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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시인 김지하, 문호(文豪) 박경리에게서 `화엄개벽`을 보다 (조선일보2009.10.17 10:57

시인 김지하, 문호(文豪) 박경리에게서 '화엄개벽'을 보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어머니들, 아이들 억압하지 마세요"
여성의 힘 되살아나는 새 문명사가 '화엄개벽' "장모는 주역의 대가"
"창조적 발상은 여성에게 의존할 수박에 없어"

시인(詩人)은 화가 나 있었다. 얼마 전 스웨덴에 간 걸 두고 뒷얘기가 있었다. 노여움에 불을 지른 건 '노벨문학상을 노린다'는 해석이었다고 한다. 김지하(金芝河·68)의 스웨덴행(行)은 한·스웨덴 수교 50주년 강연 때문이었다.

"내가 ○나 △같은 졸때기도 아니고…, 문학을 상(賞) 타려고 해? 괴로워서 하는 거잖아! 전 이미 옥중(獄中)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이라는 로터스 특별상(1975년)을 탔어요. 상(賞)하고의 인연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이야기에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친구 이야긴 묻지도 마. 정치 얘기도 안 할 거고." 경망(輕妄)의 대표격인 한 인물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흡족한 듯 그가 '숙제'를 냈다.

"잡지에 글을 썼어요.
박경리(朴景利) 선생 평론인데 제목이 '흰그늘과 화엄(華嚴)'이야. 200자 원고지 400장짜린데 꽤 어려워. 다 읽고 오세요. 근데 말투가 조폭(組暴) 같은데, 토건(土建)업자 냄새도 나고?…."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토지(土地)문학관은 산속에 있었다. 자궁(子宮) 속 태아(胎兒) 같은 모습이었다. 앞은 황금빛 들판이었다. 내방객은 드물었다. 시인은 약속했던 낮 12시가 훨씬 지난 1시쯤 나타났다.

토지문학관 앞 소나무 곁에 시인(詩人)이 서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흡족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줬다. 한 폭의 동양화 같다는 느낌이 그 순간 들었다.

김지하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흰그늘과 화엄'의 보충자료라며 육필(肉筆) 원고 복사본을 건넸다. "여기가 남에게 잘 안 보여주는 곳"이라며 방으로 안내했다. 목판 속에 새겨진 박경리가 사위와 기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연

문학청년 시절 김지하는 서울 정릉 박경리 집에 가끔 갔다고 한다. 한번은
김동리(金東里)의 집에 갔다 허탕친 후 박경리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유현종(劉賢鍾), 김국태(金國泰)와 함께 그는 맥주를 얻어먹었다.

1972년 10월 유신(維新) 선포 때도 그곳에 갔다. "기관원들이 잡으러 올 게 분명하니 며칠만 숨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박경리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딸 김영주는 어머니에게 "매정하다"고 했다.

터덜터덜 뒤돌아 나가는 그에게 김영주가 달려왔다. "어머니가 혼자 살다 보니 성격이 그렇다. 이해해 달라"며 대신 사과한 것이다. 소설(小說)의 산맥(山脈)과 시의 거봉(巨峯)이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친구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설악산으로 숨기 위해 새벽 골목길을 나서다 친구 집 앞 담벼락에 백묵으로 뭔가를 썼다. '민주주의 만세.' 그 문구가 훗날 절편(絶篇)으로 탄생했다. '타는 목마름으로'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김지하의 표정은 다양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카리스마에 섞여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중에 사진을 확인하면서 사진기자가 말했다.“ 워낙 표정이 좋아서 크게 써도되겠는데요?”

―'박경리론'이란 평론이 꽤 어렵더군요.

"제 전공이 미학(美學)이잖아요. 박 선생 문학을 정리하려고 벼르다 이번에 그 글을 썼습니다."

―장모의 문학을 평하는 게 쉽지는 않지요.

"장모가 돌아가신 후 기념행사가 많았어요. 매번 그런 자리 나가기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궁리하다 내용으로 그분의 기념비(紀念碑)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아시아권에서 상(賞)을 만들 계획도 있고요."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토지' 소설 세 편을 분석했습니다. '흰그늘의 미학'으로 시작되는데 무슨 뜻입니까.

"게로니모스 하이로미에라는 15세기
이탈리아 시인이 '흰 눈부심을 거느린 검은 악마들의 시위'라는 시를 썼습니다.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땝니다. 종교 지도자의 사생아 30명이 여자를 끼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였어요. 정신 질서가 붕괴될 때 나타난 게 옛 희랍 인문학입니다."

―희랍의 인문학이 흰색, 윤리적 타락은 검은색이라는 건가요.

"검은색을 다 부정할 순 없지요. 죽여 없앨 수도 없고. 어스름 저녁 물빛을 보면 반짝하고 흰빛이 순간적으로 비쳐요. 융합되는 것, 그게 바로 흰그늘입니다."

―일전에 칼럼에서는 '욕이 많아지는 게 르네상스가 온다는 증거'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측천무후(아내)'가 절대 욕하지 말라고 했는데, 피렌체나 베네치아의 귀족, 귀부인들이 당시 쓴 욕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했어요. 우리도 남자 성기(性器)를 가리키는 말이 PC방 상호(商號)가 될 정도잖아요. 그게 네오(Neo) 르네상스가 올 징조지요."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에서 시인은 '경제적 삶의 흙탕물 속에서 끝내 삶의 신조를 버리지 않는 젊은 여인의 하얀 이미지'를 흰그늘이라 했습니다.

"그건 서세동점기(西勢東漸期), 근대문명의 변화와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서사(敍事)의 압권이지요. 여성이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 것인가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아시안 네오(Neo) 르네상스를 위한 미학'이 바로 흰그늘이란 말에 숨어 있습니다. 박 선생은 대단한 분이었어요."

―수년 전부터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가 온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올까요.

"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나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미 세계가 다극(多極)체제가 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중국 해남성(海南省)에서 열린 포럼에서도 자본의 중심이 동아시아에 와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말 알죠?"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가치잖아요. 자본 중심이 옮겨왔으면 가치 중심도 동아시아로 오게 됩니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놀라요. 예지자(豫知者)의 면모를 느꼈습니다."

―그런 소설을 왜 평론가
백낙청은 멜로 드라마적 조작이라고 평했을까요.

"크게 잘못한 거지요. 하버드대에서 엘리어트나 좇던 사람이 6·25를 어떻게 제대로 알겠어요. 깊이 새긴 뒤에 평필(評筆)을 들어야지."

―박경리 선생이 생전(生前)에 시인의 분석에 동의하던가요.

"사위와 장모가 작품을 놓고 논할 수는 없지요."



파국

박경리론은 '흰그늘'에서 '검은 암소(牝牛·빈우)' '검은 구멍(玄牛·현우)'과 '화엄개벽(華嚴開闢)'으로 확장된다. 검은 암소는 주역(周易)에 등장한다. 모성(母性), 생산력, 포용력, 부드러움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여성의 힘이 되살아날 때 도래할 새 문명사가 불교(佛敎)와 동학(東學) 용어를 합친 화엄개벽이다. 시인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과 '토지'에 이 암시가 숨어 있다"며 "표는 안 냈지만 장모는 주역의 대가"라고 했다.

―하필 여자가 '검은 암소'나 '검은 구멍'입니까.

"복희씨(伏羲氏)가 동굴 속에서 여자, 아이들과 7년을 보냅니다. 거기서 인류 최초의 문자인 '결승'을 만들어 가르치지요. 검은 굴 속에서 깨달음의 흰빛이 나오는 거지요. 영화 '워낭소리' 봤어요?"

―못 봤습니다.

"그 영화 세 번 봤는데 사람들이 숨죽여 우는 대목이 있어요. 농부가 아끼는 소가 늙어 병이 드는데 시커먼 우리 속에서 웁니다. 그 눈물이 하얘요. 시커먼 구멍 속에서의 흰빛, 그게 숨은 모성입니다."

―여성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온다는 건데….

"이미 왔어요. TV 드라마나 영화에 유독 '어머니'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잖아요. 영화 '마더(Mother)', '엄마를 부탁해', 이미 어머니가 아이콘(icon)이 됐습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간 거지요."

―시인께서 이런 주장을 하기 전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르죠. 3000년 전 세상은 모계(母系)사회였어요. 그 위치가 주(周) 문왕 이후 상실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철천지원수, 부르주아 대(對)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처럼 봅니다. 헤겔, 칸트부터 다윈까지 가세한 남성 가부장제 권위라는 반동만 자초했지요."

―검은 암소, 검은 구멍 다음에 황상(黃裳)이란 말이 나옵니다. 중국 한대(漢代)의 노장(老莊) 학자 왕필(王弼)이 한 말인데요.

"황상은 '여성 왕통(王統)'을 뜻합니다. 여성 임금을 들어올려야 혼돈이 극복되고 개벽기의 전환적 대안이 된다는 거지요. 조건은 있어요. 여성 왕통을 보완해주는 남성 지혜자가 꼭 필요합니다. 지금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나 재상총권(宰相總權)이 배합돼야 합니다. 이건 과학적으로도 증명돼요."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요?

"태양(陽) 위주의 사고체계가 변하고 있어요. 요즘 기후현상을 온난화로만 설명하지만 실제 태양열은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태양열이 아닌 태양빛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달(陰)은 새롭게 조명됩니다. 미국 NASA의 이탈리아 과학자 에밀리아노 포플러가 달에 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아예 물의 벨트가 있다고 했어요. 우주의 변동이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게 경제현상입니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태양열에 대한 버블(Bubble·거품) 현상이 가져온 게 뭡니까, 금융위기잖아요. 경제뿐 아닙니다. 신종플루나 동남아를 강타한 쓰나미도 우주의 변동과 관련 있습니다."

―'황상'이
박근혜(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을 연상시키는데요.

"허허, 그렇게 보여?(여기서 시인의 표정이 싹 바뀌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날 죽이려 했지만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두 가지 면에서 인정해. 일본 극우재벌의 돈을 안 썼고 청와대 캐비닛에 달러가 그득했지만 다 남 주고 정작 본인은 막걸리에 북어포만 먹었잖아."

사단(事端)이 결국 일어났다. '시인이 이토록 박경리 문학에 매달리는 게 평생 돈벌이 못하고 장모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라는데…'라는 말을 꺼낸 직후였다. 이후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었다.

"나, 몇살이야?"(시인)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이시죠."(기자) "당신은?" "(큰일 날 태세여서 잽싸게 두살 얹어) 오십입니다." "그런데 그리 싸가지 없는 질문을 해? 뭐? 황상에서 박근혜가 연상돼? 천박한 질문 같으니!"

기자는 부글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위층의 김영주 토지문학관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20분쯤 뒤 파투의 위기가 지나갔다.



2막

대화는 독방(獨房) 이야기로 재개됐다. "참 무서운 거야.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밀고 들어오면 정신이 끝장나는 거야. 그때마다 교도관들이 '박 대통령께 용서해달라는 각서를 쓰라'는 거야."

그는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내가 위대해서도 아니고 아내도, 아이들도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배신할 순 없잖아. 나중에 보니 세계 각국에서 그때 수십억원을 지원해줬어요. 난 한 푼도 못 받았지만."

옥고(獄苦)의 후유증으로 시인은 지금까지 12차례나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내가
노무현 정권 때 정신병원에 3번이나 갔어요. 병원비는커녕 안부전화 한 통 거는 놈도 없더군."

―제가 범인들만 쫓다 보니 질문이.

"한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했어요. 그때 얼마나 기뻤다고.
영국에 유학 간 작은놈 도와줄 수 있으니 얼굴 좀 펼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니 노무현 전 대통령 얼굴이 잔뜩 붙어 있는 거야."

―그래서요.

"학벌 없는 그이가 대통령이 된 거 그걸 존경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대통령이 개인이야? 돈 받아먹고 조사하는 게 국가의 공적 과정이잖아. 왜 도망가? 우리나라에 한 해 자살자가 1만3000명으로 세계 4위인데 '베르테르 효과'란 거 있잖아, 다 따라 죽어? 그걸 조장하는 게 교육이야? 집사람한테 말했어요. '기분 나쁘면 그만두라'고 하더군. '너희 같은 놈들하고 같이 산다는 게 창피하다'고 하고 관뒀지. 올라올 때는 통쾌했지만 아버지 위해 기도하는 둘째 놈 생각하니 눈물이 나. 실존적 문제거든."

―그만 하시지요.

"내가
서울대 미학과에서 올 A였어요. 구한말 김홍집(金弘集) 재상 있었죠? 그분 손자가 김정록 교수님이라고 중국 북경대에서 모택동(毛澤東)도 벌벌 떨게 한 대학자 곽말약(郭沫若)의 제잡니다. 그 동양사상사의 대가가 날 예쁘게 봐 '교수하라'고 했는데 제가 '썩어서 싫다'고 했어요."

―왜 그런 말을.

"한 교수가 강독(講讀) 시간에 특정 학생만 시키는 거야. 어느 날 새벽 낙산에서 운동하고 오는데 그가 그 교수 집에 청주 병을 들고 서 있더군. 교수가 칙사대접하며 술병을 받는 걸 보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내가 공부를 더 하려고 학부만 8년 다녔어요.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의 기초가 됐지. 중정(中情)은 '직업적 학생혁명가가 되려는 고의적 장기 학적 보유자'라고 했지만. 우리 증조부, 조부가 동학혁명 했고 아버지는 코뮤니스트였어요. 월출산(月出山)에서 빨치산도 했고. 난 절대 공산주의에 안 빠져요. 아버지가 빠진 게 뭔지 공부는 했지만. 지금 관료 중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읽은 사람이 몇이나 돼? 다 엉터리 좌파지. 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래 여성에 의한 획기적 재분배, 우리 역사에 전례가 있어. 우리 인제 이성적으로 하자고."

―어떤 전례인가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드에서 벽화를 보고 놀랐어. 중앙에 고구려인이 있는 거야. 시(市) 입구에 서 있는 돌에는 '초포나타'라고 쓰여 있어요. 고구려 졸본성(卒本城)이야. 당(唐) 이세민이 왜 고구려를 없애려 안간힘을 썼겠어요. 고구려부터 중앙아시아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거든. 중국은 자기들을 포위한 걸로 봤겠지. 이 부족연맹들의 시장(市場)이 얼마나 복잡했겠어요. 그걸 획기적으로 재분배한 게 여성이 참여하는 신시(神市)의 전통에서 나온 겁니다."

―남성은 왜 획기적 재분배를 못할까요.

"월가(街) 앞에 항상 탐욕이라는 수식어가 붙죠? 대표적인 남성적 시장이지. 지금 외식(外食)이 증가하잖아. 그것도 여성이 맡아야 해요. 얼마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만나서 '왜 포스트 한류(韓流)를 시장에 맡기느냐'고 했어요. 말은 그럴듯하지만 직무유깁니다. 잘 이해를 못하더군. 창조적 발상을 하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하는데 그건 여성의 아이디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과학에서 역사까지 종횡으로 달리는 주장을 세상이 이해할까요.

"누군가 편지를 보냈어요. 겉봉투에 '金美親(김미친)'이라고 썼더군. 미쳤다는 거지. 신비주의자로도 보이고."



■어머니

시인은 '종합병동(病棟)'이라 불릴 만큼 여러 병으로 고생했다. 그런데 작년 말 '백학선생'의 제자라는 104세 한의사를 만나 쾌차했다. 약 없이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요즘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다고 했다.

몸이 개운해지니 기억도 돌아와 시작(詩作)에 한창이다. 이름이 '땡'이라는 고양이에 정을 들여 같은 이름의 시집을 낼 계획이다. '화엄 개벽 모심의 길'을 비롯한 몇권의 책과 오역(五譯) 화엄경도 쓰고 있다.

―아직도 세상은 '오적(五賊)'의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그 시를 사흘 만에 썼는데 아무도 믿지 않아요. 그 시를 쓴 후 절망했어요. 붕어 키우느라 온도 맞추고 집 안에 에스컬레이터 있다고 썼는데 다 상상이었거든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절 껴안으며 '김지하, 넌 애국자야'라고 하는 겁니다. 시적 상상이 사실이었다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고양이에 애정을 느끼는 건 무슨 이윤가요.

"
스톡홀름 가면서 파김치가 됐어요. 꿈에 '땡'이가 떠올라요. '야옹!' 하면서. 내가 늙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보니 땡이도 내 방문 앞에서 그렇게 울었대요. 정(情)의 정체가 뭘까, 여성성 아닐까요."

―모든 여성이 다 온화하고 획기적 재분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희랍신화에 이시스와 고르곤이라는 여신(女神)이 있습니다. 이시스가 백색을 뜻하는 모성의 상징이라면 고르곤은 제 새끼를 씹어먹는 흑색입니다.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와 베네치아에도 그런 부류들이 있었어요. '파스쿠치'라 불렀죠."

―어떤 인간들이었습니까.

"파스쿠치들이 약소국 그리스의 성전(聖殿) 유물을 헐값에 사 메디치가(家) 같은 명문가에 비싸게 되팝니다. 그렇게 축적한 부(富)로 희귀한 정력제를 사먹고 우아와 음란을 오가지요. 르네상스가 와야겠죠? 파스쿠치들은 어둠이죠. 아시안 네오르네상스가 온다고 하면 웃는 이들이 많은데 우리 주변에도 징조가 있어요."

―뭡니까.

"고르곤이나 파스쿠치 같은 여자들 안 보여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번 돈을 들고 아이들 팽개치고 향락에 빠진 여자들이오. 여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희지요? '맨하탄 화이트'거든. 지금은 눈 주위 컴컴하게 칠해 마귀 같은 여자가 많잖아. 색마(色魔)가 악마(惡魔)로 변한 거죠. 옛날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하잖아. 사실 박 선생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도 독하기 그지없습니다. 불륜도 저질렀고. 그런데 그 안에 다 장치가 숨어 있는 겁니다."

―무슨 장친가요.

"서희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 스님과 대화합니다. 법화(法華) 신앙인데, 법화는 화엄세계에 들어가는 꽃무늬입니다. 알면 알수록 장모님이 참 묘해요, 생각할수록."

―'토지'도 펄벅의 대지(大地)와 같은 개념이 아니겠군요.

"단순한 땅이 아닌 인간이 발 딛고 사는 세계의 근거, 삶의 정체(正體) 같은 겁니다. 그게 화엄이고요."

―시인의 어머니는 어땠습니까.

"어렸을 적에 그림을 잘 그렸어요. 양반 가문인 어머니는 그걸 못하게 했어요. 두 손을 묶고, 제가 발가락에 붓 끼워 그림 그리면 발까지 묶었어요. 아버지와 백부가 기술자여서 연장이 그득했는데 그것도 못 만지게 했어요. 제가 지금 컴퓨터를 못 다뤄요. 집에 뭐 고장나도 못 고치는 기계치(痴)가 됐죠. 그래서 미학과를 택한 겁니다."

―그림과 미학이 무슨 관계입니까.

"억눌림을 당하면 자기 검열을 하게 됩니다.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택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겁한 절충이었지요. 이 말 꼭 써주세요.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아이들 억압하지 말라고."

북한 서열 22위인 '간첩 대장' 이선실이 "민족의 제단에 김지하를 바치겠다"며 그의 주변에 거액을 뿌렸다. 시인에게 반(反)정부 성명 발표를 종용해 옥사(獄死)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고백에는 함축이 많다.

장모는 사위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런 박경리를 운동권은 핍박했다. 시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와 고르곤의 틈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장모에게서 '어머니'를 본 것이 아닐까.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긴 사연을 듣고 나서야 시인이 말한 '흰그늘' '검은 암소' '화엄개벽'이 명료해졌다. 그가 박경리라는 큰 품을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기자에게 시인은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게 인터뷰가 잘되려고 그랬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격정(激情)마저 없었다면 시인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가슴의 한(恨)을 잠시라도 풀고 후련해질 수 있다면 욕 천 마디가 대수랴.


김지하 시인이 자신의 장모인 소설가 박경리론을 썼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동서남북] 김지하 시인이 욕을 하는 까닭은

(조선일보 2009.10.07 10:30)

김지하 시인이 8일 스웨덴 스톡홀름대학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문학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촛불, 횃불, 숯불'이란 제목으로 강연한다. 한국과 스웨덴 수교 50주년을 맞아 스톡홀름대학의 한국학과 주최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이 모이는 자리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시인에게 한가위 다음 날 전화를 걸었더니 "한국 민요와 불교 전설, 촛불, 개벽의 관계를 설명하고 촛불이라는 한국의 현상에 대해 얘기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그는 "순수한 촛불은 우주적 사건"이라면서도 "이른바 운동권이 촛불을 자기들 고기 구워먹는 숯불로, 남의 집 터는 화적떼 횃불로 악용했다"고 비판해왔다. 스웨덴에 처음 간다는 그는 "내가 운동권을 비판했더니 운동권의 아우들이 '형님, 무정합니다'라고 서운해하지만, 동아시아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이 다가오고 있는데 여기에 대응해 진취적 입장을 세우려면 기존의 좌우파 '철밥통' 싸움을 그만 해야 한다"며 사고의 전환을 강조했다.

김 시인은 최근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 '천만원짜리 개망신'을 통해 '자기들 자신이 대권 후보로까지 밀었던 사람을 천만원으로 잡아먹겠다고 벼르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해 또 논란을 일으켰다. "통쾌하다"와 "미쳤다"는 반응으로 나뉜다. 그 중간에 선 입장도 있다. 김 시인의 정운찬 옹호론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 편애'를 날것 그대로 표현했다는 엄정한 비판도 적지 않다. 사실 지난 몇년 사이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문단에서도 김 시인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럴수록 김 시인은 독한 언어로 반발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김 시인은 이념뿐만 아니라 미학·종교·고대사·생명과학 등 거의 전 영역에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사상가처럼 군림하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유폐를 자처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한때 민중문학의 기수였던 김지하의 '자칭 진보주의자'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 그는 1970년대 독방에 수감됐을 때부터 운동권 과격파를 혐오했다. 지난여름 사석에서 만난 그는
북한 권력 서열 22위의 거물 간첩이었던 '이선실'을 거명했다. "이선실이 평양에 '민족의 제단에 김지하를 바치겠다'고 한 뒤 우리 운동권 선후배들을 돈으로 포섭했다"는 고발성 발언이었다. "그들은 당시 독방에 있던 나보고 자꾸 반정부 성명서를 발표해 정부의 탄압을 유발하라는 거야. 내가 옥사하기를 바란 것이지. 7년 동안 독방에 처박힌 내가 왜 그들을 위해 순교를 해야 해?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그들은 아내를 납치해서 살해하려고까지 했어. 어떤 놈은 장모(소설가 박경리)가 내 석방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안 한다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어."

거센 어조로 당시를 떠올릴 때 그의 짙은 눈썹이 묵은 분노를 표출했다. '정치적 순교'를 거부했던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생명사상에 눈을 떴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썼던 것이고, 촛불 집회의 폭력시위대를 '까쇠'라고 욕하고, 노무현 정부 시절 '수백억 나랏돈 쓴 자칭 민주화 운동가들'을 향해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욕이 성행했던 르네상스 시대와 비슷한 징후를 보여준다"면서 "시커먼 기운 속에서 흰빛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어나면, 어둠과 빛이 절충된 '흰 그늘'의 미학이 나올 것"이라고 욕설의 미학을 내세웠다.

김 시인은 최근 계간 '문학의 문학'에 장문의 '박경리론'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정치 논쟁이 아니라 미학 논쟁을 더 원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난 글이다. 그런데 종종 참지 못하고 그의 입에서 상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가 정파적 이익에만 사로잡힌 헛된 논쟁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조선일보 2011.02.28 00:00)

김지하를 낫게 한 장병두옹.

"남편 정신병원 12번 입원, 그리고 완치… 밖에선 김지하를 잘 몰라"

옥중의 김지하를 순교자 만들려는 계획거절하자 운동권서 따돌림
출감 후 이혼할 결심도 운동권측과의 갈등으로 남편, 정신발작 일으켜

어느 날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이젠 완전히 나았어요. 잠을 자도 꿈에 안 시달려요. 병원·한의원 어디서도 못 고친 걸 장병두 할아버지가 낫게 해줬소. 내 처와 자식들도 그렇게 나았소. 그런 분을 의사 면허증이 없다고 환자를 못 보게 막습니다. 법과 제도가 사람 살리는 걸 막고 있는 격이오. 그분 연세가 105세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소. 전통 춤·노래·공예 부문에 ‘인간문화재’가 있듯이, 그분을 전통의술 부문 ‘인간문화재’로 만들 순 없겠소. 그분 비방이 합법적으로 전수될 수 있게 말이오.”


장병두옹은 사회적 논란이 됐던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그를 ‘현대판 화타’로 떠받든다. 암·당뇨·간질·백혈병·중풍 등 난치병을 그가 고쳐왔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한낱 ‘무면허’ 한의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2006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이는 제도의학과 민간의술의 충돌이기도 했다. 그는 1·2심에서 똑같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고령(高齡)의 나이를 감안해 판결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그에 대한 검증은 사실 불가능하다. 설령 그의 치료 효과를 봤다 한들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지하가 그동안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모처럼 그 가족이 ‘건강’해졌다는 스토리는 들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강원도 원주로 가서 김지하 대신 부인 김영주(65)씨를 만났다. 김지하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얘기할 것 같았다. 토지문화관 관장인 그녀는 어머니
박경리(朴景利)를 쏙 빼닮았다. 말에는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었다.

“외부에서는 김 시인(김지하)이 어떠했는지 몰라요. 출감(1980년)한 뒤로 늘 술에 절어 살았죠. 5년쯤 지나니 도저히 못 참겠더라. 제가 이혼하려고 했어요. 김 시인이 ‘이혼은 못 한다. 대신 당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해서, 환경을 바꾸면 좋아질 것 같아 전남 해남으로 이사갔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 놓았어요. 그들이 떠나간 뒤 헛소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위 운동권 동지·후배들의 집단따돌림, 이에 대한 분노·배신감·피해의식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겠지요. 그때부터 정신병원에 12번이나 입원했어요. 발광해 들어가면 약을 한 주먹씩 먹였어요. 몸이 고릴라처럼 부어 멍하게 앉아있어요. 조금씩 약을 줄여가고 그렇게 1년쯤 지나면 사회 활동을 합니다. 세상 일에 대해 못 견뎌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발작하고. 1991년 시위 때 분신자살이 유행하자, 운동권 세력을 향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조선일보에 쓴 것도 그러했던 거죠.”

당시 나는 현장을 취재했다. 아침에 눈뜰 때면 ‘지금 어디서 누군가 또 자살할지 모른다’고 괴로워했다. 열댓명이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유행처럼 자살했다. 그때 김지하가 작심하고 쓴 ‘죽음의 굿판’ 칼럼은 세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운동권 동지·후배들로부터 욕설과 비난, 협박 전화가 끊이질 않았어요. 우리 집에 경찰을 보내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스트레스를 못 견뎌 정신병원에 또 들어가고. 지나고 보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이 저 사람의 소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 사건 이후 운동권에서는 김지하를 ‘변절자’ ‘생명사상 교주’로 욕했지요. 어린 후배조차 소위 인연을 끊었습니다.

“조직적으로 매도하고 따돌렸어요. 그 모욕감에 김 시인이 술 마시고 들어오면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쪽에서 보면 ‘배신’과 ‘변절’일 수도 있지요. 김지하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김 시인은 ‘나는 달라진 게 없다. 나는 어떤 조직에 들어간 적도 없고, 모든 운동조직은 나 스스로 만들었다. 나 자신은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면 저네들이 변절자다. 내가 변절한 적은 없다’고 했어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동지’라는 사람들이 김 시인을 죽이려 했고, 그게 안 되자 그를 따돌렸어요.”

―납득이 안 되는군요. 동지들이 수감 중인 그를 왜 죽이려고 하며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김 시인은 형무소에 들어갔지만 ‘투사’가 돼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7년이나 오래 독방 수감 생활을 할 줄은 자신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나 ‘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박경리)가 ‘동지들이 김지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했어요.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어요. 그러니 우리 모녀도 죽이려고 했어요. 누가 동지고 적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증거도 없고. 어떤 피해의식에 근거한 망상 아닙니까?

“세상에서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요. 당시 첫 번째 오는 택시는 안 탔어요. 그렇게 납치될 뻔한 경험을 했거든요. 이런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지나간 일은 덮고 가려고 했어요. 선과 악 모두가 당시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김 시인을 매도하고 건드려요. 그것에 쇼크를 받고 정신병원에 갑니다.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어요.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발작을 일으켜 집을 나가면 제가 찾아서 병원에 데려가요. 그러면 퇴원시켜달라고 전화로 난리칩니다.”


김영주씨는“김지하가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주 토지문화관=최보식 기자

―김지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억세고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면이 있긴 하나, 순한 사람이에요. 결혼 전에 이 사람에게서 세 가지를 봤어요. 굉장히 여성적인 모습과 속이 텅텅 빈 허(虛)한 느낌, 그리고 골짜기가 많은 큰 산 같다는 인상이었어요. 앞의 둘은 부정적인 느낌이었는데 들어맞았어요. 마지막은 모르겠어요. 골짜기에 가만히 있으면 편할 것 같았는데 살아가면서 아직 그런 맛을 못 봤어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정릉의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요. 제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였어요. 그가 ‘오적(五賊)’을 발표한 시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때는 시를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다음 왔을 때는 ‘수배받고 있으니 숨겨달라’고 했어요.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엄마로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를 보내면서 마음이 안됐어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제게 ‘너는 복(福)이 많아 잘 살 것’이라고 했는데, 내 복의 절반을 저 사람에게 떼줬으면 했어요. 결혼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었어요. 수배가 풀리자 그가 다시 나타났어요. 엄마가 결혼을 허락했어요. 하지만 내가 그런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죠.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몰랐던 거죠. 딸을 보면서 평생 속상해한 거지.”

―1973년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듬해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됐는데(당초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돼 1980년 석방됐다).

“자기가 붙잡혀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준비를 다 해놓은 뒤였어요. 그러고는 저와 결혼을 한 거죠. 그때 결혼 안 했으면 결혼 못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었지요. 감옥에 들어가면서 생후 몇 달 안 된 아들까지 남겨놓았으니….”

―그런 남편과 같이 살았다는 점만으로도 김 관장께서는 충분히 대단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버리겠습니까. 김 시인이 멀쩡하면서 애를 먹였다면 같이 안 살죠. 병이 나서 그러니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지, 할 수 없는 일이죠. 저는 상황에 매달려 질질 끌려왔어요. 그 상황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어요. 김 시인은 외부 강연에서는 ‘마누라 덕분에 어쩌고저쩌고’ 해놓고, 막상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삐쳐요. 어떨 때는 집을 나가버려요(웃음). 하지만 매일 한 주먹씩 정신병 약을 먹고 지금껏 살아있다는 게 대단해요. 장병두 할아버지 치료를 받을 때 그 약을 끊으라고 하니 겁을 냈어요. 약 안 먹으면 잠을 못 드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떻게 장병두옹의 치료를 받게 됐습니까?

“발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이들은 상처받고 무서워했어요. 둘 다 대학을 못 갔어요. 이제 서른살이 넘었지만 결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무의식에 있는 것 같아요. 김 시인에게 ‘당신이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서 있어줘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어느 날 큰아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그때는 제가 죽고 싶었어요. 병원에 데려가도 소용없고. 한 지인의 소개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장병두 할아버지를 찾아간 겁니다.”

―김 관장 본인도 치료를 받았다면서요.

“저도 만날 아팠어요. 하체에 감각이 없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의 약을 먹고 어느 날 앙가슴에서 울화로 맺힌 불덩어리가 확 빠져나가는 걸을 느꼈습니다. 그분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생명의 은인이지요.”
장병두옹의 구술(口述)로 엮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란 책에서 김지하가 서문을 썼다.
‘큰아들은 나의 발광을 보고 극도의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작은아들도 내 발광에 놀라 뇌신경의 반이 마비돼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있다…. 두 아이가 선생에 의해 완전히 치료됐다. 우리 식구 중 끝까지 잘 치료가 안 되고 끝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아내도 어느 날 몇 시간 몸부림치다 기적처럼 치유의 경험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렸는데도 김지하 마음속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와의 통화에서 “과거에 내가 어려울 때 이명박씨는 3000만원이나 도와줬다. 지난 정권 때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했지만 그쪽에선 아무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운동권 사람들이 많이 들어간 지난 정권에서 비리가 터져나왔을 때는 참지 못했어요. ‘도둑질이나 해먹고 너희가 인간이냐’며.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욕을 해대요. 그래서 아예 휴대폰을 빼앗아 버렸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도 자살 행위를 비판해 더욱 적을 만들었지요.”

―이제 본인을 위해서라도 분노를 비우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습니다.

“김 시인도 그걸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도 처음 ‘서푼짜리 노여움을 풀어라’는 말부터 했어요.”

―그런데 박경리와 김지하 중 누가 더 문학적 천품을 타고난 것 같습니까?

“모두 대단한 사람이지요. 엄마는 친구도 없이 딸 달랑 하나와 살았어요. 글을 그렇게 많이 고쳐요. 파지가 산더미 같았어요. 원고를 쓰면 제게 읽어보라고 했고, 제가 고쳐주곤 했어요. 어떤 때는 제가 읽기 싫다고 하면 화를 냈지요. 너무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몰랐어요. 김 시인은 천상 시인이에요. 모든 시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탁월한 시들이 많아요. 하지만 산문 쓰는 것, 어려운 글 쓰는 것은 못마땅해요. 내가 ‘누구 읽으라고 그런 글을 쓰나’고 타박하면 화를 벌컥 내요. 참견한다고.”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장병두옹은 올라오는 길에 잠깐 만났다. 105세의 나이란 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