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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별난인생

[여성조선] 요리하는 철학자 팀 알퍼의 달콤하고도 향기로운 미생(味生) (조선일보 2015.04.18 19:08)

[여성조선] 요리하는 철학자 팀 알퍼의 달콤하고도 향기로운 미생(味生)

 


	[여성조선] 요리하는 철학자 팀 알퍼의 달콤하고도 향기로운 미생(味生)

한국에 사는 영국인 철학도 팀 알퍼를 수식하는 단어 중 하나는 푸드칼럼니스트다. “음식이 곧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맛과 함께해온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음식과 역사, 문화 그리고 인간을 서로 연결하는 글을 쓰고 있다. 그의 글에서는 마치 좋은 요리를 앞에 둔 듯 은근하고 향기로운 삶의 내음이 풍겨난다. 


팀 알퍼는 영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뿌리는 독특한 문화와 음식 유산을 가진 유대인 가정이다. 어렸을 때부터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그는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현지 음식과 문화를 탐방했다. 한때는 직접 요리를 하며 수셰프(Sous Chef)의 위치에 오른 적도 있었다. 영국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일하다 한국에 자리를 잡은 그는 현재 한국인 아내와 살며 여러 매체에 자신만의 철학과 재치가 돋보이는 푸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올 3월에는 유럽 음식 여행기를 담은 <바나나와 쿠스쿠스>를 출간했다.

<바나나와 쿠스쿠스>는 기억에서 출발해 기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팀 알퍼에게 음식이란 과거 어느 지점의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존재인 것 같기도 해요.

바나나케이크를 처음 만들었던 여덟 살 때, 전 요리가 제 운명과 엮일 거라는 걸 직감했어요. 제 음식 인생의 출발점이었죠. 쿠스쿠스는 어렸을 때 할머니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만들어주신 음식이었고요. 저에겐 모두 소중한 추억이죠. 저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나나와 쿠스쿠스가 분명 있을 거예요.

마치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와 같은?

그래요. 한국 사람에게 된장찌개는 특히 강력한 노스탤지어죠.

유럽 여행을 하고 책을 쓰셨어요. 맛 기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음식 대서사시에 가까운데요.

여행을 시작할 땐 음식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었지만, 지금 제게 남은 유럽에 대한 추억은 온통 음식에 관한 것뿐이에요. 열여덟 살 때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아주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저한텐 그 경험이 음식 연구에 몰두하고 책을 쓰는 계기가 됐죠.

어떤 경험이었지요?

영국 사람한테 피시 앤드 칩스는 한국의 김치찌개 같은 존재예요. 전 영국에서 태어났으니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그걸 먹었죠. 천지 사방에 널려 있거든요. 그만큼 피시 앤드 칩스는 제겐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음식이었어요. 왜 이걸 먹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 같은 걸 할 필요조차 못 느꼈죠. 그런 제가 여행을 떠나 그 나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궁금하더라고요. 왜 그 사람들은 그 음식을 먹는지 말예요.

한국 사람은 김치찌개가 궁금하지 않죠. 그냥 맛있게 먹을 뿐이지.

그 나라 사람들한텐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음식이 다른 나라 사람한텐 그렇지 않거든요.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음식문화를 경험해보니 우리 음식도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그걸 먹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낯선 나라의 이국적인 음식이 저를 깨닫게 해준 거죠. 그때부터 음식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모든 건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죠.

철학적인 질문이네요, ‘왜’라는 물음.

근원적인 물음이죠. 식욕은 본능이지만, 인간이 먹는 음식은 그렇지 않죠. 요리는 인류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고 선택한 결과예요. 요리는 그 자체가 철학인 거죠. 요리가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린 없었을 거예요. 기술 발달에도 요리가 분명히 원인 제공을 했죠. 먹기 위해 도구를 만들었으니까요. 요리 없이는 그 어떤 문명도 존재하지 못했을 거예요. 음식의 역사가 곧 우리 자신의 역사이기도 하죠.

그런데 정말 피시 앤드 칩스는 왜 먹기 시작한 거예요?

영국의 트레이드마크는 우울한 날씨잖아요.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은 감자 농사가 잘돼요. 대신 햇살을 잔뜩 머금은 잘 익은 토마토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피시 앤드 칩스는 유대인과 벨기에 이민자들에 의해 탄생한 음식이에요. 요즘 말로 벨기에의 ‘국민 음식’ 격인 프리트(Frites)가 영국으로 전해진 거죠. 사실 피시 앤드 칩스는 2차 대전 때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탔어요. 당시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식량 공급을 받지 못해 배급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배급제로부터 자유로운 음식이 바로 감자와 흰살생선이었어요. 영국의 차가운 바닷물에도 살아남는 어류가 이 흰살생선이거든요. 그렇게 영국 사람들은 난도질한 감자를 생선과 함께 밀가루에 묻혀 튀겼죠. 이렇게 음식은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일 수 있어요. 제 책에 음식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함께 엮은 이유죠.


	[여성조선] 요리하는 철학자 팀 알퍼의 달콤하고도 향기로운 미생(味生)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그렇죠. 특히 복잡한 역사를 가진 나라를 이해하고 싶으면 그 나라의 음식부터 찾아보는 게 많은 도움이 돼요. 직접 먹어보는 게 제일 좋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예를 들어 불가리아는 초창기부터 주변국들로부터 침략과 간섭을 받았던 꽤 머리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예요. 당연히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혼재할 수밖에 없죠. 음식도 마찬가지예요. 불가리아의 음식엔 여러 나라의 맛이 뒤범벅돼 있어요. 불가리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나라들이죠.

듣고 보니 음식은 정말 역사의 거울이라는 말, 맞네요.

제가 한국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음식 때문이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인사 대신 “식사하셨어요?”라는 말을 건네잖아요? 먹을 게 없던 가난한 시절에 서로를 챙기던 말이 사라지지 않고 습관화된 경우죠. 식사시간엔 꼭 함께 모여 둘러앉아 밥을 먹었을 만큼 한국 사람한텐 밥이 중요하기도 하고요. 만약 영국인한테 밥 먹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별게 다 궁금하네’와 같은 반응을 보일 거라는 말이죠.

소셜 다이닝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그렇다고 봐요. 1인 가구는 계속 늘어나고 생활습관은 예전부터 서구화되고 있죠. 재미있는 건 집밥에 대한 향수도 그만큼 커졌다는 거예요. 혼자 사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건 경제적인 측면도 있지만, 가정에서 느꼈던 정서적 안정감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죠. 한국 사람들은 커뮤니티 내에서 형성되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오죽하면 인스타그램에도 누구와 뭘 먹었는지를 찍어 올리겠어요. 서양 사람들은 잘 안 그러거든요. 세상이 변해도 한국인한텐 여전히 ‘우리’라는 의식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영국 사람들한텐 펍(Pub)문화가 있잖아요.

우린 정말 맥주만 마셔요. 그게 유일한 목적이니까요.(웃음) 대신 전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렸을 땐 뭐든 가족과 함께했어요. 유대인도 한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서가 있거든요.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은 부모의 역할이 정해져 있어요. 자식은 어머니와 함께 음식을 만들고, 교육은 아버지로부터 받는 식이죠. 전 요리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데요, 겨우 여덟 살 때 바나나케이크를 만들었으니 손으로 뭘 만드는 걸 즐기는 건 천성인 것 같아요. 지금도 될 수 있으면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으려고 해요.

왜 요리사를 직업으로 택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네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요리를 했어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죠. 제가 살던 영국 어느 시골의 작은 펍이었는데….

고작 열여섯 살에 펍이요?!

펍은 말 그대로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예요. 한국 사람들은 종종 펍을 호프집 개념으로 생각하곤 하죠. 오해예요. 펍은 술도 팔지만, 음식도 있고 심지어 게임기까지 있는 곳이에요. 집에서 식사할 여건이 되지 않을 때 펍에 가는 거죠. 영국에선 아주 오래된 문화예요. 전 거기서 감자를 깎았어요. 그렇게 경력을 쌓아서 수셰프까지 하게 됐어요. 하지만 얼마 안 돼 그만뒀지요.

왜 그랬을까요? 소질도 열정도 있었는데.

고든 램지는 어딜 가나 있거든요. 욕설이 난무하는 주방이었죠. 사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제가 하는 요리에 창의성이 없다는 거였어요. 한꺼번에 몰려드는 호텔의 단체 손님을 위해 정해진 레시피대로 스테이크와 페이스트리를 한바탕 굽고 나면 소모되는 느낌만 남았어요. 그런 일상이 계속 반복됐죠.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미련이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요?

대신 음식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죠. 글 쓰는 걸 워낙 좋아해서요. 사실 글뿐 아니라 어떤 형태가 됐든 음식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 재미있게 할 수 있어요. 은퇴 후엔 작은 식당을 차리는 게 꿈이에요.

푸드칼럼니스트로서 한국 방송의 음식프로그램은 어떤가요? 특히 요즘 케이블 채널은 음식 방송의 각축장이잖아요.

한국의 음식프로그램은 푸드 엔터테인먼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셰프도 등장하지만, 연예인이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하죠. 유럽의 음식프로그램과는 포맷이 완전히 달라요. 요리 말고 다른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신동엽과 성시경 같은?

네. 출연자들이 가볍고 친숙한 대화로 방송을 이어가죠. 농담도 많이 하고요. 즐겁고 재미있는 분위기 연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식당을 찾아가는 프로그램도 유럽과는 차이가 있어요. 영국의 식당 소개 프로그램은 메뉴에 대한 정보와 음식 위주로 보여주고, 출연자가 음식을 맛보는 장면은 조금만 비춰주죠. 근데 한국은 아니에요. 게스트가 음식을 먹는 장면을 카메라가 한껏 클로즈업해서 아주 자세히, 그리고 오랜 시간 보여주죠. 유럽과 한국의 음식 방송이 이렇게 다른 것도 결국은 다 철학의 차이라고 봐요. 영국인이 한국의 음식프로그램을 보면 음식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고, 반대로 한국 사람이 영국 음식 방송을 보면 딱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어떤 게 더 나은지 판단하는 건 무의미해요. 전 이런 차이점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게 굉장히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음식을 통해서만 찾아볼 수 있는 문화거든요.

경계에 서서 상호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셈이네요.

전 여러 음식문화를 접하면서 각 문화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요. A라는 나라에서 전해지는 음식 이야기가 B라는 나라에선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기선 이게 진리였는데 저쪽으로 가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게 되는 거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에요. 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교집합이 있어요. 여기저기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연구를 해나가면서 공통점을 찾고 답을 유추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저의 뿌리인 유럽의 맛 기행을 썼으니까, 다음엔 지금 제가 사는 한국의 음식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굉장히 독특하고 재미있는 한국 음식 책이 나올 것 같은데요.

 돌솥과 장독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굉장히 놀랐고 조금 창피하기도 했어요. 유럽엔 이런 것들이 없었으니까요. 냉장고의 발명은 장독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거든요. 한국의 우수한 음식문화를 비한국인의 시각에서 글로 써보고 싶어요.

문득 매일 아침엔 뭘 드시는지 궁금해요.

빵과 수프, 요거트를 먹어요. 요즘은 제철 나물로 수프를 끓여 먹죠. 빵도 직접 만들어 먹는데 요즘은 맛있는 베이커리가 많아서 사 먹을 때도 종종 있어요. 빵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풍경은 프랑스에서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도 똑같더라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