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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과 조량과의 논쟁 (http://cafe.naver.com/tpeg2/817)

상앙과 조량과의 논쟁 |

사기

 

주 BC 1046~BC 256

서주 BC 1046~BC 771

동주 BC 771~BC 256

춘추 시대 BC 770~403

전국 시대 BC 403~221

 

전국시대가 되면서 주 왕실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초와 위 등의 국가는 왕호를 칭하게 되었고, 진 혜문왕 영사(秦惠文王 嬴駟, ? ~ 기원전 311년)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주 왕실의 권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기원전 249년 진나라의 장양왕(진시황의 아버지)의 군대가 동주를 침공하여 주나라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진 효공 영거량 (秦孝公 嬴渠梁, 기원전 381년 ~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 시대의 진나라의 제25대 군주(재위: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이며, 헌공의 아들이다.

[편집] 생애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 온 힘을 다하여 치국에 힘써 진나라를 무시했던 제후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승복시키고 아래로는 영을 내려 인재를 찾았다. 위(衛)나라 출신 상앙을 중용하여 기원전 359년과 기원전 351년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시행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급속하게 국력이 신장되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효공 11년 기원전 350년 함양으로 천도하고 진나라 역사상 최초로 군자를 위한 부세를 징수했다. 대외적으로는 초나라와 화친하고 한(韓)과 맹약을 맺고, 다시 진(秦), 조(趙), 제(齊) 삼국동맹을 맺어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위나라를 동서에서 협공하고자 했다. 여러 번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낙수(洛水) 이동의 땅을 개척했다. 전국 초기 초강대국이었던 위나라는 진나라의 동진정책에 밀려 그 도성을 하동의 안읍에서 동쪽의 대량으로 옮겼다. 병이 들어 비교적 젊은 나이인 44세에 죽었다.

진 혜문왕 영사(秦惠文王 嬴駟, ? ~ 기원전 311년)는 진나라의 제 26대 군주이다. 효공의 아들. 무왕 탕(武王 蕩)과 소양왕 직(昭襄王 稷)의 아버지.

아버지 효공의 방침을 계승해, 파촉(巴蜀)을 정복해 진의 국세를 더욱 높였다. 재위 때에 진으로서는 처음으로 왕호를 사용했으므로, 왕호 사용 이전의 혜문군이라고도 불린다.

상앙 숙청 태자 시절 상앙의 변법을 어겨, 그 벌로 부역과 스승인 공자 건(公子虔)과 교육 스승인 공손 가(公孫賈)가 각기 코를 자르는 형과 문신을 새기는 형에 처해졌다. 또 시종인 축환(祝懽)이 처형된 과거가 있었다. 태자는 그것을 원망하여 효공의 사후에 상앙에게 죄를 씌워 상앙을 거열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상앙의 변법은 그대로 사용해, 기본적인 국정 방침은 효공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장의 등용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에 의해, 큰폭으로 국력을 증강하여, 주변에 있는 나라는 이것을 무서워해 주나라에 주어야 할 선물이 주어지는 만큼 강해졌다. 이 국력을 바탕으로 모략가인 장의를 등용하고, 종종 위, 제, 초나라등을 토벌했으며, 기원전 324년에 왕호를 사용하였다.

상앙(商鞅, ?~기원전 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성(姓)은 희(姫),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진 효공의 지원으로 그의 법철학에 따르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병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진나라가 주변국에서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시켰다. 행정을 교육제도에 중점을 두어 변화시키고 귀족의 권력을 줄였다. 그렇게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그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 陜西省 商縣)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렸다.

진(秦)의 변법 상앙이 추진했던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 천대받는 서생이었던 그는 자신의 정치사상과 법가를 실현할 나라로 진을 선택했다. 또한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진효공과 뜻을 맞추어 소국에 불과했던 진을 전국시대 6국에 필적할 나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오가작통법 다섯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단위로 만들었다. 이는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다.

(2)상업 억제 상앙은 강력한 중농주의자였다. 그는 상업을 악업으로 보았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다. 그러나 후에 진나라가 어느 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하였다.

(3)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양인을 확충하여 재정을 확충하였다.

(4)군공수작제 군공수작제를 통해서 누구나 전쟁터나 국가를 위해서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림...

(5)악습 및 구습 타파 진나라에 내려오는 잘못된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함으로서 백성들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음

변법에 대한 반대 진효공과 상앙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 변법을 좌초시키기 위한 시도는 여러번 일어났다. 특히 진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서,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번 중단 위기를 맞는다. 진 효공에게 이르는 반대 상소만 하루 수천개였다 하니 실로 나나라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상앙의 엄벌주의 상앙은 변법에 대한 반대자는 용서치 않았고 변법을 어길시 강력한 엄벌주의로 대처하였다. 이 변법 앞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영사(훗날 진 혜문공)도 예외는 아니어서 태자가 변법을 어기자 스승이었던 공자 건(진효공의 형)의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렸다. 이 일로 공자건은 영원히 은둔했으며 태자는 상앙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된다.

변법의 성과 20년동안 부지런히 변법을 추진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하서 수복 지금의 장안부근을 장악함으로써 당시 최대 패권국가였던 위나라를 제압하고 전국시대의 패자로 등극한다.

(2)함양 천도 지금의 장안인 함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한다.

(3)강력한 군사력 양인이 많아지면서 군사수가 증대했고 재정이 확충되어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상앙은 이 공으로 대량조에 올라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공동 군주가 된다.

조량과의 논쟁 상앙이 재상이 된 지 10년이 되었는데, 왕족과 외척들 사이에서 그를 원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상앙은 조량(趙良)이라는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에 조량의 명성을 들었던 상앙은 그와 친교를 맺기를 희망하였으나 조량은 공손하게 거절하였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상앙이 물었다.

상앙 - 그대는 내가 진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오?

조량 - 반성하면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고 들었습니다. 순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라 하셨습니다. 마땅히 이에 따르셔야지 저의 의견 따위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상앙 - 원래 진나라는 오랑캐의 풍습에 젖어서 아비와 아들의 구별도 없이 한 집에서 살고 있었으나 내가 그런 풍습을 고쳐서 남녀의 구별이 있게 하고 위엄도 있는 궁궐도 만들었소. 선생께선 나와 옛 목공 때의 재상 백리해 중 누가 더 정치를 잘한다고 보시오?

조량 - 천 마리의 양 가죽도 한 마리의 여우 가죽만 못하고, 아첨꾼 천 명의 말도 정직한 사람의 한 마디 말보다 못합니다. 주나라 무왕은 신하들이 바르고 옳은 소리를 할 수 있어 크게 일어났고, 은나라 폭군 주왕은 신하들이 감히 간언하지 못했기에 멸망을 면치 못 한 것입니다. 만일 무왕이 틀렸다고 생각치 않으신다면 제가 하루 종일 정직한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상앙 - 겉치레의 말은 허황되고, 내심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쓴 말은 약기고 달콤한 말은 독이다'라는 말이 있소이다. 선생이 진정으로 용기 있게 하루 종일 바른 말을 해 준다면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왜 마다하겠소?

조량 - 옛날 목공 때의 백리해는 가난했지만 현명한 사람이였습니다. 목공께서 그의 현명함을 들으시고 만나보고자 하셨으나 백리해는 여비가 없어 나그네에게 몸을 팔아 소를 치면서 따라갔습니다. 목공이 이를 알고 백리해를 소 치는 신분에서 백관의 위에 서게 하셨으나 진나라에서는 감히 불만을 품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리해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6,7년이 지나서 동으로는 정나라를 쳤고, 진(晉)나라의 군주를 세 번씩이나 교체시켰으며, 초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백리해가 어진 정치를 베푸니 오랑캐까지 복종해 따랐습니다. 백리해는 재상을 지내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수레에 앉지 않았고, 더워도 수레 덮개를 씌우지 않았습니다. 백리해가 행차할 때는 수행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고 무장한 갑병(甲兵)도 없었습니다. 백리해의 공로는 문서 창고에 기록되어 보존되어 있으며, 덕행은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리해가 죽자 진나라의 모든 사름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조차 노래를 하지 않았으며, 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흥얼거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백리해의 정치요 덕입니다.

그런데 상군께서는 왕과의 만남부터가 명예롭지 못했습니다. 왕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왕의 총애를 받던 경감(京監)에게 소개를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 재상을 지내면서도 백성을 위한 일은 하지 않고 궁궐이나 크게 지을 뿐이었으니 그것을 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또 태자의 스승에게 형벌을 가하고 서슬이 퍼런 법으로 백성을 죽이고 다치게 했으니, 이는 결국 원망과 화를 쌓은 것입니다.

상군의 명령이 왕의 명령보다도 무거워, 왕께서 부르기보다는 상군께서 불러야 더 빨리 옵니다. 지금 상군께서 많은 법을 바꾸면서 이것을 교화라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법을 바꾼 목적은 다만 상군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목적이겠지요, 상군께서는 마치 왕처럼 자신을 과인이라 칭하고, 많은 왕족들을 핍박하시고 있습니다.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쥐에게도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는데, 어째서 일찍 죽지 않는가?'

이 시를 보면 상군께서 축복을 받으며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태자의 스승인 공자 건(虔)은 8년전 의형(劓刑)을 당한 이후로 지금까지 두분불출하고 있습니다. 《시경》에는 또한 이러한 구절도 있습니다. '인심을 얻는 사람은 일어나고, 인심을 잃는 사람은 망한다' 상군께서는 지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계십니다. 지금이라도 무사히 장수하고 싶으시면 하사받으신 열다섯 개 읍을 왕에게 되돌려 드리고, 시골에 가서 화초나 가꾸면서 지내시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재를 천거하십시오. 또한 노인을 봉양하고, 고아를 돌보며, 부모와 형을 공경하고, 공로 있는 사람에게 알맞은 지위를 주며 덕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도록 왕께 건의하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실 겁니다. 그런데 상군께서는 아직도 부를 탐하고 국정을 독점하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계십니다. 효공께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는 상군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어찌 한둘뿐이겠습니까? 상군의 파멸은 발끝을 세워 기다리는 것처럼 순식간의 일이 될 겁니다 ”

그러나 상앙은 조량의 충고를 듣지 않았으며 이로부터 5개월 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다.

비참한 최후 그의 후원자이자 지기였던 진효공이 죽자 그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태자 영사가 즉위한다.(진 혜문왕) 혜문왕 즉위 후부터는 진나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그는 상앙의 반대파 (여기에서 상앙의 반대파는 이제껏 상앙의 변법을 반대를 해 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세력이다. 진 목공 이후 진나라의 정치는 원로세력과 왕권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점차 그 균형이 무너져 원로세력이 득세하게 되었고, 진 효공 이후 다시 회복하고자 변법을 시행하였다.)를 규합하여 상앙을 탄핵했고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어 거열형에 처해진다.

사후 평가 그는 강력한 법가만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과 교화는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며 사람간의 마음이나 인정 등은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반대파를 포용할 줄 몰랐고 그들과 토론할 줄도 몰랐으며 오직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단시간에 성과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반대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융통성을 모르는 정치인이라고 해야 할까.

상군서 상앙은 생전에 상군서라는 책을 집필하여 남겨 놓았다. 이는 전국시대 역사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상앙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알 수 있어 귀중한 책이라 할 만하다.

포사(褒姒) 중국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인 유왕(幽王)의 애첩. 유왕은 그녀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봉수)를 올려 군사와 제후들을 놀라게 하여 포사를 웃겼다 한다. 유왕이 포국(褒國:陝西省 褒城의 남동쪽)을 토벌하였을 때 포인(褒人)이 바쳤으므로 포사(褒姒)라 하였다. 왕의 총애를 받아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는데, 이상한 출생의 전설을 지닌 그녀는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유왕은 그녀를 웃기려고 온갖 꾀를 생각한 끝에 외적의 침입도 없는데 위급을 알리는 봉화(봉수)를 올려 제후들을 모았다. 제후들은 급히 달려왔으나 아무 일도 없었으므로 멍하니 서 있자, 그것을 본 포사는 비로소 웃었다고 한다.

뒤에 유왕은 왕비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쫓겨난 왕비(신후 申后)의 아버지 신후(申侯)는 격분하여 BC 771년 견융(犬戎) 등을 이끌고 쳐들어와 유왕을 공격하였다. 유왕은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는 한 사람도 모이지 않았다. 왕과 백복은 견융의 칼에 살해되어 서주는 멸망하였으며, 포사는 납치되어 견융의 여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시안 옛 주(周)나라의 수도 서기(西岐)가 이 부근에 있었다. 기원전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되어 장안(長安)이라 하였으며 후한(後漢) 말기에 18제후 연합군에게 쫓긴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고 한때 이곳에 들어왔다. 오랜 열국 시대가 끝나고 581년에 수(隋)나라의 수도, 618년에 당(唐)나라의 수도가 되어 300년간 국제 도시로서 융성하였으나, 안사의 난, 황소의 난으로 일대 타격을 입고 침체되었다. 1936년 장쉐량이 일치 항일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억류하는 시안사건이 일어나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가 되었다.

시안 시는 옛 이름은 장안(長安, Cháng'ān), 경조라 하며 산시 성의 성도에 속한다. 중국 지리의 중심으로서,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시안은 중국 6대 중심도시 중의 하나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름난 도시이다. 시안은 중국 중서부지역의 중요한 과학연구, 고등교육, 국방 과학기술 공업과 고급 신기술 산업기지, 중국의 중요 우주비행, 항공공업센터, 기계제작센터와 방직공업의 중심이기도 하다. 시안은 비교적 튼튼한 공업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 중서부지역에서 과학기술 실력이 가장 뛰어나고, 공업부분에서 가장 완전함을 갖춘 대도시중의 하나이다.

낙양 원래 "뤄양"이라는 이름은 도시가 뤄허의 북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해는 강의 남쪽 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햇빛은 항상 강의 북쪽 부분이 받게 된다(이것은 중국의 오래된 작명 방식이다). 뤄양(낙양)은 몇 세기 동안 낙읍(洛邑), 낙주(洛州)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또한 당나라 때는 동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동도(東都)라 불렸고 송나라 때는 서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으로 불리었다.

주나라 시절에는 뤄허와 마찬가지로 雒陽, 洛陽 등의 표기가 공존했고, 진나라는 수덕을 표방했으므로 洛陽을 공식화했다. 한나라는 화덕을 숭상했으므로 洛의 삼수변을 꺼려 雒陽을 사용했으나, 위나라는 토덕을 내세웠으므로 다시 洛陽으로 돌아갔다.

동주(東周)는 기원전 771년 서주의 유왕이 견융의 침공으로 호경이 함락되고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제후들이 평왕을 옹립하였고 평왕이 수도를 호경에서 낙읍으로 옮긴 이후의 주나라를 말한다. 동주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명목상으로만 남겨둔 채, 독립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때가 춘추 전국 시대이다.

정나라와의 전쟁 정나라는 선왕의 동생인 정 환공으로부터 시작된 제후국으로, 이제 개국한 동주

왕실과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장공은 노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주 왕실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노나라 내에 있는 태산 근처의 땅을 노나라에게 양도하는 대신 정나라 내에 있는 노나라 영토를 병합했다. 이것은 정나라가 주 왕실의 재상 자격으로 태산에 제사지내러 가는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으며, 이는 환왕의 분노를 샀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환왕은 자신이 중용한 괵나라를 비롯, 진(陳), 채(蔡), 위(衛)의 군사를 소집해 정나라를 토벌하기로 했다. 이때 장공의 부하 중 축첨(祝瞻)이 쏜 화살이 환왕의 팔에 맞았다. 정 장공은 공격을 중지시키며 "윗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인데 하물며 천자를 능멸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사신을 보내 환왕의 부상을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동주 왕실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