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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답사기행<54> (남도일보 2013.02.06 18:16:27)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답사기행<54>

<오녀산성의 수호성 소성자산성②>

 

성벽·우물·석축…2천년전 고구려인 생활상 고스란히…
철촉·말등자·쇠고리·쇠못·쇠가마조각·도자기 등 유물 출토
험한 산세·천태만상 기암괴석 어우러져 빼어난 장관 연출
유리왕 두 왕비 ‘화희·치희’의 애달픈 전설 전해지기도

소성자산성에서는 일찍이 철촉, 말등자, 쇠고리, 쇠못, 쇠가마조각 등 철기를 망라해 도자기 등 많은 문물(文物)이 출토됐다. 이 산성에는 현도궁 등 후기에 축조된 유적 외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고구려시기의 성벽과 병마의 수원(水源)으로 사용되었던 샘터, 천지, 우물, 연자돌 등 생활용구들이 2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의 풍상을 겪어온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 남쪽으로는 많이 파괴되었지만 산사태에 대비해 쌓아놓은 방수벽과 산사태를 빼돌릴 수 있는 배수문 등 시설도 애초의 윤곽을 대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산성 안에는 길이가 100여m 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동서로 나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샘물이 벼랑을 타고 졸졸 흘러내리고 있어 산성 내의 수원을 보태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험한 산세와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과 서로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벼랑 밑 샘물터에서 물을 받아 마셔보았다. 시원하고 달콤했다. 필자를 동행한 강경생씨는 이 물을 많이 마셔봤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할 뿐만 아니라 배탈이 난 적이 없다고 했다.

산성 중앙 동남편 약간 펑퍼짐하게 꺼져 들어간 곳에 옛 우물이 보였다. 푸른 이끼가 덮인 우물의 돌들이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1m 남짓한 깊이까지 물이 차 있었다. 강씨의 말로는 이 우물이 산 위에 있지만 지금까지 마른 적이 없고 넘친 적도 없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현지 사람들이 ‘용액신수(龍液神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의 물을 마시면 몸이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다고 한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려 한 모금 마셔보았다. 햇빛이 비쳐서인지 우물물이 시뿌옇게 보였는데 생각보다 방금 전 벼랑 밑 샘물맛과 별반 다르지 않게 차고 달았다.

이 우물에서 동북쪽으로 3m가량 사이에 두고 네모난 돌로 쌓아 두른 너비 약 5m, 길이 10m 되는 못이 있다. ‘천지(天池)’라고도 부르는 이 못은 당시 병영의 생활용수로 사용되었음직했다. 그러나 강씨의 소개에 따르면 이 못이 옛날에는 포로나 죄인을 가두었던 물감옥으로, 유리왕의 후궁인 화희가 갇혔던 곳이라고 한다. 매년 장마철이면 이 못의 물이 넘쳐나 작은 폭포를 형성하면서 멋진 경치를 연출한단다.

산성 서쪽에는 돌로 쌓은 2기의 석묘가 있다. ‘2희묘’라고 하는 이 2기 석묘 근처에 석축건물터가 하나 있다. ‘2희묘’에는 유리왕의 두 왕비가 묻혀 있고, 그 근처 석축 건물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 무신왕이 태자 때 이곳에서 묘지기를 하면서 효를 행했다고 전한다. 물감옥(천지)과 ‘2희묘’ 및 그 근처 석축건물에 애달픈 전설이 얽혀있다.

그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 초대 왕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등극한 후 왕비 송씨가 병환으로 죽자 유리왕은 선후로 두 계실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녀들 이 바로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다. 화희는 부여(골천)사람이며 치희는 한인(漢人)이었다. 유리왕이 화희 후에 들여놓은 치희를 총애한 탓으로 치희는 화희의 질투를 심하게 받았다. 이리하여 유리왕은 그녀들에게 각각 궁을 지어주어 따로 지내도록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유리왕이 기산(箕山) 순방길에 나서며 7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화희와 치희는 그 7일 동안 질투의 싸움을 벌였다. 화희는 한인의 비천한 계집으로서 앞으로 아이가 생겨도 태자로 세울 수 없거늘 왜 그렇게 까부는가 하며 치희를 심하게 모욕했다. 치희는 화가 치밀었지만 신하들의 비웃음 속에서 화희를 어쩔 수가 없어 홧김에 그만 시종을 데리고 요동의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유리왕이 돌아와 치희가 한을 품고 돌아갔다는 말을 듣자 즉시 말을 타고 그녀를 뒤쫓아가 갖은 방법으로 달랬다. 하지만 치희는 화가 풀리지 않아 궁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제 속을 참지 못해 그만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려버렸다. 유리왕은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후회막급한 일이었다. 그는 치희를 그리며 그녀를 소성자산성 안에 고이 묻어주었다. 이와 함께 그 성안에 물감옥을 만들고 치희의 무덤 앞에서 속죄하라며 화희를 그곳에 가뒀다. 그리고는 송씨의 아들 무신왕(이때 왕좌에 오르지 않음)을 시켜 화희를 지키게 했다. 후에 화희가 물감옥에서 죽자 역시 성안에 묻히게 되었다. 무신왕은 그 후 ‘2희묘’ 옆에 건물을 짓고 무덤지기를 하면서 효도를 다해 대신들의 신임과 찬송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벼랑 동쪽으로 갔을 때 무슨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강경생씨에게 물으니 자신도 모른다며, 이 산에는 수십 종류의 이름 모를 새들과 여우, 산토끼, 청솔모 같은 작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멧돼지와 곰 같은 짐승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강씨는 송백나무와 가래나무, 참나무 등 갖가지 나무가 자라는 이 산에는 밤나무가 가장 많은데 수령이 수백 년 된 청나라 시기의 밤나무만 300여 그루가 된다고 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지름이 1m 이상 되어 보이는 늙은 밤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띄었다. 300년이 넘었다는 이 밤나무마다 관광객들이 소망을 담아 매어놓은 붉은 비단띠가 잔뜩 매달려 있었다.

소성자산성은 산세가 기이하고 경치가 아름답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니 또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산성 앞으로 U자형을 그리며 휘감아 흐르는 소아하와 그 기슭을 따라 나있는 관전현에서 청산구풍경구에 이르는 포장도로 자체가 멋진 자연풍경을 이루고 있다.

옛날 소성자산성에서 벌어진 싸움과 기타 역사사실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설인귀가 이 산성을 불태웠다는 전설만 현지에서 떠돌고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설인귀가 요동정벌에서 71개 고구려산성을 연속 탈취한 후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소성자산성 앞에 이르렀다. 설인귀가 기암괴석이 널려있는 깊고 험한 산속의 구름안개가 감돌고 있는 높은 산정에 쌓여있는 성벽을 둘러보니 험준한 벼랑이 마치 도끼로 내려찍은 듯 아찔했고 오직 남문만이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소로가 암석 사이로 나 있었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관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통과해야만 산정에 이를 수 있다.

설인귀는 산성의 험준함에 놀랐다. 그는 군사들에게 명해 산성을 겹겹이 에워싸게 하고 포석차로 산성에 돌을 날리게 했다. 며칠 동안을 이렇게 공격했지만 산성을 지키는 고구려군은 털끝만큼의 손실도 없었다. 성을 지키는 장수는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이었다. 그는 10여 명의 군사를 남문에 보내어 윤번으로 지키게 하고는 들어앉아서 술만 마셨다. 쳐들어온 당나라 군사들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급한 건 설인귀였다. 포석차로 돌을 날렸으나 구름 위에 솟은 산성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산성에는 양식과 마초가 충족했다. 당나라군이 아무리 포위하고 있어도 성안에는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어 걱정이 없었다. 한 달여를 공격했지만 허사였다. 설인귀는 고민에 빠졌다. 때는 늦가을이어서 계속 이대로 나가다가는 북방의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없어 휘하의 군사들은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돌아가 고종황제를 뵙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설인귀는 연거푸 며칠 동안 밥맛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웬 신선이 부르기에 장막을 나가보니 신선이 그를 데리고 산세를 돌아보며 산성을 깨뜨릴 계책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설인귀가 깨어보니 꿈인지라 신선이 가르쳐준 대로 군사들에게 명해 밤도와 불화살을 만들게 하고 사흘 후에 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사흗날이 되자 당나라군은 설인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산성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이때 신선은 머리에서 금비녀를 뽑아 신전(神箭)으로 변하게 한 후 설인귀에게 넘겨주었다. 설인귀는 신력을 빌려 산성을 향해 신전을 날렸다. 산성 안에서는 삽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산성 안의 병영과 양초들이 세찬 불길에 잿더미로 되자 연개소문과 그의 군사들은 할 수 없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전설은 신화의 성격이 있기는 하나 고구려가 멸망할 무렵의 사실에서 유래된 것 같다. 공교로운 것은 지금도 산성과 약 1㎞ 떨어진 맞은편 산에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서 있고, 그 옆에 네모난 너럭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사람 같은 바위는 바로 그 당시 설인귀에게 성을 깨칠 계책을 알려준 신선의 화신이라 하고, 그 옆의 너럭바위는 설인귀가 신전을 쏴서 날린 자리라고 한다.
최근 몇 년간 여전히 관광지로 개발 중인 소성자산성은 이름이 점차 퍼져 적지 않은 국내 관광객과 한국 관광객들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3>

 (남도일보  2013.01.23 18:23:14)

<오녀산성의 수호성 소성자산성①>

 

오녀산성 지킨 고구려 첫 왕성…수도방어체계 구축
‘키’ 모양 산성…2006년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승격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의 셋째아들 무신왕을 위해 축조


▲ 눈으로 뒤덮인 소성자산성

 

1982년, 단동시 문화고적관리 부문에서 경내의 문화재를 조사할 때 관전(寬甸)만족자치현에 있는 고구려의 소성자산성(小城子山城)을 새로 발견하고 역사유적으로 공식 등록했다. 이 산성은 2004년에 현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된 뒤 2005년 10월에는 시급, 2006년에는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연이어 승격됐다.

성정자산성(城頂子山城)이라고도 부르는 소성자산성은 관전현 우모오진(牛毛塢鎭) 소성자촌(小城子村) 장가보(張家堡) 산 위에 위치해 있는데, 단동 지역의 유명한 관광지 청산구(靑山溝)풍경구와 5㎞ 거리다. 관전에서 청산구에 이르는 도로가 산성 남쪽 기슭 소아하(小雅河) 강변에 나 있고, 산성 동쪽으로는 바로 청산구진의 호당구(虎塘溝)풍경구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소성자산성은 둘레의 길이가 1천515m고 성안 면적이 8만4천㎡다. 지세는 북쪽이 약간 높고 남쪽으로 경사지면서 낮아 흡사 키를 방불케 하는 형국인데, 북쪽 가장 높은 곳은 해발 626m고 가장 낮은 곳은 해발 525m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는 날이면 이 산성이 자리한 높은 산정에 구름 안개가 피어오르는데, 그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중에 떠있는 몽환 같은 신기루를 연상케 한다. 북동쪽으로 오녀산성과 약 38㎞ 거리를 두고 있는 이 산성은 혼강(渾江) 남쪽에서 소아하에 이르는 통로와 고구려 복지(腹地)에서 양평(요동)성으로 가는 길목을 통제할 수 있어 오녀산성의 중요한 군사 부성(副城)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왕성인 오녀산성 주변에 위성 성이 적지 않게 설치되어 있다. 예를 들면 북쪽에는 다물성(흑구산성)과 전수호산성이 있고, 동쪽에는 패왕조(覇王朝)산성이 있으며, 남쪽에는 미창구(米倉溝)산성, 서남쪽에는 와방구(瓦房溝)산성과 고려성산성, 서쪽에는 마안산(馬鞍山)산성과 고검지(高儉地)산성이 있다. 옛날에 이런 위성 성들은 소성자산성과 함께 오녀산성을 수호하는 고구려의 수도방어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6년 말 관계부문에서 조사할 때 이 산성에서는 두께가 1.2~3.5m 되는 성벽을 발견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2m가량 된다.

2007년에도 필자는 소성자산성을 답사한 바 있다. 첫눈에 본 소성자산성의 외부 모습은 환인현에 있는 오녀산성과 닮은꼴이었다. 작은 오녀산성이라 해도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지에서는 이 산성을 오녀산성의 ‘자매성’이라고도 한다.

필자가 산성 턱밑에 이르자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관전현 ‘소성자산성 관광개발공사 문화재보호영도소조(領導小組, 즉 지도팀)’이란 문패가 걸린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공사 책임자 범옥호(範玉虎)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강경생(姜慶生)이라는 청년을 시켜 우리와 함께 산성을 돌아보게 했다.

강씨와 함께 산성 남쪽으로 해서 산을 올랐다. 산기슭에는 화강석으로 가공한 문화재보호표지석이 세워져있고, 그 정면에는 ‘시급문화재보호단위 소성자유적지 단동시 인민정부 2005년 10월 20일 공표, 관전만족자치현 인민정부 세움’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산성의 보호범위가 표시되어 있다.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되기 전의 표지석이었다.

일부러 단동시에서 승용차를 몰고 이곳까지 우리를 안내했던 단동시 의강여행사 탕지균(湯志鈞) 총경리에 따르면 이곳 관리사무소가 세워진 것은 2006년 이곳이 성급문화재보호단위로 승격되면서라고 했다. 이곳을 관광지로 본격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씨는 이 산성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듯, 올라가면서 고구려왕 주몽이 비류국왕 송양(松讓)과 싸워 이긴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이 산성이 오녀산성과 가까워 날이 좋을 때는 여기서 오녀산성을 바라볼 수 있으며, 오녀산성과의 연락은 낭연(狼煙·말린 승냥이 배설물을 불에 태우면 연기가 한 줄기로 곧추 올라간다고 함)을 피우는 것으로 했다는 등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둘러본 이곳 산성은 여느 고구려산성과 마찬가지로 역시 자연 지세를 이용해 성벽을 둘러쌓았는데 성벽 바깥쪽은 낭떠러지거나 가파른 경사면이고, 성안은 펑퍼짐한 키형의 분지다. 산성에 현재 남아있는 유적지로는 남문터, 서문터, 장대터, 11곳의 초소터와 6곳의 묘지터, 700여m의 성벽과 옹성, 8개의 치(馬面), 동·서·남 3개 구역의 건물터, 수문, 우물, 저수지 등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모두 38개나 된다. 그중 건물터만 13곳이나 되는데 터마다 2~12채의 집이 있었던 것이어서 집터가 모두 36개 된다.

자료에 따르면 소성자산성은 오녀산성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고구려 초기 산성이다. 이 산성은 당 총장(總章) 원년(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안동도호부 적리주(積利州) 관할에 들어갔고, 요(遼)나라 때는 개주(開州) 개원현(開遠縣)에 귀속됐으며, 금(金)나라 때는 파속부(婆速府)에, 원(元)나라 때는 파사부(婆娑府) 순검사(巡檢司)에, 명(明)나라 때에는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使)에 속했다. 후금(后金)시기 황태극이 요동에다 유조변(柳條邊·버들 책)을 수축하면서 소성자산성을 유조변 바깥의 봉금지에 두어 200여 년간 무관할지역으로 방치됐다. 청나라 동치(同治) 13년(서기 1874년) 청정부가 동변지대에 대한 봉금령을 풀면서 소성자산성 부근 지역은 비로소 다시 개발되고 인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청나라 광서(光緖) 26년(서기 1900년) 도교 전진용문파(全眞龍門派) 21대 제자 장지성(張志成)이 소성자산성 안에 도교사찰 현도궁(玄都宮)을 짓고 반고진인(盤古眞人), 원시천존(元始天尊), 태원성모(太元聖母), 관무대제(關武大帝) 등 신위를 봉안했다. 그 당시 현도궁은 정전 3칸, 문간방 3칸, 편전 3칸을 각각 지었는데 한때는 분향객들이 줄지어 찾아와 나름대로 흥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찰을 지을 때 이 산성의 성벽과 건물들에서 쐐기돌을 마구 뜯어내 사용했으므로 옛 성에 대한 파괴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민국 25년(서기 1936년), 현도궁은 큰 화재로 정전과 문간방 및 경서, 불상 등이 모두 타버렸다. 후에 나중정(羅中正)이란 사람이 사찰을 중수하고 머슴을 두어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1년에 받아들이는 조곡이 7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1949년 이후 현도궁에는 여전히 도인이 살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1956년에 이르러 현도궁은 소성자산성과 함께 그 당시 인민공사(人民公社, 현재 향<鄕>에 해당)에 넘어갔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들에 의해 이곳의 사찰은 파괴되고 도인은 환속했다.

현도궁 유적지는 산성 내 중간쯤 평탄한 곳에 있다. 집터로 보아 사찰의 길이는 45m고, 너비는 18m로 면적이 450㎡가량 된다. 정전과 산문전, 앞 대청과 서쪽 편전은 모두 쐐기돌로 쌓아올렸으며 남아있는 집터의 높이가 1m 넘는다. 그 당시의 흥성했던 모습을 증명이라도 하듯 궁터에는 기둥 주춧돌이며 석축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현도궁 부근 멀지 않은 곳에는 ‘무신왕부(武神王府)’라고 쓰인 푯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무신왕부’는 또한 ‘태자부’라고도 하는데 고구려 제2대왕 유리왕의 셋째아들 무신왕을 위해 축조한 건물이라고 한다. 건축규모가 비교적 큰 이 왕부의 남아있는 건물벽터가 아직까지 똑똑하게 보인다.

어머니가 비류국왕 송양의 딸이며 유리왕의 셋째아들인 무신왕(서기 4~44년)의 이름은 무휼(無恤, 삼국사기), 미류(味留, 삼국유사)로서 대주류왕(大朱留王), 대무신왕이라고도 칭했다. 서기 14년(유리왕 33년)에 태자로 책봉된 후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서기 18년에 고구려 제3대왕에 등극했다. 그는 서기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해 고구려에 병합시켰고 개미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했으며, 서기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무신왕은 지혜롭고 총명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까지 겸비했으므로 유리왕은 재위 33년 때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 후에 태자무신왕은 한동안 군사를 거느리고 소성자산성을 지켰다고 한다. 이런 역사기록으로 보아 소성자산성은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이며 오녀산성의 자매성으로 고구려 건국 초기의 산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2>

 (남도일보 2013.01.16 18:17:05)

험한 산세 이용한 고구려 뛰어난 축성기술 ‘탄복’
<고구려 내륙 근거지 태자성②>

 

북쪽·동쪽 측면 낭떠러지…남쪽 측면 가파른 산등성이
내·외성으로 나뉜 태자성 둘레 1,425m· 면적 13만2천㎡
생활·방어용 시설 두루 갖춰…기와 등 각종 유물 사라져


태자성은 신빈현 하협하향 쌍하촌(雙河村) 태자성마을 뒷산(북쪽)인 태자하 강기슭에 우뚝 솟아있는 해발 70~80m가 넘는 산등성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의 북쪽과 동쪽 측면은 모두 낭떠러지고 남쪽 측면은 가파른 산등성이다. 바깥쪽 비탈의 경사도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산성의 서쪽 산등성이는 북에서 남으로 점점 높아지는데 그 남쪽 끄트머리는 남잡목에서 관전으로 가는 성도를 사이에 두고 서쪽의 노모저강(老母猪崗·늙은 어미돼지 고개라는 뜻) 주봉에서 뻗어 나온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이어졌다. 그리고 산성 북쪽에는 동북쪽에서 흘러온 태자하가 서남쪽으로 흘러가고 있고, 동남쪽에서 흘러온 태자하의 지류 소북하(小北河)는 산성 동쪽 벼랑 밑을 지나 산성 동북쪽 모서리 아래서 태자하에 흘러든다. 이렇게 3면이 벼랑과 가파른 산등성이로 된 강물이 감도는 이 산성은 난공이수의 천혜의 요새가 분명했다.

태자성 서남쪽 모서리 밑에 남잡목에서 관전으로 가는 성도 옆에 ‘무순시 문화재 태자성(고구려)’이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의 성도는 그곳에서 태자성마을 서쪽을 지나 서남방향으로 나있다. 이 길을 따라 태자성마을 서남쪽에 이르러 되돌아서서 태자성을 바라보면 산성의 절벽 같은 남쪽 측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동서 양쪽이 높고 중간이 오목하게 내려앉은 모양세가 태자하 기슭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선박과 흡사했다.
태자성 밑에 있는 태자성마을 한복판에 동서로 가로나있는 골목길에서 초희영(肖喜榮·64)이란 이 지역주민을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한담을 한 다음, 필자가 온 뜻을 이야기하자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이 노인은 열정적으로 태자성에 대해 아는 만큼 소개해 주었다. 이 노인이 어릴 적에 마을 노인한테 들었는데, 우리가 서 있는 골목길이 바로 옛날 태자성의 해자자리라고 하면서 본인도 50여년 전에 이 길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우묵하게 파인 긴 홈을 보았다고 말했다.

초희영씨의 조언대로 필자는 산성 서쪽 산비탈 아래에 나있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나가다가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한 산비탈의 후미진 곳에 있는 산성 북문터로부터 산성을 살펴보기로 했다. 북문은 산성 북쪽 벼랑의 서쪽 끄트머리와 산성서쪽 산등성이 북쪽 끝머리 사이에 오목하게 들어간 언덕 위에 설치되었다. 돌로 쌓아놓은 두 층으로 된 넓은 계단 위에 있는 문터와 그 양 옆에는 지금은 아무 석축물도 없지만 원래 여기에는 길이가 25m고 너비가 5m며 높이가 3m 넘는 높고 큰 석벽이 양옆 산비탈에 쌓아놓은 성벽하고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원래 이곳에 무너져 있던 담벼락은 언젠가 현지 주민들이 다 뜯어갔다고 한다. 북문터의 지세가 산성에서 제일 낮으므로 방어하는 데 보강하기 위해 고구려 사람들은 북문 동북쪽 근처에다 현지에서 마면이라고 부르는 치를 하나 설치해 놓았다. 산성 북쪽벼랑 바깥쪽으로 우뚝 서 있는 내민 혀 모양으로 된 큰 바위의 윗면을 평평하게 해 그 위에 돌로 쌓아올렸다는 이 치는 남북 길이가 18m고, 동서 너비가 10m며 높이가 10m나 된다. 이것은 요동 고구려 산성 중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북문에 들어서서 북벽터를 따라 올라 가노라니 확 트이고 아득하게 보이는 널따란 성안모습이 눈에 안겨왔다. 동서로 가로놓인 산성의 평면은 불규칙적인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동쪽과 서쪽이 높고 중간이 낮은 말안장 같은 모양이다. 둘레의 길이는 1천425m고 면적은 13만2천㎡다.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산성의 크기를 약 3분의 1로 동쪽부분을 차지한 내성의 지면이 외성보다 좀 더 높다. 온통 밭으로 된 넓은 성안을 덮어버린 흰 눈이 햇빛 아래서 유난히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성문은 북문을 제외하고도 2개 더 있다. 하나는 남벽 중간쯤에 설치해 놓은 남문인데 너비가 2m로 비교적 은폐되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문은 남벽의 가파른 산등성이의 후미진 곳에 설치해 옛날에도 마차는 올라오지 못하고 그저 사람과 말들만 드나들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옹성형태로 된 내성 문인데 내성 서벽 중간위치에 설치해 놓았다. 그 자리에는 지금까지 돌로 쌓았던 담벼락이 보인다.

산성의 동벽은 내성 서벽 북쪽 끄트머리에서 내성 남단까지 395m인데 활모양의 둥근 형태를 이루고 있고, 성벽은 모두 낭떠러지 위에 밑 두께는 1m, 위 두께는 0.5m로 쌓아놓았다. 서벽은 남문에서 북문까지 490m인데 그 평면 주향(走向)이 반환형과 유사하다. 이 서벽은 두 토막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남문에서 산성의 서남쪽 모서리까지인데 이것은 서벽의 남쪽 토막이고 나머지는 서벽의 서쪽 토막이다. 이 두 토막의 성벽은 모두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한 것이다. 그 축조방법은 먼저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비탈의 허리쯤에 성벽을 쌓을 수 있는 밑바닥을 마련해놓고 그 위에다 돌로서 바깥쪽 외벽을 안팎으로 쌓은 다음 그 사이에 흙과 돌조각을 넣고 다져서 높이가 성 안쪽 비탈과 같아지게 해놓고 그 위에다 또 높이가 1~1.5m 되도록 석벽을 쌓았다. 이런 성벽 아래 부위에 돌로 깔지 않았으면 보호 둑을 쌓아놓았다. 남벽은 동벽과 내성 서벽이 사귀는 곳에서부터 남문까지 260m다. 이 성벽의 축조방법은 동·서 양쪽부분이 다르다. 동쪽 부분은 동쪽 성벽과 같은데, 돌이 많이 섞였고, 서쪽 부분은 가파른 산비탈이거나 좀 낮은 절벽 위에다 2m되는 담벼락의 기초를 파서 그 위에 안팎으로 바깥쪽 벽면을 쌓은 다음 그 사이에 돌조각을 넣어 다졌다. 그리고 서벽처럼 그 위에다 또 약 1m 높이로 돌벽을 쌓아놓았다. 북벽은 북문에서부터 동벽북단이 내성서벽 북쪽 끄트머리와 사귀는 곳까지 280m 되는데 동쪽으로 나가면서 점차 높게 솟아오르는 산 능선에 따라 더욱더 높아진다. 이 성벽은 좁고 기다랗게 우뚝 솟은 산 능선을 뼈대로 하고 그 양측에다 다듬은 돌로 조금씩 안으로 들어오게 내·외벽을 쌓았는데 그 내벽의 높이는 6m고 외벽의 높이는 8~10m다. 이 성벽의 밑바닥 너비는 4~6m이고 윗면의 너비는 1m 된다.

중국의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런 견해가 있다. ‘맥인(貊人)도 고구려 사람처럼 산성을 잘 쌓고 축성기술도 높다.’ 이들 가운데 태자성 유적 고고학 발굴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요동에 있는 고구려 초기 산성 중에서 태자성 성벽에 고구려인과 맥인들의 축성기술이 제일 잘 구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실증으로서 여기에 험악한 산세를 이용한 벽면이 수직으로 된 동벽이 있는가 하면, 산 능선을 뼈대로 하고 그 양측에다 다듬은 돌로 조금씩 안으로 들어오게 내·외벽을 쌓은 북벽도 있고, 가파른 곳에 담벼락의 기초를 먼저 파서 그 위에 안팎으로 외벽을 쌓고 그 중간에 돌조각을 넣어 채운 다음 그 위에다 비교적 낮은 돌벽을 쌓아놓은 남벽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양 측면으로 돌로 쌓아올린 전통적인 높고 큰 석벽, 즉 서벽의 북쪽토막 같은 것도 있다.

태자성에는 생활과 방어용 시설도 두루 갖추어졌다. 북문 남쪽으로 54m 되는 곳에 옛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 안벽은 돌로 쌓았고 지름이 1.5m로서 아직까지 물이 나와 성안의 수원(水源)으로 쓰고 있다. 이밖에 산성에서 제일 높은 서남쪽 산등성이와 동벽 남쪽 불룩 솟아있는 곳에 옛 봉화대가 하나씩 있고 내성 안에 군사들을 호령하고 훈련시키는 장대터도 있다. 성 안에는 또 건물터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초희영씨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 태자성안에 허물어진 성벽과 건축물 부근에 쐐기돌 같은 석자재와 기와조각들이 널러져 있었는데 석자재는 이곳 주민들이 가져다 주로 돼지우리나 기타 건물을 짓는 데 썼고 수많은 기와조각은 마차로 실어다 산성의 북쪽 낭떠러지에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산성 안의 사다리 모양으로 된 제전(梯田)의 밭머리에 쌓인 돌들을 눈여겨보면 원래 성벽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확연하다.

태자성의 동쪽 봉화대에 올라서면 산성의 전경과 주변의 산천을 굽어볼 수 있다. 거기에 서서 성안의 드넓은 밭과 산성 아래 태자하와 그 지류 소북하의 충적평원에 아득하게 펼쳐진 논과 밭을 바라보면서 1천여년 전에 고구려 사람들이 여기에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산성을 사수(死守)하는 정경을 상상해 본다. 그러는 순간, 필자는 자신도 모르게 현재와 같이 변해버린 역사에 대한 아쉬움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빠져 버렸다.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1>

 (남도일보 2013.01.09 18:17:02)

3면이 태자하와 산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

 

유리왕, 양맥족 정복 후 쌓은 고구려 사람들의 보금자리
현지인들 “기름진 땅에다 큰 자연재해 없는 축복의 고장”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연나라 태자 丹 슬픈 전설 전해져
<고구려 내륙 근거지 태자성①>


▲ 북문 북측에서 본 성안의 모습.

 

장백산맥과 나란히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나온 용강산맥(龍崗山脈) 남부지역의 무순시(撫順市)에 속하는 신빈현(新賓縣) 평정산진(平頂山鎭) 홍석립자(紅石砬子)산에서 발원해 서남쪽으로 본계(本溪)의 관음각저수지에 유입한 다음, 본계시와 요양(遼陽)시를 거쳐 해성(海城) 서쪽에서 혼하(渾河)강과 합류해 영구(營口)의 대요하(大遼河·발해로 유입되는 요하강의 두 물줄기 중 하나)로 흘러드는 큰 강이 하나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연수(衍水), 그 후에 대량수(大梁水)로 불리던 이 강은 요나라와 금나라 때부터 태자하(太子河)라 고쳐 불렀다(요·금 시기도 대량수란 이름을 겸용). 명나라 시기에 이르러 대자하(代子河)나 태자하(太資河)라 부르던 이 강은 청나라 때에는 만족어로 타스하(塔思哈)나 우르후비라(烏勒乎必喇)로 불렀다. 우르후는 갈대라는 뜻이고, 비라는 강이란 뜻인데 그때는 강에 갈대가 많았던 모양이다. 여러 가지 호칭을 지니었던 이 강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태자하의 이름으로 고착돼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오고 있다.


이 태자하의 발원지와 가까운 신빈현 하협하향(下夾河鄕)의 태자하 남안에 삼면으로 강물이 감돌아 흐르고 또 삼면으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2천년이 넘는 옛 성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중국에서 태자성(太子城)이라 일컫는 고구려의 옛 성이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은 고구려가 혼강(渾江) 유역에 나라를 세운 뒤 제일 먼저(유리왕 때) 삼켜버린 양맥(梁貊· 옛날 양수<梁水>, 즉 태자하 상류지역의 오랑캐<貊>라는 뜻) 부족(部族)의 왕성(王城) 중 하나이다. 고구려가 이곳에다 성을 새로 쌓고 양성(梁城)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즉 ‘호태왕(好太王)’ 비석에 조각되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이 성을 또 맥성(貊城)이나 양맥성(梁貊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은 고구려역사와 관련되는 사서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산성으로서 고구려시기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요동복지(腹地) 고구려 사람들의 근거지와 보금자리이다.

흰 눈이 천지를 뒤덮은 12월의 한 차가운 날에 필자는 태자성을 답사하였다. 이날, 심양(沈陽)에서 매하구(梅河口)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신빈현 남잡목(南雜木)에 이르러 거기서 관전(寬甸)으로 가는 성도(省道)를 따라 남쪽으로 약 65㎞ 달리니 목적지 태자성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태자성 남측 가파른 산등성이 아래에 오붓하게 자리잡고 있는 태자성 마을에 들렀다. 지금 1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태자성과 함께 북·동·서 3면으로 큰 산에 둘러싸여 바람을 등지고 양지바른 국지적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 태자성 문화재 비석.

태자성과 이 마을의 환경을 인터뷰하자 이곳 사람들은 자랑이 늘어졌다. “태자성 이곳은 땅도 기름지고 농사도 잘 되지요. 봄부터 얼음이 얼 때까지 서리가 내리는 것도 보기 드물어 어떤 작물이든 심기만 하면 다 풍작을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 이 곳 사방으로 40리 안쪽에는 종래로 무슨 큰 자연재해가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참으로 복을 탄 고장입니다. 아마 태자성 덕분인가 봐요.” 정말로 놀랍고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더 사람을 놀랄 만한 것은 이 옛 성의 연역(演繹)과 그 옆에서 흐르고 있는 태자하의 전설이다. 그럼 우리들은 역사와 전설 속으로 들어가 요동의 깊은 산속 태자하 기슭에서 생긴 사람들로 하여금 2천년이 넘어도 아직까지 아쉬워서 손목을 불끈 쥐고 탄식을 하게 하는 비장(悲壯)한 이야기를 보기로 하자.

기원전 226년, 한 갈래 방대한 대열이 연나라(燕國) 도읍 계성에서 황급하게 출발해 요동으로 달려온다. 이것은 도망가는 대열로서 이를 이끄는 자는 연나라 43대 국왕이자 바야흐로 연나라 마지막 황제가 될 희(喜)와 그의 아들 태자 단(丹)이다. 이에 앞서 진(秦)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荊苛)를 보내어 진시황을 자사(刺死)하게 했다. 하지만 하늘은 연나라를 돕지 않았다. 도궁비수견(圖窮匕首見·그림을 다 펴자 비수가 나타났다는 뜻)하는 역사사건이 생겨 형가는 살해당하고 만다. 크게 노한 진시황은 대장 왕전을 파견,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진나라군은 승승장구로 연나라 도읍까지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태자 단은 부랴부랴 2만명의 정예군을 데리고 국왕 희를 호위하며 요동으로 도망 오게 된 것이다.

태자 단 등이 도망간 소식을 알게 된 진시황은 분해서 대장 이신(李信)을 파견해 신속히 요동으로 추격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하나는 앞에서 도망가고 다른 하나는 그 뒤를 쫓아가는 두 대열의 인마(人馬)들이 요동 땅에서 새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달린다….

▲ 산성 남벽 아래에 있는 태자성 마을.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의 대열이 먼저 요동군 소재지 양평성(현재 요양)에 이르게 되었다. 태자 단은 자리를 잡아 국왕을 배치해 놓고 몸소 측근들을 데리고 양평성의 주변 환경과 방어시설을 살펴보았다. 요동의 큰 산들이 동쪽에 있는 양평성은 동쪽과 북쪽에는 큰 강 연수(衍水, 즉 태자하)가 흐르고 있어 괜찮지만 서쪽에는 확 트인 일망무제한 평야라서 의지해 지킬 수 있는 험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서쪽에서 뒤쫓아 오는 적군이 쳐들어오면 홍수처럼 밀려들 수 있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제나라 땅을 되찾는 큰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연나라는 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참 뒤를 쫓기고 있는 연나라 왕실로서 양평성에 정착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반드시 다른 지역에 가서 출로를 찾아야 했다. 바로 이때 태자 단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이신의 군이 요하강을 이미 건너 양평 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연나라 왕 희는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했다. 태자 단은 과감하게 양평성을 포기하기로 하고 왕실과 군사들과 함께 연수를 거슬러 요동산간지역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편, 이신이 이끄는 진나라군은 쉴 사이 없이 달려 양평성까지 추격해 왔다. 그러나 태자 단 부자(父子)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고 남아있는 것은 빈 성 뿐이었다. 이신의 대군은 산봉우리들이 기복을 이루며 끝없이 이어진 요동의 산맥을 바라보며 막연해 탄식만 할 뿐 어쩔 수가 없었다….

▲ 산성 남벽터에서 본 태자성 서쪽 봉화대.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은 군사들과 함께 죽을 힘을 다해 요동의 깊은 산속으로 도망 왔는데 연수 발원지역에 이르러 한 높은 산마루가 길을 가로 막았다.(그곳이 바로 지금 태자성 근처라 전한다) 기진맥진한 인마(人馬)들은 잠시 멈추어서 쉬어가기로 했다. 태자 단은 대열을 끌고 양평성을 떠나 요동산지로 와 호랑이와 늑대 떼 같은 진나라군을 당분간 따돌리기는 했지만 부왕(父王)을 어디에 정착시켜야 할지 몰라서 애를 태웠다.

그러던 차에 대열이 휴식을 취하게 되자 그는 임시 머물고 있는 고장의 산천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가 머리를 들어 앞을 가로막은 산을 바라보니 그렇게 찾고 싶었던 고장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는가! 넓은 산등성마루에는 몇 만 명의 군사들이 주둔할 수 있고, 산등성이 동쪽과 북쪽 측면은 아찔한 낭떠러지고 남쪽 측면은 가파른 산비 탈인데다가 삼면으로 산과 강물로 둘러싸여 난공이수의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등성이 주변에는 연수와 그 지류의 충적평원이라서 농사를 짓는다면 군량미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옳다! 이곳이 바로 우리들의 가장 좋은 정착지구나!” 태자 단의 찌푸렸던 양 미간이 삽시간에 펼쳐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연나라 왕실과 군사들은 이 고장에 정착해 산등성 위에 성곽을 쌓고 하곡지대에는 논과 밭을 일구어 농사도 지으며 군사들을 훈련시켜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려고 했다. 고요하던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가 떠들썩하기 시작했다.

한편, 연나라왕 부자를 놓쳤다는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노발대발해 양평에 머물러 있는 이신에게 계속 그들을 추적하도록 명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연나라 왕 희는 또 당황해 했다. 이때, 대군(代郡)에 도망가 임금을 자처하고 있던 조나라 공자(公子) 가(嘉)는 연나라 왕 희에게 편지를 보내 “진시황이 연나라를 소멸하려 한 것은 태자 단을 미워해서 그러는 겁니다. 만약 폐하께서 태자 단의 수급을 보낸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입니다”라고 권고했다. 연나라 왕 희는 고민 끝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진 마음을 먹었다. 그는 태자 단을 불러다 술을 먹여 만취하게 한 다음 손을 썼다. 그리고 나서 아들의 수급을 이신의 군에 보냈다. 아들을 죽이고 대성통곡하는 연나라 왕 희는 너무도 슬퍼서 살 의욕을 잃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산성의 군사들과 주변에 백성들은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마침 초여름인 5월인데 하늘에서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져 평지에 2척 5치의 두께로 쌓이고 기온이 떨어져 겨울처럼 추웠다고 전한다. 아마 하늘과 땅도 감응이 있는가 보다. 아들의 죽음으로 연나라 왕 희는 한동안 평온한 세월을 보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222년, 진나라군이 쳐들어와 연나라 왕 희는 포로가 되고 연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 성 안에 남아있는 장대 터.

후세에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죽게 된 태자 단을 기리기 위해 연수를 태자하로 고쳐 부르고 태자 단이 연수 발원지역에 쌓은 그 산성을 태자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조선문보기자

 

 

고구려의 숨결을 찾아서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남도일보 2012.08.16 11:44:40)

성안의 모습<북벽에서 남벽을 바라본 모습>

요북 최대의 성 최진보산성②.

최진보산성의 성문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하나씩 있다. 그중 정문인 남문은 양측으로 산등성이가 이어졌다. 그 등성이 남쪽 켠은 거의 벼랑으로 자연방어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언저리를 따라 높이가 약 1~2m 되게 석벽을 쌓아 놓았다. 널찍한 남문입구 양옆으로는 허물어진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성벽은 토석 혼축으로, 더러 보이는 성벽 단면에 다져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눈대중으로도 그 높이는 10m 정도, 밑단의 두께도 15m가량 되어 보였다. 성벽 안쪽으로는 약간 평평한 단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옛날 성벽 수비군의 통로로 사용되던 마도(馬道)였다고 한다. 마도의 너비는 5~8m가량으로 산성 성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옛날 남문 쪽에 배수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흔적은 별로 없다. 다만 남문에서 조금 안쪽으로, 바로 용왕전이 있는 곳의 오른쪽(동쪽)에 동서로 약 20m 길이의 둔덕 흔적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것이 옛날 산물을 가두어두었던 저수지 둑이었다고 한다. 저수지의 길이는 약 60m, 한눈으로 보기에도 꽤 넓어 보이는 이 저수지에 옛날에는 적지 않은 물을 저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을 뿐이지만 산성 안 몇몇 골짜기의 산물이 다 이곳으로 모여 물을 풍족하게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였다. 여느 고구려산성을 다녀 봐도 마찬가지겠지만 수원(水源)과는 거리가 멀법한 산성 안에서 풍족한 수원을 확보한 것은 고구려산성의 특성이자 고구려인들의 남다른 슬기와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저수지 옆 수레길을 따라 북으로 관음각을 지나면 수레길도 끊기고 골짜기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 오솔길을 따라 약 500m 나아가면 북문 터가 나타난다. 북문은 양쪽 산발이 내려오며 이어지는 후미진 곳에 있어 낮아보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바깥쪽으로는 너비가 1㎞가량 되어 보이는 긴 골짜기가 평지를 이루며 시원스레 동서로 뻗어있고, 그 사이사이에 자연마을들이 널려있는 것이 가파른 비탈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남문이 산기슭 평지에 있다면 북문은 꽤 높은 산 위에 있었고, 그 아래로는 가파른 비탈이어서 난공이수의 험준한 지세였다. 다만 방금 우리가 느슨한 비탈을 올라오면서 이곳이 그렇게 높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성벽을 따라 산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불구불 동쪽으로 뻗어나간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 터가 확연히 드러났다. 이곳 성벽은 토석 혼축으로 된 성벽인 듯 흙 둔덕에 돌덩이들이 섞여 있었다. 비록 긴 세월을 지나면서 무너져 내려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두둑한 축대가 죽 이어졌고 넓은 곳은 3∼4m는 족히 되었다. 지금은 그 위로 무성하게 관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 거의 동북쪽 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북쪽으로 꺾어진 성벽이 수십m 뻗어나간 것이 보였다. 그 끝은 약간 낮은 등성이인데 그곳에서는 북쪽으로 성 밖 정경이 환히 내려다 보였고 성벽 쪽으로도 전망이 좋았다. 이곳에 각대(角臺·전망대와 보루의 기능을 겸비한 치를 가리켜 부르는 현지의 말)가 있었고, 건물 터였던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 몇 개가 보였다. 성벽 동북쪽 모퉁이에서 동벽을 따라 남으로 좀 나아가면 성벽은 다시 동남쪽으로 호선(弧線)을 그으며 쭉 이어지다가 다시 동쪽으로 굽어들며 등성이까지 이어졌다. 이 등성이는 산성 동남쪽 끝머리다. 이곳에서는 성 안팎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북으로 꺾어들어 조금 더 나가면 산성의 최고봉(해발 344.7m)에 이른다. 성벽은 여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꺾어져서 나가다가 산성 남문 동쪽 산등성이와 이어진다.

우리가 방금 머물렀던 각대 터에서부터 성벽 터의 돌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동쪽으로 이어진 성벽부터는 석벽으로 되어 있다. 이 석벽은 길이가 100m, 높이가 3m로 외벽 면은 북쪽으로 나 있고 남쪽으로는 약간 낮은 산발과 이어졌는데 그 산 아래로 범하가 내려다보인다. 이곳 석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쌓았던 돌들이 흘러내려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이 석벽 중간쯤 허물어진 돌무더기를 따라 어렵게 밑으로 내려가니 허물어진 돌 틈 사이로 길이가 3m, 너비가 1~1.5m 되는 성벽 외벽 밑 부분이 보였다. 거기서 몇m 떨어진 곳에도 성벽 한 토막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두 토막의 성벽은 이 산성에서 유일하게 원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는 성벽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이 고장을 다녀갔지만 이 두 토막 성벽을 언급한 이는 한 명도 없다.

범하 강변의 산성 남벽 낭떠러지

북문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산성 서쪽의 최고봉에 이르는데 그 높이는 해발 316.4m다. 이곳의 성벽 높이는 약 8m이며 토축 벽에 외벽을 돌로 둘러쌓았다. 서북쪽 각대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성벽도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심하게 허물어져 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중 산성 서남쪽 각대에 이르는 130여m의 성벽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산성은 불규칙적인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평면 모양이 엄지손가락을 편 오른쪽 손바닥과 흡사했다. 총체적으로 보아 산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동서 길이가 약 2㎞, 남북 너비가 약 1.5㎞, 둘레의 길이는 5천32m다.

수년 전 산성 안에서는 붉은색의 도자기 조각이 숱하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이런 도자기 조각에는 흰색의 석영 알갱이가 박혀 있는데 현지 박물관 관계자 증언에 따르면 이런 도자기는 고구려시기의 전형적인 특색을 띠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고구려시기의 붉은 줄무늬기와조각과 와당 파편들도 적지 않게 나왔으며 화살촉과 같은 일부 철제 유물도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공식적인 발굴이 이뤄진다면 더욱 많은 유물이 발굴될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성안 두도구와 이도구의 양지쪽 비탈과 등성이, 그리고 성벽과 가까운 곳에서 사각형, 정사각형 또는 지름이 5~10m인 원형의 크고 작은 구덩이들이 숱하게 발견되었는데 깊이는 약 2m로 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고려갱(高麗坑)’이라고 부른다. 이 구덩이들은 고구려시기 이 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했던 반 지하 건축물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요동벌에 널린 적지 않은 산성들이 그렇겠지만 중요한 관공서나 기타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던 곳에서 모두 이런 형태의 반 지하 건축물 유적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