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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막 오른 시진핑 시대](1) 시진핑은 누구인가 (경향신문 2012-11-08 21:25:01)

[막 오른 시진핑 시대](1) 시진핑은 누구인가

ㆍ혁명 원로의 아들로 지방서 25년 근무… 날카로운 공산주의 이론가

 

중국인 13억여명 가운데 최고의 1인 자리에 오르는 시진핑(習近平·59)은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정치인이다. 혁명 원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질곡의 청년 시절을 보냈고 지방에서 25년을 근무했다. 온화한 미소 속에는 덕을 중시하는 인품이 담겨 있지만 10번이나 거절당했지만 끝내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서 보듯 강한 집념의 소유자이며, 날카로운 공산주의 이론가란 평가도 따라붙는다.

시진핑은 1953년 6월 시중쉰(習仲勳·1913~2002) 전 부총리의 두 번째 부인 아들로 태어났다. 시중쉰은 당의 혁명 원로이자 광둥(廣東)성의 개혁·개방을 이끈 인물이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숙청당했고 당에서 축출당한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5살 때인 1958년 아버지, 형과 함께한 시진핑(가운데).

▲ 지방 전전 질곡의 청년기 보내
1979년 대학 졸업 후 정계진출
저장성 서기 시절 괄목할 업적
행동 중시하고 현장 시찰 즐겨

시진핑은 부친이 근무하는 중난하이에 자주 놀러갔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수수(叔叔·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태자당 계열로 분류되는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서기 등과 어릴 적부터 교류했다. 시진핑의 고난은 1962년 부친이 권력투쟁에 밀려 실각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까지 몰아치면서 시작됐다.

1969년 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하방됐으며 처음에는 불과 3개월을 못 버티고 탈출했다. 체격은 우람했지만 농사짓는 솜씨는 시골 아주머니에 미치지 못했다. 백부와 백모의 설득으로 다시 량자허로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시진핑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공산당 입당에 성공했고 1974년에는 량자허의 촌장이 됐다. 시 부주석은 2003년 자신이 쓴 회고문에서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도 없어 무척 외로웠지만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내 숙소는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 드렸고 당지부 서기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1975년 칭화대에 입학할 수 있는 2명이 옌안에 할당됐고 시진핑에게 한 자리가 돌아가면서 그는 7년간에 걸친 하방생활을 접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중학교고등학교 정규과정을 거치지 못한 그에게 비로소 학업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 부친의 연금생활도 13년 만에 끝나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1980년대 초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한 시진핑(오른쪽).


1979년 여름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돼 당시 겅뱌오(耿彪) 부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뒤로한 채 그는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1982년 3월 베이징에서 300㎞ 떨어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당위원회 부서기로 부임했다. 현의 3인자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최고 간부가 되려면 지방정부 간부의 길을 걷는 것이 좋다는 부친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보수파 겅뱌오가 실각하기 전에 아들을 빼내야 한다는 부친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

유명 가수 출신의 부인 펑리위안.

시진핑은 1985년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옮겼으며 이후 17년간 푸젠성에서 일하면서 당서기까지 지냈다. 푸젠성에서의 시간은 그가 정치적 기술을 연마한 시기다. 샤먼시 부시장 재직 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시진핑은 자신의 뒤를 봐주던 샹난(項南) 푸젠성 서기가 실각하면서 1988년 5월 푸젠성 닝더(寧德)지구 서기에 임명됐다. 닝더는 푸젠성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고 그로서는 정치적 좌절이기도 했다. 당시 푸젠성의 한 관리는 홍콩 언론에 “당시 시진핑에게 태자당의 인맥을 활용해 도시를 업그레이드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며 “대신 시진핑은 푸른 산과 강을 인민들에게 돌려주자는 환경운동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당시 부유층, 권력층이 조성한 큰 묘지들이 시진핑의 눈에는 거슬렸다고 한다. 지도자들이 승진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업적만 생각하던 시기에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우는 드물었다. 1990년대 그의 밑에서 일했던 한 관리는 “표면적으로 시진핑은 안전을 추구하는 평범한 지도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매우 야심찬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한때 푸른색 군복과 낡은 옷으로 검소함을 드러내던 시진핑은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서기로 일하면서 양복을 입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등 해외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외부 인사들을 많이 만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2002년 푸젠성 성장에서 저장(浙江)성으로 자리를 옮겨 2007년 초까지 재직했다. 당시 31개 중국 성·직할시·자치구 당서기 가운데 최연소급이었다. 그는 골수 현장주의자여서 저장성 서기 시절 동안 1년의 3분의 1을 출장으로 보냈다. 2006년 8월에는 하루에 315명으로부터 진정을 받은 일도 있다. 저장성 서기 재임 당시 성의 국내총생산(GDP·1조5600억위안)이 상하이시(1조300억위안)를 능가하는 성취를 일궈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중국 전문가 리청 연구원은 “민간 기업을 발전시키는 데 시진핑이 인상적인 업적을 보여줬으며 이는 그가 개방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시진핑(오른쪽)이 저장성 서기 시절인 2003년 4월 위허진의 가물치 단지를 시찰하고 있다. 시진핑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농촌이나 공장 등 현장시찰을 즐겨 했다.


시진핑은 2007년 3월 돌연 상하이시 서기로 옮겼는데, 부패로 낙마한 천량위(陳良宇)의 뒤를 잇기 위해서였다. 천량위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후진타오(胡錦濤)의 후계자로 고려한 인물이다. 상하이방의 본거지에 그가 입성한 것은 장쩌민이 포스트 후진타오로 시진핑을 지목한 것을 의미했다. 시진핑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농촌이나 공장 등 현장 시찰을 즐겨했지만 상하이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일부 상하이 유력 인사들이 “그의 언동에는 생기가 없고, 특징도 없고, 강직함도 없었지만 실수도 없었다”고 혹평한 것도 이 같은 처신 때문이다. 상하이에 부임한 그를 위해 부하 관리들은 영국식 호화주택을 사택으로 준비했으나 시진핑은 “당 원로들의 요양원으로 쓰라”며 곧바로 떠나버렸다. 혹자는 자신에게 쳐진 덫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진핑은 또 미국의 건축회사인 젠슬러가 상하이의 랜드마크 건물을 지으려는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상하이의 아이콘이 될 건물이라면 중국 기업이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전임 천량위 서기가 중앙정부와의 불화로 낙마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 “상하이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상하이에서 나온 새로운 물결소리를 환영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평가했다.

상하이시 서기로 7개월 재직한 그는 마침내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미는 리커창(李克强)을 밀어내고 차기 지도자를 예약하기에 이른다. 그의 인생 역정에서 보듯 시진핑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출세한 정치인은 아니다. 1997년 10월에 열린 15차 당 대회에서 장쩌민이 포함된 최고 간부들 사이에서 후진타오 후임을 논의하면서 시진핑은 리커창과 함께 후보로 일찌감치 떠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10월 상무위원이 된 시진핑.


시진핑이 중국의 지도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정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시진핑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입지를 굳혀 갔다. 정융녠(鄭永年)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은 “시진핑의 위상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더욱 강화됐다”고 말한다. 이는 중앙에서 그가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한 첫 케이스로 꼽힌다. 올림픽 준비는 외교뿐 아니라 국내 안보, 병참, 운송, 미디어 관리, 환경보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작업이고 인민해방군, 경찰, 당, 정부, 지방관료들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올림픽을 기회로 삼아 티베트의 분리주의 운동이 격화됐고 신장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도 동태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2010년 10월18일 톈안먼에서 서쪽으로 8㎞ 떨어진 곳에 있는 베이징의 징시빈관(京西賓館). 시진핑은 17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 폐막일인 이날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그가 군권 장악을 위한 중대한 관문을 넘었음과 동시에 사실상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됨을 확정짓는 날이었다. 시진핑은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시진핑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정치인이란 평가가 적지 않으나 이는 생존술이었을 수도 있다. 예상보다 그가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이란 전망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막 오른 시진핑 시대](2) 아킬레스건이 될 ‘가족 문제’

 (경향신문 2012-11-09 22:44:39)

4억달러 가산 ‘부정축재’ 의혹… 국민가수인 부인도 ‘족쇄’로

 

시진핑(習近平·59) 중국 국가부주석의 형제들도 시 부주석처럼 부친의 실각과 문화대혁명 등으로 고난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시 부주석이 지도자 자리를 예약한 후 각종 이권 개입과 특혜로 재산을 불려 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가족 문제는 앞으로 10년간 중국을 이끌 시 부주석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요인이다.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0)은 중국의 국보급 가수로 스타급 퍼스트레이디의 등장이 기대되지만 보수적인 중국의 정치풍토상 시 부주석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중국 선전당국은 펑리위안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해 갈지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진핑 부주석 직계 가족. 시 부주석과 부인 펑리위안, 어머니 치신, 딸 시밍쩌, 아버지 시중쉰(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 형제들 국영사업 수주·이권 개입 논란
부인의 ‘서방스타일’ 역효과 될 수도

시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시 부주석의 이복형 시정닝(習正寧)은 하이난(海南)성 사법청장을 역임했으며, 199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큰누나 시허핑(習和平)은 30세가 되기 전 요절했으며, 시 부주석은 누나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복누나 시첸핑(習乾平)은 생존해 있다.

시중쉰의 두 번째 부인이자 시 부주석의 모친인 치신(齊心)은 공산당과 팔로군 여전사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시 부주석의 친누나 두 명의 이름은 각각 치차오차오(齊橋橋), 치안안(齊安安)이다. 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 성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블룸버그통신은 시 부주석 일가의 자산 총액이 4억달러(약 4600억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자산은 대부분 치차오차오(齊橋橋)와 그의 남편 덩자구이(鄧家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치차오차오가 전략 물자인 희토류 업체의 지분을 18% 보유하고 있다는 파이낸셜타임스 보도도 있었다. 치안안은 중국외교학원을 졸업했으며, 캐나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남편 우룽(吳龍)은 뉴포스트콤이라는 회사의 대표로 있으면서 2007년 이후 국영기업이 발주한 이동통신 관련 용역 및 자재 납품을 다수 수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시 부주석의 2살 아래 남동생인 시위안핑(習遠平)은 시 부주석처럼 문화대혁명 등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 부주석도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위안핑은 인민해방군에 복무했으며 무역회사, 정부기관에도 근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의 일부 전기 작가들은 그가 형의 권세에 기대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밝힌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시위안핑은 1997년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홍콩으로 이주했다.

중국 공산당이 공표한 이력에는 시 부주석의 초혼 사항이 기재돼 있지 않으나 첫 부인은 주영 중국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커화(柯華)의 딸이다. 결혼 3년 만에 이혼했으며 부인이 시 부주석의 지방 생활을 힘들어 한 것이 헤어진 이유로 알려져 있다.

시 부주석이 펑리위안을 만난 것은 1986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시절이다. 시 부주석이 베이징으로 올라와 만났다는 설과 샤먼에 있는 펑리위안의 친구 집에서 만났다는 설이 엇갈린다. 당시 펑리위안은 스타급 가수였고 시 부주석은 첫 만남에서 “성악 창법에는 어떤 종류가 있느냐”며 펑리위안의 전공에 깊은 관심을 보여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1987년 9월 결혼했지만 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둘이 워낙 바빠 떨어져 있을 때가 더 많았고 춘제(春節·중국 설날) 때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1993년 태어난 딸 시밍쩌(習明澤)가 있으며, 현재 하버드대에 유학 중이다. 시 부주석은 푸젠성에서 일할 때 방송 진행자와 밀접한 관계라는 소문도 돌았다.

펑리위안은 1962년 산둥성에서 3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현의 문화관장을 지냈고 모친은 극단 단원이었다. 지난해 중국 잡지 환구인물은 펑리위안 특집 기사에서 “그가 어린 시절 극단 마차를 타고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먹다 굶다 하는 등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7년 학생 모집을 재개한 산둥성의 5·7예술학교에 합격해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으며, 중국음악학원에서 유명한 민속 성악가의 지도를 받았다. 1982년 CCTV 춘제 경축 공연에 출연하면서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2002년 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 계급을 부여받았으며, 남편이 사실상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2007년부터는 공익활동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9년 부친을 잃었으며, 모친은 베이징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펑리위안이 서방 스타일의 첫 퍼스트레이디로 개방적이며 현대화된 중국을 상징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자칫 그의 존재에 시 부주석이 가리는 역효과를 중국 당국이 우려한다는 분석도 있다.


 

[막 오른 시진핑 시대](3) 시진핑을 만든 사람들

 (경향신문 2012-11-11 23:24:09)

ㆍ쩡칭훙, 후진타오 설득 등 킹메이커 역할… 막후 실세로 떠올라
 
 
시진핑(習近平·59)을 최고 권좌에 올려 놓은 킹메이커로는 쩡칭훙(曾慶紅·73) 전 국가부주석이 꼽힌다. 태자당의 다거(大哥·큰형)로 불리는 그는 시진핑 시대의 막후 실세다. 상하이방을 대표하는 장쩌민(江澤民·86) 전 국가주석도 시진핑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시진핑 체제의 출범은 결국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연합이자 장쩌민과 쩡칭훙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
 

뒤에서 밀고 중국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 국가부주석(뒷줄 왼쪽)과 그의 킹메이커로 꼽히는 쩡칭훙 전 부주석(뒷줄 오른쪽)이 지난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 도중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앞줄 왼쪽)과 장쩌민 전 국가주석(앞줄 오른쪽) 뒤를 지나가고 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 각 정파와 두루 소통 능력
석유방 지지도 이끌어내
장쩌민의 신임도 한몫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쩡칭훙은 자신의 2선 퇴진을 조건으로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으로 후진타오(胡錦濤·70) 국가주석이 밀던 리커창(李克强·57) 부총리에게 유리하게 흐르던 판세를 뒤집은 것이다. 당시 쩡칭훙은 “어느 파벌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이 시진핑”이라며 당 원로와 후 주석 등을 설득했다. 시진핑과 14살 차이가 나는 쩡칭훙은 공산당 혁명 1세대 원로인 쩡산(曾山) 전 내정부장을 부친으로 둔 태자당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시진핑 집안과 친밀히 교류했으며, 시진핑은 지방 근무 시절에도 기회가 되면 쩡칭훙 부부를 찾아 안부를 전했다.

쩡칭훙은 1999년부터 3년간 당 조직부장을 맡은 경험이 있어 조직과 인사에도 정통하다. 2000년대 들어 중국 권부에 등장하기 시작한 석유방(석유부 또는 석유학원 출신 인맥)의 대표로, 저우융캉(周永康·70) 정법위 서기와 장가오리(張高麗·66) 톈진시 서기 등 석유방 출신들이 시진핑의 우군이 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놨다. 지난 3월 보시라이(薄熙來) 실각 이후 당내 권력투쟁이 격해지면서 시진핑 체제가 흔들릴 위험에 처하자 정국 혼란을 막후에서 수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쩡칭훙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상하이에서 장쩌민과 함께 일하고 있었으며, 장쩌민이 상하이시 서기에서 당 총서기에 오르면서 베이징으로 데려왔다. 중앙에 기반이 없던 장쩌민을 당·군부 인사들과 연결시켜 주면서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장쩌민이 총서기에서 물러난 뒤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2년 동안 후진타오 주석에게 넘기지 않자 이를 비판하면서 한때 갈등관계에 놓인 적도 있다. 막후에서 정국을 움직이던 쩡칭훙은 지난 9월22일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열린 뮤지컬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장쩌민과 함께 관람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지난 8일 열린 18차 당 대회 개막식에는 당 원로의 자격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베이징 소식통은 “장쩌민이 고령인 데다 건강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상하이방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쩡칭훙이 시진핑 시대의 최대 막후 실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 언론들은 그를 두고 줄을 가장 잘 서는 명석한 인물로 평가한다. 판세를 읽어 될 사람을 밀어주고 각 정파와 두루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2009년 10월 중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도서전 개막식을 주관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난 시진핑은 장쩌민의 영문판 저작을 선물했다. 신화통신은 당시 “시진핑이 에너지와 정보기술 문제에 대해 장쩌민이 쓴 저서의 영문판 두 권을 전달했다”며 “장쩌민의 안부와 축복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당내에서는 시진핑이 장쩌민이 신임하는 인물이고 남다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언론인 출신의 중국 전문가 샹장위는 장쩌민이 시진핑을 택한 이유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신중하게 운영하면서 옛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위험한 일을 벌여 배를 좌초시키고 모두를 끝장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쩌민으로서는 자신의 은퇴 후 저물어가던 상하이방 세력을 시진핑을 통해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다.

시진핑을 도운 인물로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자칭린(賈慶林·72) 정협 주석이다. 그는 1990~1996년 푸젠성 성장과 서기를 지내 오랫동안 시진핑의 상사였다.

허궈창(賀國江·69) 중앙기율위 서기도 시진핑보다 한 발 앞서 푸젠성 성장을 역임한 푸젠파의 일원이다. 현재 상무위원 9명 중 3명이 푸젠 지역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묶여 있는 셈이다. 시진핑 주변에는 태자당과 상하이방, 푸젠방, 석유방, 칭화대 동문 등 각종 인맥이 거미줄처럼 포진해 있다.

후 주석이 시진핑 체제 출범을 사활을 걸고 막았다면 시진핑으로서는 큰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 주석으로서는 시진핑이 최선은 아니었더라도 차선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는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와 무관치 않다. 1980년대 중반 후 주석의 스승으로 불리는 개혁파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는 덩샤오핑(鄧小平)의 퇴진을 요구해 원로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하지만 원로 가운데 후야오방을 지지한 사람이 바로 시중쉰이었다는 것이다.


 

[막 오른 시진핑 시대](4) 시진핑·리커창 체제

 (경향신문  2012-11-12 22:29:32)

ㆍ“리커창, 시진핑에 앞서지 않을 것이며 뒤처지지도 않을 것”

 

시진핑(習近平·59) 중국 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57) 부총리는 향후 10년간 중국을 이끌 5세대 지도부의 핵심 2인이다. 시 부주석은 오는 15일 당 총서기로 선출되는 데 이어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오른다. 리커창 부총리는 15일 상무위원에 재선되고 내년 3월 국무원 총리로 정식 선출될 예정이다. 중국의 총리는 내각의 정책 집행과 인사권을 쥐고 있으며 사실상 국가원수급이다.

문제는 시진핑과 리커창이 정치적 기반은 물론 성장 배경과 가치관 등에서 차이가 있어 순항할지 미지수란 점이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각각 당내 태자당(당·정·군 혁명 원로 자제 그룹)과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그룹을 대표하고 있다. 서로 다른 계파의 주석과 총리 조합이 탄생하는 것은 이례적이며 전임 주석이나 총리들과 비교해 시진핑과 리커창 체제의 차별성은 두드러진다.

중국 차기 최고지도자인 시진핑 국가부주석(왼쪽)과 차기 총리 내정자인 리커창 부총리가 지난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8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개막회의를 마치고 걸어나가고 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 다른 계파 주석·총리 조합
리커창, 개혁 성향 더 짙어
손발 잘 맞춰갈지 미지수

지난 10년간 후진타오(胡錦濤·70)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70) 총리는 갈등의 요소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 총리가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은 무계파인 데다 태자당보다는 공청단 계열에 가까운 성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1998년 총리에 오른 주룽지(朱鎔基·84) 전 총리의 경우 개성이 강하긴 했지만 당시 장쩌민(江澤民·86) 주석과 같은 상하이방 출신이어서 호흡에 별 문제가 없었으며 줄곧 성장지향적인 개방·개혁정책을 폈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성장 배경부터 확연히 다르다. 시진핑의 부친이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란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 리커창의 부친 리펑싼(李奉三)은 지방정부의 중간급 간부로 안후이성 펑양현 현장, 안후이성 원롄(文聯·문학예술계연합회) 등에서 일했다. 성격은 시진핑이 덕장형이라면 리커창은 재사(才士)형으로 알려져 있다. 리커창은 대학졸업베이징대학 당위원회 고위 간부의 권유로 유학을 포기하고 베이징대 공청단위원회 서기를 맡으면서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청단 활동 경력만 15년이 넘는 반면 시진핑은 일찌감치 지방행을 택해 지방에서 잔뼈가 굵었다.

리커창의 대학 친구 중에는 후일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인사들이 있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망명활동을 하는 인사들은 리커창의 개혁 성향에 기대감을 표시하면서 시진핑보다 적극적으로 정치개혁을 주장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베이징대 재학시절 리커창과 영국의 법률서를 함께 번역했던 양바이쿠이는 지난 10일 워싱턴포스트에 “민주주의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입헌제와 법치를 신봉한다는 점은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도 리커창이 대학재학 시 활발한 학생운동을 했다며 개혁적 성향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시진핑은 경제적으로는 개혁·개방파에 속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당 지배체제를 흔들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리커창이 정치개혁에 과감한 목소리를 낸다면 충돌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리커창이 당의 입장에서 벗어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할지는 미지수다. 전직 관료 옌화이는 “시진핑이 얼마나 나갈 것인지가 리커창이 얼마나 나갈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라면서 “리커창은 시진핑 앞에 가지 않을 것이며 그의 뒤에서 지체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주간지 편집장 출신의 리다퉁도 “리커창은 시스템에 묶일 것이며 권한 또한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에 대한 생각 역시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커창은 임대주택과 식품안전, 공공의료, 기후변화, 청정재생 에너지 분야에 관심이 많다. 지난 30년간의 개혁·개방 후유증을 치료해야 하며 중국 경제의 체질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반면 시진핑은 상하이와 저장성 등 부유한 동부 연안에서 주로 근무해 성장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민간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편이다.


시진핑·리커창 체제의 경제정책 방향과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은 왕치산(王岐山·62) 부총리다. 그는 태자당 출신으로 시진핑과 가깝다. 경제·금융 분야에 그의 인맥이 많다는 사실은 리커창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인민은행장으로 유력한 러우지웨이 중국투자공사(CIC) 회장도 왕치산이 챙기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왕치산은 당의 기강을 담당하는 중앙기율위원회 서기를 맡을 것이란 전망도 있어 경제에서는 손을 뗄 가능성도 있지만 서방 세계와 인적 네트워크가 긴밀하고 실력을 인정받고 있어 리커창으로서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존재다. 주룽지 전 총리가 왕치산을 차기 총리로 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한때 긴장감도 돌았다.

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0)은 스타 가수이며 리커창의 배우자인 청훙(程虹·55)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교수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베이징 수도경제무역대 영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에게 ‘내 마음속의 교수님 10인’에 2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中 5세대 지도부 리더십 탐구]中시진핑, 토굴서 7년 살며 몸 낮춰...왜?

 (동아일보 2012-11-12 14:45:08)

토굴로 쫓겨난 ‘反혁명’ 아들… 떠날땐 주민들이 60리길 배웅
본보 고기정 특파원, 시진핑 下放생활했던 산시성 량자허 현지 르포

 

《 중국은 8일 개막한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를 통해 10년 만의 지도부 교체에 들어갔다. 앞으로 10년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중국 대륙에 떠오르는 새로운 별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

22세 량자허 촌장 시진핑 시진핑(앞줄 가운데)이 산시 성 량자허 촌에서 7년간 있다가 1975년 베이징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을 주민 및 지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는 22세였다. 사진 출처 바이두

 

지난달 31일 찾은 량자허(梁家河)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머물던 시절처럼 여전히 궁벽한 산촌이었다. 혁명성지 옌안(延安)에서 국도 210호선을 1시간 반가량 달린 뒤 농로를 20분 정도 더 타야 겨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민이래야 80가구 347명. 남북이 산으로 막힌 협곡에 자리한 탓에 ‘도대체 뭘 먹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 “디댜오(低調·자세를 낮춤) 유지하라고 했다”



시 부주석은 원래 ‘태자당(혁명원로 자제 그룹) 중의 태자당’이었다. 부친 시중쉰(習仲勳·1913∼2002)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최고위 간부들의 주거지인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 살던 그가 량자허까지 오게 된 건 9세 때인 1962년 아버지가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실각한 것이 계기였다. 산간혁명의 근거지인 시베이(西北)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건국 영웅 류즈단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오보다 류즈단을 더 치켜세우는 듯한 이 소설 때문에 류즈단의 전우이자 초고를 손봤던 시중쉰마저 반(反)혁명분자로 몰렸다. 반혁명분자의 가족이었던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던 1969년 1월 량자허로 하방(下放)됐다.

당시 량자허 주민은 야오둥(窯洞)으로 불리는 토굴에서 살았다. 부잣집 도련님이던 그는 몸에 이가 옮을까 봐 농민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아무 생각 없이 빵을 개에게 던져줬다가 “부르주아 부패분자 시중쉰의 아들이 개에게 (귀한) 빵을 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왕(王)모 씨(73)는 “학생 몇 명(12명)이 왔는데 마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시진핑은 책을 많이 봤고 아는 게 많았지만 일은 잘 못했다”고 회고했다.

농촌 밑바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진핑은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갔다. 이모부에게서 “민중의 바다로 들어가라. 그게 노동개조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비로소 그 바다에 몸을 적셨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로 돌아와 벼룩과 거친 음식, 농촌생활, 노동, 사상 등 ‘5대 관문’을 통과하며 농민들과 친숙해졌다.

그가 살던 10m²(약 3평) 남짓한 토굴의 입구는 지금은 일반 집과 마찬가지로 개조돼 관광지처럼 꾸며져 있다. 앞에 작은 매점도 있다. 매점 주인은 “일반인에게 개방은 안 되지만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다”라고 전했다. 토굴뿐 아니라 마을 주변도 새로 도로 공사를 하는 등 시 부주석의 최고지도자 등극을 앞두고 지방정부에서 적잖게 신경을 쓰는 듯했다.

토굴 취재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던 중 갑자기 경찰차 한 대와 승용차 2대가 다가와 기자를 둘러쌌다. 공안이 끌고 간 곳은 파출소 분소로도 쓰이는 촌민위원회. 시진핑이 21세 때 서기로 근무했던 곳이다. 연행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외신기자가 함부로 취재하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2시간가량 기자를 억류해 취조한 뒤 풀어줬다.

마을 자율경비대원이라고 밝힌 한 40대 남성은 기자에게 “우리도 시 부주석이 더 높은 자리로 가게 돼 정말 기쁘다. 하지만 위에서 ‘디댜오(低調·자세 낮추기)’를 유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토굴에서 생활 중국 산시 성 량자허 촌에 지금도 남아 있는 토굴의 내부. 시진핑 국가 부주석도 1969년 하방돼 이런 곳에서 7년간 살았다. 오른쪽 사진은 시 부주석이 살았던 토굴의 외부를 깔끔하게 정비한 ‘시진핑 토굴’의 입구. 량자허=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 오늘의 시진핑을 만든 ‘겸손과 온화’

2007년 10월 시 부주석이 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을 때 홍콩 다궁(大公)보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디댜오, 핑스(平實·소박하고 수수), 첸허(謙和·겸손하고 온화), 다치(大氣·대범하고 당당)’라는 4단어였다. 이 중 ‘디댜오’와 ‘첸허’는 오늘의 시진핑을 있게 한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에 다시 돌아갔을 때 옌안 사투리부터 익혔다. 촌민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다. 이곳의 거친 잡곡에도 익숙해졌으며 양말을 직접 짜서 신었다. 서기로 있을 때는 전용 승용차를 배정받았으나 엔진을 빼내 트랙터를 만들어 농사일에 쓰도록 한 일화도 전해진다. 베이징의 귀족 청년이 어느새 농군으로 변한 것이다. 주민들은 시진핑이 1975년 10월 량자허 생활을 끝내고 상경할 때 60리길을 걸어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됐다.

량자허에서 몸에 익힌 덕목은 이후 공직생활에서 발휘됐다. 그는 푸젠(福建) 성장(대리성장 포함)으로 6년간 재직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반면 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의 고충을 듣고 함께 호흡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화권 언론이 2007년 그가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전격 발탁됐을 때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李源潮), 보시라이(薄熙來) 등 5세대 지도부 ‘4대 천왕’ 중 그를 으뜸으로 꼽은 것도 이런 품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석자를 따서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평소 간부로서 태도는 소박하고(平) 겸손,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말도 있다. 량자허에서 만난 촌민위원회의 한 청년은 “우리 마을 출신이 최고지도자가 됐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한 것도 그가 ‘자세 낮추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중국-(2부) ‘중국호’ 이끌어갈 5세대 지도부] ① 풍파에 단련된 지도자 시진핑

 (국민일보 2012.11.12 21:35)

반동가족 출신… 산골 토굴서 키운 대망

"시진핑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반은 밝았지만 반은 어두웠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이 주관하는 인물 종합잡지 '중화 자녀'는 시진핑(習近平)의 성장과정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는 당 고위 간부 자제들이 모인 베이징 '81중학'에 다녔다. 중국 지도부가 여름을 보내는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가족들과 휴가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9살 되던 해인 1962년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부총리직을 잃은 데다 문화혁명(1966∼1976)까지 이어지면서 그의 운명도 곤두박질쳤다.

류즈단 사건이란 마오쩌둥(毛澤東)과 류샤오치(劉少奇)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마오쩌둥 편에 선 캉성(康生)이 류즈단(시중쉰과 함께 서북지구 혁명을 이끎)을 그린 장편을 반당 소설로 몰아 책 출판에 간여한 시중쉰 등을 대거 숙청한 것을 말한다.

시진핑은 어린 마음에도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느꼈다. 그 뒤 '반동'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10번이나 거절당한 끝에 가까스로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었다. 1974년 21세 때였다.

◇시진핑의 3가지 경험='류즈단 사건, 상산샤샹(上山下鄕), 정딩(正定)현 서기' 시진핑이 어려서부터 30대 초까지 겪은 3가지 일은 그가 오늘에 이를 수 있도록 해준 자양분이었다.

상산샤샹은 마오쩌둥이 문혁 때 "지식청년은 농촌에 내려가서 농민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주도한 운동. 시진핑은 1969년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촌이라는 산골로 갔다. 중학교를 막 졸업해 16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거기서 벼룩이 득실거리는 토굴에서 생활했다. 그는 3개월도 채 못 버티고 기차로 베이징으로 탈출했으나 이모와 이모부의 설득으로 량자허로 돌아갔다. 그 뒤 6년 동안 지내면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1974년에는 공산당 량자허 지부 서기도 지냈다.

시진핑은 뒷날 "량자허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 기간으로 인해 중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75년 공농병(工農兵) 특채로 칭화대 화공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량자허를 떠났다.

그가 1982년부터 3년 동안 허베이(河北)성 정딩현에서 당 부서기와 서기로 일한 것은 또 다른 소중한 경험이었다. 대학 졸업 직후 아버지의 부하였던 겅뱌오 중앙군사위 비서장의 비서로 3년 경력을 쌓은 뒤였다.

정딩현은 삼국시대 명장 조자룡(趙子龍)의 고향. 그는 역사도시 특성을 살려 여기에 국영 CCTV의 대형 드라마 '홍루몽' 촬영세트장을 유치해 관광명소로 개발했다. '룽궈푸(榮國府)'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그 뒤 170여편의 TV 드라마를 촬영해 '중국의 할리우드'로 꼽힌다. 정치 행로의 초석을 정딩에서 쌓은 것이다.

리커창을 누른 시진핑=시진핑(당시 상하이시 서기)은 2007년 17차 당 대회에서 리커창(랴오닝성 서기)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상무위원 서열에서 시진핑은 6위, 리커창은 7위였다. 리커창이 '황태자'가 될 것이라는 당시 관측을 뒤집고 차기 대권 후계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는 당 대회 전 실시된 당내 투표에서 후진타오가 밀었던 리커창을 압도적 표차로 제쳤다. 태자당 대부 쩡칭훙(曾慶紅)이 장쩌민(江澤民)의 협력을 얻어내는 등 '킹 메이커' 역할을 한 게 주효했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시진핑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덕(德)을 중시하며 주변 관리를 철저히 한 덕이었다.

이를 두고 시진핑은 대권에 오르기까지 태자당, 당 원로, 각 파벌, 군대 등 신세진 사람이 너무 많아 앞으로 부담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을 한마디로 '온(穩)'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