기저기 천자백태(千姿百態)의 폭포와 물 웅덩이들이 만들어졌다. 기봉이석(奇峰異石)은 시가 되고,
그림이 된다.

 한나라 헌제(獻帝)는 더위를 피해 이 곳을 찾았고, 위진(魏晋)시대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은거지요, 당나라의 '약왕' 손사막(孫思邈)은 불로장생 단약을 찾아 온산을 누볐다.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는 '9월9일
산동의 형제를 회상하며(九月九日憶山東兄弟)'라는 시에서 운대산의 풍광에 빗대어 고향을 그리워했다.

 '홀로 타향에서 낯선 나그네 되어(獨在異鄕爲異客)

 봉우리마다 명절 오면 부모 생각 간절하네(每峰佳節倍思親)

 멀리 형제들이 높은 곳에 올랐음을 알거늘(遙知兄第登高處)

 수유봉 다 돌아도 여전히 혼자라네(遍揷茱萸少一人)'

 

 

운대산 홍석협의 폭포

 최고봉인 수유봉(茱萸峰, 1308m)을 따라 봉우리와 계곡이 이어지고, 곳곳에 시인묵객들의 비각이 들어서 있다.

 바로 운대산(雲臺山)이다. 중원 땅, 허난(河南)성의 쟈오주오(焦作)시 쉬우(修武)현에 있는 아름다운
세계지질공원으로 1000 계단을 밟고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 멀리 태행산(太行山)이 보이고, 남으로 회천(懷川) 평원이 펼쳐진다.

 난세를 만난 선비는 어떻게 살았을까.

 위나라 말, 혼란스러웠다. 정치 권력은 부패하고,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실세였던 사마(司馬) 가문에서 국정을 장악했다. 마음대로였다.

 노장(老長) 사상에 빠져 있던 혜강(?康)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영(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등은 방관자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세상 풍자를 일삼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 콧방귀 끼기 일쑤였다.

 집권층의 회유를 뿌리치고, 하나 둘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운대산이었다.

 사마 가문은 어수선한 세상을 평정하고, 진나라를 세웠다. '새 시대가 열렸다'며 산 속에 은거 중인 일곱 은자를 다시 설득하고, 회유했다. 하루 이틀 사흘.... 끈질긴 구애가 효과를 나

 타냈다. 혜강을 뺀 나머지는 은둔을 끝내고 하나 둘 환속했다. 끝까지 버티던 혜강은 형장의 이슬로 '전설'이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죽림칠현'이라 했고,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운대산은 높은 봉우리와 협곡으로 떨어지는 자연 폭포

 

운대산 골짜기에 들어서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왜 '죽림칠현'이 이 곳을 은둔지로 삼았는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맑은 물과
기암괴석, 짙은 녹음이 함께 어우러진다. '세 걸음마다 샘이요, 다섯 걸음이면 폭포요, 열 걸음에 담이로다(三步一泉 五步一瀑 十步一潭)'란 말이 결코 흰소리가 아니다.

 '중화 제1 기협' 홍석협(紅石峽)과 '중원 제1 협곡' 청용협(靑龍峽), 천폭협(泉瀑峽)과 담폭협(潭瀑峽), 미후협(??峽)과 봉림협(峰林峽)까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특히 아직 개방하지 않는 백가암(百家巖)은 많은 옛 이야기와 연을 맺고 있다. 산중 정원의 발상지로 알려진 백가암은 한나라 헌제 유협(劉協)이 피서를 즐기던 곳이다. 그리고 죽림칠현이 20여년 동안 머물렀을 뿐 아니라 은사인 손등(孫登)과 왕열(王烈)도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다.

 '손등소대(孫登嘯臺)', '왕열천(王烈泉)', '유영성주대(劉伶醒酒臺)', '혜강쉬
검지(?康?劍池)'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당나라 천재 시인 중 한 명인 전기(錢起)는 백가암에서 '손등'을 생각하며 시를 남겼다.

 '바위 사이 계류는 우당탕 퉁탕, 대숲 깊이 스며든 햇살(崖石亂流處 竹深斜照歸)

 주인은 커다란 바위에 누워 스스로 맑은 마음 수양하네(主人臥巨石 心自滌淸暈)

 봄날 번개 번쩍 하니 빈 계곡에 꽃 향기가 흐드러진다.(春雷近作解 空谷半芳菲)'

 

 

홍석협의 푸른 계곡물과 수많은 관광객

 '온반협(溫盤峽)'이라고도 불리는 홍석협은 늘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깊은 계곡을 감고 돌아가는 푸른 물과 기이한 협곡의 분위기가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깎아지른 절벽에 띠를 파놓은 듯 만들어진 탐방로를 따라가면 선경(仙境) 속을 거니는 착각에 빠진다. 고개를 내밀어 밑으로 보면 까마득한 절벽이고, 계곡은 꾸불꾸불 이어지며 아홉 개의 담을 만들었다. 수룡(首龍), 흑룡(黑龍), 청룡(靑龍), 황룡(黃龍), 와룡(臥龍), 면룡(眠龍), 성룡(醒龍), 자룡(子龍), 유룡(游龍)까지 '구룡담(九龍潭)'이다.

 유폭(幽瀑), 천석동(穿石洞), 상문석(相吻石), 쌍사급수(雙獅汲水), 공작개병(孔雀開屛), 기반석(棋盤石) 등도 잘 어울린다. 특히 50여m의 낙차로 떨어지는 백룡(白龍)폭포가 일품이다.

 계곡 양쪽에 우뚝 선
고산들은 마치 '석궐(石闕)'인 듯 자리 잡고, 운대산의 서대문(西大門) 노릇을 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을 띠처럼 파놓은 탐방로와 계곡

 담폭협은 운대산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흐른다. 총길이 1270m로 '대자연의 걸작'임이 분명하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폭포가 있고, 주천(走泉)과 채담(彩潭)이 어우러지며 담폭천을 이른다.

 담폭협(일명 小寨溝)을 걷노라면 마치 12악부로 구성된 산수악장(山水樂章)을 듣고 보는 듯 하다. 제1담에서 손님을 맞이한 뒤 구대정인(九對情人), 비취선자(翡翠仙子), 금담은폭(金潭銀瀑), Y자폭담(Y字瀑潭), 군방경수(群芳竟秀), 수당산채(隋唐山寨), 청의선지(淸?仙池), 수렴
선거(水簾仙居), 벽옥선자(碧玉仙子), 선종검영(仙踪劍影), 용봉정상(龍鳳呈祥)으로 이어지며 각양각색의 풍광을 노래한다.

 

 

천폭협 입구

 천폭협(일명 老潭溝)은 총 3km의 긴 협곡이다. 기석과 산천꽃향기와 폭포의 물줄기가 어우러져 교향곡을 만든다. 높이가 무려 314m인 운대천폭(云台天瀑)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파란 하늘과 입 맞추고 있는 듯 하다. 이밖에 오노봉(五老峰), 공작천(孔雀泉), 사어천(私語泉) 등이 원시 자연의 멋을 물씬 풍기고 있다.

 

 

운대산의 폭포

 수유봉은 소북정(小北頂)이라고도 한다. 진무대제묘(眞武大帝廟)가 있고 천교(天橋), 운제(雲梯) 등이 있다.

 아직도 야생 원숭이가 뛰어노는 미후협과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張良)의 은거지였다는
산정호수 자방호(子房湖, 일명 平湖), 십리평호를 끼고 있는 봉림협 등도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속세를 떠난 자들의 땅, 운대산의 계곡과 봉우리에선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16) 영화로 유명한 마을 부용진

1949년 10월1일 베이징의 티엔안먼(天安門)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중국인이 이제 일어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60년이 흘렀다. 대륙은 지금 대대적인 경축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한중 수교 17년. 황해를 사이에 두고 인적, 물적 교류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무너진 뒤, 1989년 처음으로 한국 땅에서 상영된 중국 영화는 1986년 제작된 '부용진'이다.

◇ 부용진의 천하제일라


 구화(古華)가 마오의 고향인 후난성 서쪽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문화대혁명 전후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을 셰진(謝晋)이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

 소수민족 토가족(土家族)의 전통이 살아 있는 부용진(芙蓉鎭)은 예로부터 쌀두부가 유명하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1963년 봄, 남편 여계계(黎桂桂)와 함께 쌀두부집을 열어 돈을 번 호옥음(胡玉音).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부용진의 좁고 오래된 골목에서 이어진다.

 평온한 마을에 국영음식점의 여성 경리인 이국향(李國香)이 부임하면서 정치 운동이 벌어진다. 호옥음도 우파로 분류돼 대중
모임에서 호된 비판을 받는다. 가게를 빼앗기고, 남편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한다. 결국 사상 개조를 위해 거리를 청소하는 신세로 내몰린다.

◇ 영화 '부용진'에서 거리 청소를 하고 있는 호옥음과 진서전


 호옥음은 이미 우파로 지목돼 거리 청소를 하고 있던 진서전(秦書田)을 깊이 알게 된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빗자루를 들고 춤을 추는 등 함께 어울린다. 어느 날 호음옥이 병으로 눕자 진서전은 정성스레 간병한다.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당은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 뒤 공식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 불법 결혼은 죄였다. 진서전은 10년 징역형을 받고 수감됐고, 호옥음도 3년형을 받지만 임신 중이라 투옥되지 않는다.

 호옥음은 혼자 아이를 낳다가 위험한 고비를 맞지만 미곡창 주임이었던 곡연산(谷燕山)이 구해준다. 호옥음은 계속 거리 청소를 하면서 아이를 키운다. 그런 와중에 문화
대혁명도 막을 내린다.

 당은 호옥음에게 쌀두부집과 몰수했던 돈을 돌려준다. 그리고 호옥음의 바람대로 남편 진서전을 사면하고, 가족이 모여 살도록 해준다.

◇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113호 류샤오징 쌀두부집


 상시(湘西)의 소진(小鎭)은 영화 '부용진'의 촬영장으로 유명세를 타자 '왕촌(王村)'이란 원 이름까지 묻어 버렸다. 여기저기 골목 안에 들어선 쌀두부집은 너도나도 여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류샤오징의 이름을 따 '정통 류샤오징 쌀두부집(正宗劉曉慶米豆腐店)'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왕촌은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고 있는 세계자연유산인 장가계에서 버스 약 2시간 거리에 있다.

 왕촌을 끼고 강이 흐른다. 예로부터 초촉통진(楚蜀通津), 초나라와 촉나라로 통하는 '천년
나루'다. 한 고조 5년(기원전 202년), 일찌기 유양현(酉陽縣)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통팔달 물길이 이어져 '작은 남경'이라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교역이 활발했다. 청나라 건륭, 가경, 도광 연간에는 총 500m 정도인 돌길을 따라 크고 작은 가게가 300여채, 음식점과 객잔이 100여호에 달했고 매일 오가는 상인들이 무려 2000여명을 넘어 섰다.

 지금은 옛 영화를 관광객들이 대신하고 있다. 부용진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쌀두부'를 먹는다. 마치 가래떡을 엄지 손가락만 하게 뚝뚝 잘라 놓은 듯한
모양이다.

 쌀두부는 쌀을 맷돌에 갈아낸 뒤 석회수에 넣고 끓이면 된다. 몸의 열을 내려주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어 여름철
간식으로 제격이다.

◇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쌀두부 그릇


 골목길 입구 '정절(貞節)'을 새겨 놓은 패루 옆에 있는 '정통 113호 류샤오징 쌀두부집'은 늘 많은 손님이 북적인다. 작은 탁자에 옹기종기 앉거나 그냥 선 채로 '부용진의 맛'을 즐긴다.

 부용진은 토가족의 민속 풍정이 넘쳐 난다.

 담배, 술 모두 전통 방식으로 만든다.
대나무통에 담겨 있는 술이 있는가 하면 '토가연(土家烟)'이란 전통 담배도 있다. 고기나 생선은 바람에 말려 내걸었고, 생강을 주원료로 만든 엿(姜糖)을 특산품이라 자랑한다.

 은 세공품이 많고, 전통 비단 공예품은 알록달록 화려하기 그지없다.

◇ 강변 은 공예품 판매점


 먼 옛날, 토가족 마을에 '서란(西蘭)'이란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다. 이 아가씨는 '카보(?普)'라는 긴 비단을 짜는데 능했다. 그래서 토가족들은 자신들의 전통 비단 공예를 '서란카보'라 불렀다. 마흔 여덟 번이나 땀을 따 전통 모양을 냈다.

 부용진의 석판가를 걷노라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다. 무너질 듯 퇴락한 조각루는 물론 이끼 낀 지붕을 이고 있는 옛
건물이 이어진다. 골목 안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관음각이 있고, 커다란 별 하나를 부조한 옛 가무청(歌舞廳)도 있다.

 골목의 끝은 강으로 이어진다. 쉬엄쉬엄, 터덜터덜 걷다보면 '부용진'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성문에 닿는다. 성문 옆은 수풀이 자라고 있는 폭 42m, 총 높이 60m 가량의 2단 직벽이다. 수량이 많은 여름철이면 물안개를 일으키며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 부용진 전통 마을 입장권 매표소


 '800년 토가족, 300년 마을, 100년 가옥, 1000년 돌길, 10000년 대폭포(八百年土司 三百年鳥龍寨 百年弔脚樓 千年石板街 萬年大瀑布)'란 글을 붙여 놓은 입장권 판매소가 떠오른다. 폭포 옆으론 유양궁(酉陽宮)이 보인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강을 꿈꾸고 있다. 황제를 몰아내고, 공산당이 승리한 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을 거치면서 신중국 성립 60주년을 맞았다.

 부용진은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전후의 이야기로 유명해진 마을이다. 천년의 돌길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옛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그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