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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무등일보 2009년 04월 23일 00시 0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수구세력에 꺾인 개혁정신 애달프다

박상, 중종비 신씨 복위추진 기묘사화 불씨

중벌에 처할 위기서 조광조 간언으로 모면


호남은 옛날 호강(湖江·지금의 금강) 아래를 말하며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지역 이름이다. 세상이란 하늘은 같아도 땅과 사람이 다르므로 문화와 정신은 지역적 특징을 갖게 된다.

호남 정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의(義)이다. 정의, 절의, 충의가 바로 호남정신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항일운동, 5·18민주화운동등은 바로 호남정신의 발로이다.

여수 출신으로 호남의 정신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김세곤 광주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집필로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장기연재를 시작한다. 김 위원장은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자 아람문학협회 회원이기도 한 문필가로 다수의 노동관계 서적과 수필집을 냈다. 특히 그가 최근 펴낸 '송강문학기행'은 그의 호남정신에 대한 사랑과 가사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이 연재는 조선시대 중기 4대 사화에서부터 시작한다. 편집자주

1. 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후일 저 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 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無等山前曾把手 무등산전증파수

牛車草草故鄕歸 우차초초고향귀

他年地下相逢處 타년지하상봉처

莫說人間謾是非 막설인간만시비

1519년 기묘사화로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으로 귀양 온 정암 조광조(1482-1519)가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이듬해 봄에 그의 시신이 경기도 용인으로 떠나간다. 눌재 박상(1474-1530)은 그의 관이 실린 소달구지를 먼발치로 보면서 만시(挽詩)를 짓는다. 시 제목은 ‘효직의 상을 당하여’(효직은 조광조의 字)이다. 상여 줄을 끌면서 만가를 부르듯이 시가 매우 애절하고 장엄하다.

이 시의 첫 1구, 2구는 박상과 조광조와의 과거와 현재의 인연 이야기이다. 1519년 11월 박상은 무둥산 앞 분수원 (지금의 광주 남문 밖)에서 유배 내려오는 조광조를 만나 슬픔을 나누웠다. 그 때 그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시를 건넨다.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잡고 헤어졌을 때

그대가 조정에서 일하다가 천리나 되는 이곳에 귀양 옴을 이상하게 여겼노라

귀양살이와 조정에서 벼슬함을 구별하지 마소

저승에 가면 아무런 차등이 없는 것이니.

그런데 조광조는 유배 온지 한 달도 못 되어 사약을 받았고 그의 친구 학포 양팽손(1488-1545)이 수습한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서 바삐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비참하고 애달프다.

3구와 4구는 두 사람이 내세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면서 그때에는 현세에서의 부질없는 시비는 하지 말자고 읊는다. 여기에서 시비란 그가 겪었던 신비복위소 사건과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급진적 개혁정치를 말한다.

1515년 8월, 당시 담양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폐위된 중종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순창군 강천사 삼인대에서 올렸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며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신수근은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박원종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까 보아 신씨를 7일 만에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1515년 3월초에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후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박상 등은 신비 복위소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조강지처를 폐위시킨 박원종 등의 행위는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므로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조정은 이 상소로 인하여 논쟁에 휩싸였다. 박상과 김정 등은 중벌에 처해질 분위기이었으나 조광조의 간언으로 박상은 전라도 남평으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상소는 사림들의 의리정신을 일깨워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기묘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조광조에 대한 시비는 곧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대한 시비를 말한다. 1518년에 대사헌이 된 조광조는 중종을 설득하여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훈구 외척 공신들의 공훈을 3/4이상 삭탈하는 조치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보수 세력인 훈구파의 반발을 크게 사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38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

한편 광주 출신 박상은 호남 유학의 종조(宗祖)로 평가되며 허균(1568-1618)의 '성옹지소록'에도 호남 출신 인재의 선두에 박상 이름이 나온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로서 드러난 자가 매우 많았다.

눌재 박상과 육봉 박우 형제, 사인(舍人) 최산두, 미암 유희춘과 유성춘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삼재(三宰) 송순, 찬성(贊成) 오겸 같은 사람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다.

그 후로도 사암 박순, 일재 이항,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정조임금이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시를 잘 썼고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 권14 문장부에도 박상은 뛰어난 시인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제자로 송순, 임억령, 김인후등 당대의 거출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근세의 시인은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 눌재 박상 , 석천 임억령, 금호 임형수,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사암 박순,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제봉 고경명등은 남달리 우뚝 뛰어난 사람들이다.

눌재를 만나려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을 가면 된다. 거기에는 그의 영정과 시문집 '눌재집'이 보관되어 있다. 김세권(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 죽어서도 향기로운 만남, 조광조와 양팽손

 (무등일보 2009년 05월 07일 00시 00)

 

사약받은 정암 시신 손수 수습

사마시에 함께 합격 후 개혁정치로 함께 파직

자신에게 미칠 화를 감수하며 의리 지킨 학포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1519년 11월 기묘사화로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에 유배 온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위 시를 쓴다. 능성 유배 중에 쓴 시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는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마음은 말 잃은 마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중종 임금이 자기를 다시 부를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는 하고 있지만 지금은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체념을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는 유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사약을 받는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아래 절명시를 쓴다.



愛君如愛夫 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이 두 수의 시는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광조 적려유허지 애우당(愛憂堂)에 걸려 있다. 애우당은 절명시 1구 첫 글자인 임금 사랑의 애 愛와 2구 첫 글자인 나라 걱정의 우(憂)를 딴 강당 이름이다.

애우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적중거가라고 써진 초가집과 영정각이라고 써진 기와집이 있다. 적중거가는 방2칸 부엌 한 칸의 초라한 집인데 조광조의 귀양살이 모습을 알 수 있다. 영정각에는 비교적 온후한 모습으로 관복을 입은 조광조 영정이 있고 여섯 일곱 송이의 하얀 국화가 놓여 있다.

한편 적려유허비는 정문에서 바로 추모비각이라고 써진 쪽문을 들어가면 있다. 비석은 거북이가 받치고 있고 그 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총 12자의 해서체 글씨가 세로 두 줄로 6자씩 적혀 있고, 뒷면에는 추모내역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이 비는 조광조 사후 150여년 후인 1667년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다. 글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그런데 비통하게 죽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학포 양팽손(1488-1545)이다. 그는 능성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일곱 살 때 이 고을을 순시한 전라감사가 양팽손에게 천지일월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는 “천지는 나의 도량이요,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라고 지었다 한다. 이에 전라감사가 “이는 해학의 모습이요 추월(秋月)의 정기라 훗날 용문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하며 칭찬하였다 한다.

그는 그의 나이 22세인 1510년(중종 5년)에 조광조와 같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 사간원 정원, 홍문관 교리등을 하면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기묘사화로 파직 당하여 화순으로 내려온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한다. 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 길에 돌아가기 어려우므로 아주 얇은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초가집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한 다음 학포 양팽손을 찾았다고 한다.

양팽손이 안으로 들어오자 “양공, 어찌 이토록 늦게야 오시나이까. 태산이 무너지는가. 양주(梁柱)는 꺾이는가. 철인은 시드는가” 라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한다. 그런데 조광조는 한 사발의 사약에 쉽게 죽지 않아 다시 한 사발 더 마셨다 한다.


어두운 세상에 횃불을 밝히려 했던 조광조가 죽자 양팽손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염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마을 골짜기인 쌍봉사 근처 중조산 조대감골 서원터 (화순군 이양면 중리 서원동 마을)에 가묘를 만들었다가 다음 해에 조광조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을 한다.

세상이 평안할 때 의리를 말하기는 쉬우나 난세에 의리를 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감수하고 조광조의 시신을 직접 수습한 양팽손의 행동은 정말 의롭다. 그리고 보니 양팽손은 조광조에게 하늘이 내려준 지인이다. 학포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묘는 아마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신이 들판에 버려졌을 지도 모르니까.

그 후 양팽손은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에 학포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시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과 등진다. 2003년 4월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이 달의 문화인물’로 뽑힌 그가 그린 그림 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도'가 유명하다.

이 그림은 절벽이 있는 강산에 배가 한 척 있다. 멈추어진 배에 뱃사공이 있고 절벽에는 나무 몇 그루와 집이 있으며 먼 곳에 구름이 자욱하다. 마치 안견의 '몽유도원도'같다. 이 그림에는 이러한 화제(畵題)가 붙어 있다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갠 날마다 창을 열어 놓으니

산촌을 둘러싼 숲 그림자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세상 일 전혀 못 듣네.

나그네 타고 온 배 닻을 내리고

고기 잡던 배, 낚시 걷어 돌아오니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응당 산천 구경 나온 것이리라.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할 수 있고

여울 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돛 단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말라.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렵다.



이 시에는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하는 심정이 가득 담겨 있다.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려워서 고깃배도 오고 가지 말라’고 한 표현은 은일(隱逸)의 극치이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인연은 죽어서도 향기로운 지란지교이다. 화순군 한천면에 있는 죽수서원과 경기도 용인시의 심곡서원에는 지초, 난초 향기가 풍기는 두 사람의 신위가 같이 모시어져 있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 사람들의 피눈물, 화순 해망서원

 (무등일보 2009년 05월 21일 00시 00)

 

 

"의리를 세우려다 피바람을 맞았구려"

김일손 조의제문 발단 연산군 광기 드러내

무오·갑자사화로 희생 당한 사림 5인 위로

화순군 춘양면에 있는 해망서원(海望書院)을 간다. 해망서원은 김종직의 제자 정여해(1450-1520)가 중종3년(1508년)에 무오(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로 희생을 당한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과 김굉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해망단이 그 시초이다.

차 안에서 나는 몇 년 전에 보았던 '왕의 남자' 연극의 첫 머리에 나오는 연산군의 독백이 생각났다.

“선대왕이시여, 선대왕 마마를 능멸한 김일손을 능지처참하였습니다. ‘아니 되옵니다’란 말만 일삼은 사림파들도 모두 다 몰아내었습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에 사림(士林)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이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史草)에 그의 스승 김종직(1431-1492)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김종직 문하의 사림들이 송두리 채 화를 입었다. 이 사화는 사초가 문제가 되어 일어났기에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그러면 조의제문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세조 3년 (1457년) 10월 과거 시험에 낙방한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을 나서 성주 북쪽 10리에 있는 답계 역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런데 꿈에 중국 초나라의 어린 왕 의제(義帝)가 “항우가 나를 죽여 침강에 빠뜨렸다”고 하소연 하였다. 참으로 괴이하다 싶어 붓을 들어 의제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 바로 조의제문이다. 이 시기는 폐위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세상을 떠난 직후이며 그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는 등 이상한 소문이 흉흉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은 사초에 조의제문을 실으면서 ’김종직이 꿈속에서 보고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을 지어 충성스런 울분(忠憤)을 붙였다‘는 평을 같이 적어 놓았다.

평소에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사림파로부터 비난을 받아온 유자광, 이극돈등 훈구파들은 사초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유자광은 연산군 앞에서 “김종직이 조의제문에서 항우가 의제를 죽이고 의제를 애도한 것은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판하고 단종을 불쌍하게 여기는 뜻이 있다”고 낱낱이 고하였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이다. 세조는 김종서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 한 후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되었으며, 단종 복위 거사를 꾀한 집현전 학사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이고 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도 죽인 정권욕에 불탄 임금이다. 그래서 세조는 집현전을 폐쇄하였고 의리와 충효를 중시한 유학을 위축시키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집권 내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었다.

그런데 사관 김일손이 세조를 은근히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실록에 올리려 하였으니 이런 망극한 일이 또 있으랴. 이는 왕조에 대한 도전이요 선대왕에 대한 능멸이다.

한편 연산군 입장에서 보면 사림파들이 자기를 유희와 방탕에 빠져 있다고 사사건건 간언하여서 성가신 참에 참 잘 된 일이었다. 또한 훈구파 입장에서도 사림파를 일거에 싹쓸이할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고 김종직의 사림파들은 송두리째 화를 당한다.

이미 6년 전에 죽은 김종직은 시체를 파내고 관을 쪼개어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김일손은 대역죄로 사지가 찢겨지는 능지처참을 당한다. 정여창은 불온한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로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고 김굉필은 붕당을 하여 나라를 농락한 혐의로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간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를 배웠거나 사림파를 동정한 이들은 모조리 화를 당한다.

여기에서 김종직과 김일손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조선의 성리학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로 이어진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를 이어받아 성리학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그는 세조 때에 급제하여 성종 임금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자 그의 제자들이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의 제자는 도학에 명성이 있는 김굉필, 정여창등과 문장에 이름난 김일손, 조위 등이 있다.

김일손은 더러운 세상을 깨끗이 하고자 하는 현실 정치 개혁에 의욕이 강한 젊은 선비였다. 그의 호는 탁영(濯纓)이다.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굴원의 '어부사'에 나온다. 굴원이 죽고자 양자강 지류 멱라강을 배회하고 있을 때 한 어부가 굴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랑의 물이 깨끗하면 내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이 말은 세상이 맑을 때는 속세에서 벼슬을 하고 세상이 혼탁할 때는 속세를 떠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김일손은 ‘내 갓 끈을 씻을 수 있도록 창랑의 물을 깨끗하게 하겠노라’는 의지를 지닌 호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는 깨끗한 정치를 하여 역사에 부끄럼 없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사관으로서 단종애사를 춘추직필(春秋直筆)하여 후세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편 무오사화로 유배 간 정여창(1450-1504), 김굉필(1454-1504)은 갑자사화로 인하여 다시 화를 당한다. 생모 윤씨가 폐위되고 사약을 마신 것에 눈이 뒤집힌 연산군은 훈구파와 왕실 관련자를 모두 싹쓸이 하는데 사림파들도 다시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함경도 종성 유배 중에 이미 죽은 정여창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김굉필은 순천의 저자거리에서 참수를 당한다.

이윽고 해망서원에 도착하였다. 해망단을 세운 정여해는 하동정씨로서 정여창의 동갑내기 십촌 동생이다. 그는 능주 출신으로서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 사화를 피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세상이 싫어 하동에서 이곳 해망산 아래로 은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운 좋게도 서원에서 정씨 문중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덕분에 숭의사 사당에 모시어져 있는 김종직등 다섯 분의 신위를 볼 수 있었다. 김종직은 가운데에 있고, 오른쪽에는 김일손과 김굉필, 왼쪽에는 정여창과 정여해의 신위가 있다. 그들에게 묵념을 드렸다.

"선현들이여, 당신들께서는 도학과 의리가 바로서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탐욕과 방탕의 무리들로부터 피바람을 맞았구려. 저희는 510년 전에 흘린 그대들의 피눈물을 결코 잊지 않으렵니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4. 순천 옥천서원과 임청대

 (무등일보 2009년 06월 04일 00시 00)

 

유배지에서 만난 도학자와 시인의 우정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 늘 선비의 도 지켜

자유분방한 조위 성종 그리움 시에 담아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이 심해지고 있는 연산군 6년(1500년) 여름 어느 날, 전라도 순천의 옥천(玉川) 시냇가를 배회하는 두 선비가 있었다. 한 사람은 근엄하고 사색하는 표정이었고 또 한 사람은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이들이 바로 김굉필(1454-1504)과 조위(1454-1503)이다.

한훤당 김굉필.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그는 평안도가 흉년이 들자 순천으로 귀양을 왔다. 그는 김종직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일찍이 소학동자라 불리었다. 사람들이 나라 일을 물으면 “소학 읽는 아이가 어찌 큰 뜻을 알겠는가”라고 하였고 '소학을 읽고(讀小學)'라는 시에서 보듯이 항상 소학을 실천하였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책 속에서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하려 하노니

어찌 구차스레 부귀를 부러워하리오.



스승 김종직이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오를 자로 평하였듯이, 그는 군자가 되기 위한 도를 실천하는 유가의 도학자이었고 평소에 한빙계(寒氷戒)를 계율로 삼았다. 한빙이란 뜻은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갑다’는 의미이다. 그가 삶의 지표로 삼은 한빙계 18계율은 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 세워 착한 본성을 따르라), 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등이다.

이렇듯 김굉필은 유배 중에도 아침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항상 갓을 쓰고 있었으며 밤늦게 까지 책을 읽으면서 파루 종이 울린 다음에야 잠을 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났다. 그리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가 조광조의 스승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17세의 조광조는 평안도 어천 찰방(지금의 역장)으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어천에서 살았는데, 인근의 희천에서 유배중인 김굉필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2년간 공부를 배웠다.

김굉필은 순천에 유배 와서도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계린, 최산두 등이 그의 제자이다. 유계린은 '표해록'을 쓴 최부의 사위이고 기묘사림 유성춘과 '미암일기'를 쓴 유희춘의 아버지이다. 최산두는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가서 김인후, 유희춘을 가르쳤다.

한편 매계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으로서 김굉필과 같이 김종직의 문인이다. 그는 시를 잘 지어서 일찍이 성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그는 성절사로 중국에 있었는데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조위가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첫 머리에 수록한 것은 매우 뜻이 있는 것이다”라고 참소하였다. 연산군은 크게 노하여 조위가 강을 건너는 즉시 베어 죽이라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동행한 조위의 이복동생 조신이 요동에 있는 점쟁이 추원결을 찾아 가서 길흉을 물으니, 다만 한 구절의 글을 적어 주었는데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으나(千層浪裡翻身出)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 하지(也須巖下宿三宵)”라 하였다.

조위가 압록강에 이르자 다행히 목숨은 면하고 평안도 의주에서 귀양을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다”는 점괘는 알 수 있었으나 다음 구절의 뜻은 알지 못하였다.

조위도 김굉필과 마찬가지로 같은 때에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서문밖에 살면서 옥천을 자주 노닐었다. 여러 늙은이들과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바둑을 두기도 하였으며 시도 읊조렸다. 그는 옥천의 노거수 위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이름을 ‘임청(臨淸)’이라 하였다. 임청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개울(임청류)에 임하여 시를 짓노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유유자적한 조위였으나 마음에는 울분이 가득하였다. 성종임금이 그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시로 이러한 심정을 노래하였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유배가사 '만분가(萬憤歌)'이다. 만분가는 129구의 장편가사로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 간 자신의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하계(下界)로 쫓겨난 것에 비유하였다. 두견의 넋이 되어 남산 배나무에 앉아 밤낮으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원통한 사연을 하소연하고, 구름이 되어 옥황상제로 비유된 성종에게 가까이 가서 가슴에 쌓인 말을 실컷 아뢰겠다고 했다.

국문학자들은 이 가사가 나중에 송강 정철이 지은 국문가사 '사미인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학자 김굉필과 시인 조위는 옥천변에서 자주 만났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런데 조위는 연산군 9년(1503년) 11월에 병으로 죽는다. 울분이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굉필이 장례를 치러 주었는데 너무나 쓸쓸하였다. 자녀도 없고 조문하는 이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듣자 조광조는 조위를 애도하는 시를 남기었다.



매계가 먼저 가시고 한훤당이 조사(弔辭)를 지으시니

야사에 올해는 슬픔도 가득하다고 하리라.

도를 찾는 일 양지바른 강가의 어린 아이처럼

서릿발 가득한 하늘에서 누런 꽃 보는 것 같구나.



그로부터 1년 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김굉필에게도 화가 미치어 참수령이 떨어졌다. 그는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한 채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고 순천 저자거리에서 초연히 참수를 당하였다.

1년 전에 죽은 조위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그의 관(棺)이 파헤쳐지고 시체가 베어져서 묘 앞 바위 아래에다 3일 동안 뒹굴었다. 점쟁이의 두 번째 점괘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하지”가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옥천서원은 명종 19년(1564)에 순천부사 이정이 김굉필을 위하여 경현당을 지은 것이 시초이며 고봉 기대승이 '경현당기'를 썼다. 그 후 선조 1년(1568)에 순천부사 김계의 상소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호남 사림의 요람이 되었다. 임청대 또한 순천부사 이정이 조위와 김굉필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인데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5. 최부, '표해록'을 쓰다 - 광주 무양서원

 (무등일보 2009년 06월 18일 00시 00)

 

김종직 문하이자 송흠과의 일화는 청렴성 표본

부친상 위해 귀향선 타던 중 폭풍우 만나 중국행

6개월 8천리 고행길 일기체로 기록한 기행서 집필

조선 성종 19년(1488년) 정월 그믐 날, 제주도에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던 조정의 관료 한 사람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전라도 나주로 초상을 치르러 가기 위하여 급히 배를 띄웠다. 그런데 군관, 향리, 관노 등 모두 43명이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났다. 10여일을 강풍과 폭우 속에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강남의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였다.

살았다고 환호를 한 순간 고난이 또 닥쳐왔다. 왜구로 몰린 것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에서 고급 관료가 필담으로 조선의 역사와 인물, 예의범절 등 여러 이야기를 잘하여 그들은 혐의를 벗는다.

그리고 중국 관리와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 그들은 황제를 알현한다. 부친상을 당한 관료는 황제 알현 시에도 상복을 고집하여 명나라 측과 실랑이가 벌어진다.

결국 이 일은 알현 시에만 잠시 예복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이후 이들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귀환한다. 제주도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8천 여리의 험난한 길을 돌아온 것이다.

성종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총책임자인 고급관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동안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8일 동안에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이 책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고 그 저자는 최부(단종 2년 1454- 연산군 10년 1504)였다.

금남 최부. 그는 나주에서 태어나 해남 정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해남에서도 살았다. 그의 호 금남(錦南)도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과 해남의 남(南)을 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림의 종주(宗主)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를 한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였다.

그의 청렴성은 그와 지지당 송흠(1459-1547)과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최부와 송흠은 홍문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고향도 같은 전라도라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고향으로 휴가를 갔는데, 하루는 영광 삼계(지금은 장성군)에 사는 송흠이 해남에 있는 최부의 집을 찾아왔다.

점심 겸상을 물린 뒤 최부가 송흠에게 느닷없이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부는 역마는 한양에서 고향집에 올 때까지만 탈 수 있는데 어찌 사사로운 일에 쓰느냐고 질책을 하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최부의 질책에 당황한 송흠은 몹시 부끄러웠다. 그는 영광의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역마를 끌고 걸어서 갔다.

휴가가 끝나고 얼마 뒤 홍문관을 떠나게 된 송흠은 최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최부는 “자네는 나이가 젊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라며 타일렀다. (일설에는 최부는 상경하여 송흠을 탄핵하였다고 한다)

최부는 너무나 대쪽 같은 선비였다.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강직한 간관(諫官)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폭군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3월, 사간원 사간(종3품)인 그가 올린 이 상소는 너무나 격렬하여 다음 달에 그가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갈 때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간의 직함을 회수하여 버렸다.

다음 해(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조의제문 사건의 주역인 김종직이 총애하는 제자이면서 이미 연산군 눈 밖에 난 그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붕당을 하였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다.

그로부터 6년 뒤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또 끌려 왔다. 곤장 100대에 노비가 되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연산군은 그리하지 않았다. 참형(斬刑)을 명한 것이다. 이 때 썼으리라는 시가 전해진다.



북풍이 다시 세차게 부는데

남녘 길은 어찌 이렇게 멀까.

매화는 차갑게 잔설을 이고

말라버린 연꽃 가지 작은 못 속에 있네.



北風吹更急 북풍취경급

南國路何長 남국로하장

梅冷封殘雪 매냉봉잔설

荷枯立小塘 하고입소당



참형의 어명이 내려진 날. 그 날의 '연산군일기'에는 그에 대한 졸기(卒記)가 이렇게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1504년) 10월25일.



광주시 광산구 첨단의 산월초등학교 근처에 무양서원(武陽書院)이 있다. 여기에 최부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그의 외손자 유희춘도 함께 배향되어 있는데 '미암일기'의 저자이기도 한 유희춘은 외할아버지 최부의 글을 모아 '금남집'을 엮었고 선조 2년(1569년)에 다시 간행된 '표해록'의 발문을 썼다.

'(전략) 많이 듣는 것을 구하고 사물을 잘 알고자 노력하는 선비 가운데 이 책을 보고자 하는 이가 많았다. (중략) 아! 이 책이 손상되고 불완전하여 매몰된 지 거의 백년이었는데 지금 오랜 어둠속에서 밖으로 드러나 세상에 널리 전해질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유희춘의 '표해록' 발문에서.



6월의 토요일 오후 무양서원에는 공부가 한창이다. 문화재청과 광산구청에서 함께 하는 '무양서원의 아해들' 강좌이다. 최부의 후손들인 호남인들이 유학의 중심 사상인 인(仁)과 의(義)를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로빈손크루소의 표류기' 보다 더 재미있고 문학적인 해양기행 책이고, 원나라 때 만들어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당나라 때 유학 온 일본승려 에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여행기로 해외에서 더 유명한 책인 '표해록' 이름을 들어 보았을까?

명나라 중기 중국의 정치와 사회, 도시와 문화, 생활풍습들을 자세히 묘사하여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높은 이 책을 읽어 보았을까? 더구나 '표해록' 책을 쓴 사람이 바로 무양서원에 신위가 배향되어 있는 호남의 강직한 선비 금남 최부임을 알까?

김세곤 (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