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세계유산] 도학·절의·문장 겸비한 호남 최고 사상가 (광주매일 2013. 02.15. 00:00)

[세계유산] 도학·절의·문장 겸비한 호남 최고 사상가 ]

<57>무등산의 재발견-사람을 품은 산 (20)하서 김인후

고고한 선비정신 앞세워 시대 기풍 바로잡아
문학르네상스·진보적 토론문화 기틀도 다져

 

문화의 산 무등산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가사문화권을 비롯한 유서 깊은 문화유적 등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보전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서 김인후는 조선중기 무등산권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하며 새로운 남도문화를 만들어 갔다.

 

역사를 뒤돌아보건대, 조선시대 남도땅에 살았던 선비들이 무등산을 가장 낭만적으로 사랑했다. 요즘 사람들은 오히려 건강을 위해서 무등산에 등산하는 것 외에 무등산의 큰 가치를 잘 모르는 경향이 짙다.

멀리 숲 위에 보이는 바위 형세가 빼어나고/아지랑이 퍼진 기운이 개인 하늘에 가득하네./취한 붓 오래 멈추고 자주 고개를 돌려 /언제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기를 다시 기다리네.

조선시대 때 사암 박순(1523-1589)이 쓴 ‘무등산 아지랑이’란 시다. 이 시에 화답해 장성의 하서 김인후는 ‘서석청람’을 이렇게 그렸다.

‘서석산은 곤륜산의 정기를 머금어/ 뾰쪽뾰쪽 솟아 북두칠성을 받들었어라/ 소나무 아스라이 은은히 비치니/ 좋은 경치 높은 선비에 맡기었구려’

이 시들은 면앙정 30수 중의 하나인 서석청람(서석산의 아지랑이)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다.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정자인데, 면앙정 송순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송순(1493-1582)은 면앙정가 가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기대승, 임억령, 김인후, 소세양, 박순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가 잦았다. 면앙정 30영은 면앙정에 관한 30가지 경치로서 추월취벽, 용구만운, 금성고적, 송림세경 등이며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등이 시를 지었다.

그러면 조선 중기에 무등산권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하며 새로운 남도문화를 만들어갔던 하서 김인후를 만나보자.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장성 필암서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하서가 살았던 곳은 소쇄원과는 좀 먼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이다. 광주에서 황룡강을 따라 장성 맥동마을로 가면 거북등에 세워진 비가 하나 있다. 눈여겨보면 송열이 쓴 글이 새겨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탁월한 이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고, 이 셋 중 어느 한두 가지 뛰어났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하였다.’

조선중기 호남 북쪽에는 이항, 남쪽에는 김인후,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있었다는 역사서에서 보여지듯이 김인후의 학덕은 정말 크고 넓었다.

그러나 그가 산 시대는 어두웠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기묘사화가 일어나 참화를 당한 일군의 뛰어난 선비들이 정치 사회 혼란 속에서 뜻을 펴지 못한 채 은거하면서 독서에 전념하던 시기다.

하서는 19세에 과거에 응시해 장원이 된 후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20년이 지난해였다. 동궁에 대화제가 일어났다. 아무도 조광조 등 사림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거론을 못하던 때에 하서가 나서서 왕에게 군자의 도를 진언했다.

‘예로부처 선치(善治)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며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의 기묘사화는 죄가 아니심을 밝히시고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정의와 악을 잘 가려서 사회기강을 세우시옵소서.’

그러나 중종이 이 상소를 흔쾌히 윤허하지 않자 하서는 부모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니 옥과현감에 제수됐다. 시대는 어지럽고 또 어지러웠다. 다음왕 인종의 죽음을 기화로 36세에 벼슬을 그만둔 후 45세까지 수차례 나라의 부름이 있었지만 극구 사양하고 순창에 초당을 짓고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소쇄원을 드나들며 불현듯 실망을 떨치고 심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논설과 의리가 평이하고 명백했던 선비 김인후는 1560년 정월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수를 갖추어 사당에 행전케하라’더니 의관을 단정히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제사를 모시면서 자녀에게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말라’고 유언하고 이튿날 유연히 세상을 떠났다.

서슬퍼런 임금의 폭정을 피해 고향에 칩거하면서 집안 다스리기를 나라 다스리듯 했던 냉철한 선비 하서. 지식과 행동, 내면과 외면의 수양을 다같이 중시한선비, 그가 남긴 1천600여수의 시에는 침묵의 언어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다.

특히 소쇄원을 아끼고 주변의 선비들을 너무 사랑한 김인후. 그의 인맥은 이곳 황룡에서 저 깊은 무등산 골짜기를 지나 화순에까지 폭넓게 펼쳐져있다. 소쇄원의 아들 양자징을 사위로 삼아 사돈지간을 맺은 것만 봐도 얼마나 두터웠는가 알 수 있지만 그가 소쇄원에서 지은 ‘소쇄원 48영’은 소쇄원 승경을 48폭 병풍에 연작으로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표현한 시다.

하서의 주요 활동무대는 장성 황룡, 소쇄원 중심의 성산가단 말고도 한 군데가 더 있다. 바로 순창의 대각산 밑에 자리잡은 효암촌. 샘과 돌이 수려한 대각산 밑에 촌락을 짓고 유희춘, 정철, 기효온 등이 찾아오면 글을 가르쳤는데 강 위의 큰 바위에 앉아 ‘대학’을 강론했다고 한다. 순창에서 숱한 당쟁 소식을 듣고 피흘리는 동료 선비들을 보면서 하서는 ‘역천자(逆天者)는 망하고 순천자(順天者)는 존재한다’는 천리를 담은 시를 지었다. 바로 이 시.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나도 절로/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

하서는 아무리 봐도 호남사상사의 줄기 안에서나 우리 국문학사상 아주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그가 활동했던 중종 명종 때는 호남에 송순을 중심으로 한 면앙정 시단과 임억령, 김윤제, 양산보를 중심으로 한 성산시단이 대두돼 가사문학의 활발한 기운이 일기 시작하던 때. 그중 김성원, 고경명, 기대승, 정철까지 가담한 성사시단의 불은 김인후가 가세하면서 활활 불타오르니 문학의 르네상스여라. 문학의 르네상스 뿐인가, 한국 최대의 아카데미촌이 형성되고 가장 진보적인 토론문화가 형성되니….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정녕 민중이 주인되는 요즘 세상 아니었을까.

인간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김인후. 인간을 인간답게 존중하고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 곧 도의 를 아는 사람이요, 도의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옳게 바꿀 수 있는 에너지가 있음을 가르쳐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