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땐 성매매하면 독살…성매매의 역사는?
[토요뒷談]양인여성 매춘부 만든 죄, 곤장 100대
성매매특별법 논란으로 본 성매매 규제의 역사
1890년 궁중에서 궁중무의 일종인 향악무를 추기 위해 대기 중인 관기들. 가람기획 제공
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 곱게 잡아 입고/안산 청룡사로 사당질 가세/이내 손은 문고리인가/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이내 입은 술잔인가/이놈도 빨고 저놈도 빠네/이내 배는 나룻배인가/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공식적으로 매춘을 금지했던 유교국가 조선에서 이런 해괴망측한 노래가 떠돌았다. 제목은 ‘여사당 자탄가(自歎歌)’. 조선시대에 전국을 떠돌며 북과 징을 치면서 노래와 춤, 곡예를 하던 사당패의 여자, 즉 여사당들이 몸을 팔기도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매춘 풍속을 확실히 보여주는 ‘물증’도 있다. 조선 중기의 무관 박취문(1617∼1690)은 함경도 회령부와 경성의 병영에서 의무군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까지 1년간의 생활을 ‘부북일기(赴北日記)’에 남겼다. 기록에 대한 강박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는 병영으로 가는 동안 주막에서 잠자리를 같이한 여인 20여 명의 이름과 동침 날짜를 일기에 꼼꼼히 적어놓았다.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박취문 리스트’인 셈이다. 여기에는 ‘분이, 향환, 예제, 옥매향, 옥순, 월매, 설매’ 등 동침녀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그는 이처럼 불특정 다수의 여인들을 돈으로 사지 않았다. 변방에서 근무하는 군관들을 위해 해당 군현에 소속된 방직기녀(房直妓女)가 일종의 ‘현지첩’으로 제공됐기 때문이다.
최근 법원이 자발적 성매매 여성을 처벌하는 성매매특별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릴 경우 성매매특별법의 존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이를 계기로 2004년 제정 당시 찬반 논란이 뜨거웠던 성매매특별법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성매매를 사회적으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성매매를 금지하면 ‘풍선효과’로 음성적 성매매만 늘어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매춘과 그에 대한 규제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까마득한 매춘의 역사
매춘의 역사를 떠올려보면 국가가 법으로 금지함으로써 성매매를 줄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 매춘부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구한말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식 공창제(公娼制)가 생겨났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공창제를 공포하기 전까지 공식적인 매춘 제도나 매춘 전용구역은 없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용인되지 않았을 뿐 매춘은 존재했다.
난혼(亂婚)이 일반적이던 원시시대에는 매춘이 필요 없었다. 남성의 권력이 커지고 사유재산제를 기반으로 하는 일부일처제가 시작되면서 필연적으로 매춘이 나타났다는 게 많은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사유재산은 자연히 상속으로 이어지는데, 남자는 상속받을 사람이 자신의 친자식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로써 일부일처제가 시작됐고 부부간의 성적 균형이 깨지면 남자는 자연스럽게 매춘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다처제 역시 매춘의 발생을 억제하지는 못한다는 견해도 있다. 번 벌로와 보니 벌로 뉴욕주립대 교수는 공저 ‘매춘의 역사’에서 “일부다처제는 엄청난 수의 남성을 합법적인 성적 상대 없이 방치해 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매춘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부일처제든 일부다처제든 매춘을 막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풍속은 음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남편이 일정하지 않은 유녀(遊女)가 많다. 밤이면 남녀가 떼를 지어 모여 노는데,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었다.” 중국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 ‘북사(北史)’ 고구려전에는 매춘부를 암시하는 유녀가 등장한다. 정복전쟁이 잦았던 고대 부족국가 시대에는 포로의 일부를 군인을 상대하는 유녀로 삼았다. 신격을 지닌 존재였던 무녀가 제정이 분리되면서 유녀로 전락하기도 했다. 중국의 ‘수서(隋書)’ 동이열전 고려조에는 고구려 사회를 설명한 대목에 “유인(遊人)은 3년에 한 번 세를 바치는데 10인이 함께 세포 1필을 바친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유인은 유녀와 동일하게 봤다. 이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만큼 고구려가 국가적으로 매춘을 합법화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신라에도 창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는 유명한 김유신과 기녀 천관의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이 천관의 집에서 자고 왔다가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는 다신 그 집 문 앞을 지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어느 날 김유신이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가 천관의 집에 이르자 술이 깬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고종 때 이수라는 사람은 부인이 죽자 부인의 조카며느리와 간통하다 발각됐다. 이 일로 이수는 귀양을 갔고 부인의 조카며느리는 ‘유녀적’이라는 명부에 이름이 올라 매춘부가 되었다. 고려 때부터 정조를 잃은 것으로 낙인찍힌 여성은 형벌로 매춘을 강요받았고 이들은 유녀 또는 자녀(姿女)로 불렸다.
기녀를 소재로 한 조선시대 풍속화들. 왼쪽부터 신윤복의 ‘청금상련도’ ‘유곽쟁웅’, 작자 미상의 ‘십로계축도’. 동아일보DB
유교국가 조선, 매춘을 금지하긴 했는데…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매춘을 금지했다. 양인 여성이 매춘을 하다 발각되면 노비로 전락했다. 양인 여자를 사들여 창녀로 만든 이에게 곤장 100대의 형벌을 내렸다. 매춘을 조장하는 포주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양인 여성이 유녀 생활을 하다 적발되면 관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들켜봐야 손해 볼 게 별로 없었던 천민 출신 유녀들은 적발된 뒤에도 계속 매춘을 하는 경우가 많아 근절하기는 어려웠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군인들을 상대로 한 매춘이 성행해 조정에서 명나라 군인과 매춘하다 발각된 유녀들을 성 10리 밖으로 쫓아냈다.
기녀(妓女)는 매춘을 금지한 조선시대에서 제도권 내의 매춘부 역할을 했다. 제도권 밖의 매춘부는 간통 등으로 순결이나 정조를 잃은 양인 여성, 그리고 천민 여종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 때처럼 관청에서 양민 출신의 여자나 계집종을 유녀적에 올려놓고 관비와 같이 부렸다. 유녀적은 이들이 평생 유녀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낙인이었던 셈이다.
매춘 구역이 따로 없던 시절이라 매춘부들은 전국을 떠돌았다. 특히 변방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몸을 파는 경우가 많았다. 유녀를 관리하는 포주는 주로 재력 있는 악덕 상인들이 주축이었는데 이들을 ‘색인(色人)’이라 불렀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매춘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지방에서는 유녀적에 오른 유녀들을 관비로 부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원은 “중앙의 기녀들은 예악(禮樂) 위주로 활동했지만 지방 기녀들은 수청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며 “실상 매춘을 100% 근절할 수 없으니 조정에서도 암암리에 눈감아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성매매를 법으로는 금지하고 있으나 음성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도 이 잡듯이 뒤져 적발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다.
기녀에도 ‘등급’이 있다
기녀는 원래 궁중행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와 춤, 악기 연주 등을 업으로 삼던 여성인데 일부는 성적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이 때문에 기녀의 이미지는 뛰어난 종합예술인과 천박한 매춘녀라는 양극단의 사이에 자리한다.
동서양 모두 기녀의 원조를 고대 무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제정이 분리되면서 무녀가 매춘부나 기녀로 전락했다는 것. 또 전쟁 포로나 죄인 중에서 미모와 기예를 갖춘 젊은 여인이 기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기녀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관청에 소속된 관기(官妓) 제도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개인의 집에 거주하며 노래와 춤을 익히면서 주인의 명에 따라 외간 남자들의 수청을 드는 가기(家妓), 소속 없이 주점을 중심으로 매춘을 한 사기(私妓)도 있었다. 고려시대 기녀 중 관기는 왕과 귀족, 가기는 사대부, 사기는 양인이나 천인을 상대했다. 당시 기녀를 양성하는 학교인 교방(敎坊)이 설치됐다.
고려시대에 확립된 관기 제도는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의 기녀는 세 등급으로 구분됐고 이 중 일부만이 성매매를 했다. 일패(一牌)는 노래와 춤, 서화에도 능숙한 상층기녀로, 황진이나 이매창이 여기에 속했다. 그 아래 이패(二牌)는 기녀 출신으로 남몰래 매춘을 한다고 해서 은근자(殷勤者) 또는 은근짜라고 불리는 밀매음녀였다. 삼패(三牌)는 매춘만을 업으로 삼는 창녀였으며 탑앙모리(搭仰謀利)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에는 모든 기생이 관기로서 불특정 다수의 남성을 상대하기보다 일정 기간 한 남자를 섬기는 경우가 많았다. 성을 판 대가로 금품을 얻기보다 숙식을 보장받았다. 조선시대 관기의 수는 전국적으로 약 2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기예를 갖춘 기녀는 줄고 일반인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기생이 늘어났다.
유교윤리를 내세운 왕조로서 점잖지 못한 기녀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도 종종 있었지만 유야무야되곤 했다. 세종 때 관료들은 기녀 제도를 폐지하기로 의견을 모은 뒤 여색을 밝히지 않기로 소문난 정승 허조에게 조언을 구했다. 예상과 달리 허조는 기녀 제도 폐지에 반대했다. 창기를 엄하게 금지할 경우 훌륭한 관리들이 여염집 여인을 범하게 되어 벌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딴짓은 꿈도 못 꾼 발해 남자들
이처럼 끈질기게 내려온 매춘의 역사에도 예외가 있었다. 여성의 힘이 강했던 발해시대였다. 발해는 일찍이 일부일처제를 확고히 했고 부인의 강력한 반대로 첩을 두기도 어려웠으며 홍등가나 창녀도 없었다고 한다.
중국 남송 시대에 쓰인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 발해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부인들은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대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맺어 10자매를 이루었는데, 번갈아 남편을 감시하여 남편이 측실(첩)을 두는 것과 다른 여자와 교유(연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꾀한다. 한 남편이 범한 바가 있어 아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9인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면서 다투어 증오하는 것을 서로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의 여러 나라에는 모두 여창(창녀)이 있고 낭인(일반인)들은 모두 소부(첩), 시종(몸종)들을 가지고 있으나 오직 발해에는 이들이 없다.”
발해는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에 이 문헌은 발해의 매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사료다.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발해사)는 “‘송막기문’에서 말한 ‘10자매’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혈연이 아니라 각 가정의 부인들이 단합해 남편들을 감시하는 일종의 ‘공동감시체제’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참고문헌=‘조선의 섹슈얼리티’(정성희·2009년·가람기획), ‘성 역사와 문화’(정태섭 외·2002년·동국대학교출판부), ‘유곽의 역사’(홍성철·2007년·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최용범·2007년·페이퍼로드), ‘매춘의 역사’(번 벌로, 보니 벌로·1992년·까치), ‘문화콘텐츠닷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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