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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주유(周瑜) (skhan198 2003.09.27 08:21)

주유(周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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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周瑜) 175-210년

오의 장수. 자는 공근(公瑾). 서성 사람.

손책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또 손책이 부친 손견을 잃은 뒤부터는 장소와 함께 손책을 보좌하여 오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200년에 손책이 죽고, 19세의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장소, 정보 등 문무관과 함께 손권을 보좌했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가 되었다. 그는 익주의 유장이 한중의 장노 공격에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했다.



불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주유는 그 짧은 생애대로 제6권에서 큰 활약상을 보여 주는데 그치고 만다. 적벽대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지만, 이후로는 제갈공명의 계책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그런 주유는 용모가 뛰어났고,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도 남달랐다. 술자리에서 음악을 듣다가도 연주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잘못 연주한 악사 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때문에 '연주가 틀리면 주유가 뒤돌아본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주유와 손씨 집안의 인연은 2대에 걸친 것이었다. 17로 제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손견은, 제후 연합군에 참여하면서 가족들을 서현으로 옮기게 했다. 서현 출신의 주유는 그곳에서 손견의 아들로서 자신과 동갑내기인 손책과 처음 만난다. 대대로 한나라의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이자 부유한 집안 출신인 주유는, 손책 가족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손책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셨다. 손책 역시 젊어서부터 남다른 기개와 용맹으로 이름이 높았기에, 주유과 손책은 문자 그래도 의기투합했던 셈이다.



손견이 죽은 이후 원술에게 의지하고 있던 손책이 원술로부터 군사를 빌려 강동의 오군 지방으로 왔을 때, 주유는 오랜 친구 손책의 부탁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손책을 돕는다. 특히 손책에게 군량미와 배를 조달함으로써 손책이 강동에서 기반을 닦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손책과 주유는 교공의 두 딸로서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자매 대교와 소교를 각기 아내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오랜 친구이자 동서지간이 된 것이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동오를 치러 나서자, 주유는 조조의 병사들이 수전에 능숙하지 못하고, 먼 거리를 왔기에 피로하며, 풍토병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를 들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적벽대전을 통해 적중했다. 황개를 이용한 고육지책과 화공법을 사용하여 조조군을 대파시켰던 것이다. 소설에는 적벽대전의 승리에서 제갈공명의 역할이 두드러지지만, 적벽대전은 역시 조조군과 주유군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오에서 주유가 차지하는 위치는 단순히 주군을 섬기는 신하와는 달랐다. 이미 말했듯이 손책과 주유의 관계는 주군과 신하이기 전에 절친한 친구이자 동서지간이다. 주유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셨던 손권의 어머니는 손권에게 주유를 형님으로 대접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손권 입장에서 보면 주유는 자신의 형인 손책의 친구, 그러니까 형님이 되는 셈이다.



강동 지역을 차지한 것에 만족하고 있던 손권과는 달리, 주유는 유비와 조조를 차례로 공격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계획을 품었다. 조조에게 복종할 것을 주장하는 손권의 많은 신하들과는 달리 조조와 맞설 것을 주장한 것에서도 주유의 남다른 패기와 뜻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주유는 손권보다 지략이 뛰어나고 포부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지만, 주유가 36세의 나이에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삼국지의 내용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호북성 적벽에 있는 주유상.





주유의 고향 안휘성 노강현에 있는 주유의 묘. 주유는 건안15년(기원후210)에 세상을 떠났다.(한나라 당시에는 노강군 서현.)



삼국지(三國志) 이야기

loveyokk
2004.03.0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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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周瑜) - 제갈량의 숙명적 라이벌 '적벽대전'의 일등공신


<연의> 속에 등장하는 주유는 한평생 제갈량과 허허실실의 지모를 겨루지만 번번이 실패. 36세라는 한창 나이에 한을 품고 세상을 뜬다. <연의>에서의 주유는 제갈량의 노리개감으로밖에 표현이 안되지만 진수의 정사를 통해 주유의 진면목을 살펴보기로 하자.

공명과 숙명적 라이벌, 주유의 실상

<연의> 속에서 제갈량의 숙명적 라이벌은 처음에는 오의 주유, 말년에는 위의 사마의(司馬懿)다. 나이로는 주유(175~220)가 가장 많다. 제갈량(181~234)보다 여섯 살 위이고, 사마의(197~251)보다는 네 살 위이다. 주유에게 10년만 더 살 게 했어도 '천하 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양상은 달라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데, 하늘의 장난은 참으로 짖궂다 아니할 수 없다.

주유(周瑜 資는 公瑾)는 양자강 하류 근처의 노강(盧江) 서현(舒縣) 사람이다. 종조부와 종백부가 모두 조정에서 태위(太尉 :三公의 하나)를 지냈고, 아버지 주이(周異)는 낙양현(洛陽縣)의 지사를 지냈으니 가위 명문이라 할 만하다. 주유는 잘 생기고 체구가 늠름했다 한다.
몇 해 뒤 애기지만 조조가 주유의 소문을 듣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장간(蔣幹)을 시켜 사람됨됨이를 살펴보게 한 일이 있다. 장간 역시 인물 감정에 나설 만큼 보통이상의 식견이 있었지만, 그를 만나고 와서 칭찬했다는 애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것을 보면 조조의 명령에 겁을 먹고 꼼짝없이 상경한 사마의와는 인물의 질이 달랐던 것 같다.

주유는 손책과 동갑내기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었다. 당시 손권의 어머니는 손권에게



"주유는 네 형과 생일만 한 달 뒷일 뿐 같은 나이라 내 그를 자식같이 생각하는 터이니 너 역시 그를 형처럼 섬겨라"고 타이른 일이 있다

손책이 아버지 손견(孫堅)을 따라 서현으로 이사를 왔을 때 주유는 서슴없이 자기네 큰 저택 하나를 그에게 선물했고, 그로 말미암아 주유는 손책의 어머니를 뵙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주유를 어찌 옹졸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손책이 아버지의 뒤를 이은 것은 약관 18세 때였다. 그후 손책이 25세에 비명으로 갈 때까지 주유는 원술(袁術)의 유혹을 물리치고 끝내 그와 행동을 같이 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동생 손권이 대를 잇자 역시 그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역사에 길이 빛나는 주유의 공은 적벽대전에서의 작전 성공이다.

<연의>에도 나오는 대로 조조가 대군을 휘몰아 장강 북쪽에 진을 치고 손권에게 도전장을 보내자. 오나라의 국론은 화, 전 양론으로 갈려 결론을 못 내린다. 주전론의 한 사람이었든 노숙은 때마침 외지에 파견돼 있던 주유를 곧 소환토록 손권에게 권하다.

명쾌한 정세판단 - 주유의 식견

손권의 부름을 받고 급히 임지에서 돌아온 주유는 전략회의 석상에서 명쾌한 주전론(主戰論)을 편다. 천하정세를 손 바닥 들여다보듯 꿰뚫은 명론(名論)이지만 실은 일생 일대의 대도박이기도 했다.

주유의 말을 듣고 속이 후련해진 손권은 장도를 뽑아 탁자 모서리를 내리치고는 회의에 참석한 뭇 신하들에게 선언했다.

"앞으로 또다시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 탁자와 같은 꼴이 되리라."

이리하여 적벽대전은 막을 올린 것이다. <연의>에는 제갈량의 충동절에 손권과 주유가 격발 당해 싸움을 결단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사를 믿는 한, 제갈량이 한 일은 손권과 동맹을 맺는 데 기여했을 뿐, 작전에는 아무 역할도 한 게 없다.

적벽대전이 이상과 같은 경위로 시작되어 황개(黃蓋)의 '고육지계(苦肉之計)'로 화공(火公)이 성공, 대승을 거두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조조가 이렇게 대패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꿈은 깨지고, 삼국정립의 형세를 지속하면서 서로 허허실실의 외교 흥정과 권모술수가 오고 간다.

손권의 어머니는 처음 주유를 보고 나서 그 인품에 감동하여 손권에게 형으로 대접하게 했는데, 당시 손권은 형이 살아 있을 때라 지위는 장군에 불과했다. 그래서 다른 장군들이나 신하들이 모두 그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소홀했는데, 유독 주유만은 손책의 친구인데도 그 동생인 손권을 극진히 공경하고 신하로서의 법도를 지겼다.

주유의 성품이 대범하고 마음이 넓고 커서 모든 사람이 그를 따랐는데, 다만 정보(程普)만이 한때 그를 업신여겼다. 정보는 여러장수 중 최연장자로 손견을 따라 대를 이어 충성한 공로자이니 젊은 주유의 득세가 가당찮았을지 모른다. 그런 정보도 주유와 깊이 사귀면서부터 젊은 주유에 심복해서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다 한다.

원술이 장군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사양하고 주유가 손책에게로 갔을 때이다. 손책은 몸소 그를 마중했고, 그에게 전례없는 대접을 해서 화제가 됐는데 손책은 이런 포고까지 내렸다.

"주유는 나와 죽마고우이고 형제 같은 사이다. 내가 단양(丹陽)에 있을 때 그는 병사와 배, 군량까지 지원해줘서 나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공로에만 보답한다 해도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당시 주유는 24세.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周郞 :주서방님)'이라고 불러 친근감을 표시했다.

주유도 한낱 픽션으로 말미암아 우스갯거리가 된 비극의 주인공이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기타] 인터넷 : http://my.dreamwiz.com/pkm0237/heros/juyoo.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